< 공권력의 힘 (3) >
나는 작게 감탄했다.
‘생각보다 훨씬 멀끔한 면상이네?’
한명호란 이름은 평생 귀 따갑게 듣고 살았는데, 이렇게 보기는 또 처음이다.
한마디로 과거와 현재, 전부 통틀어서 초면이란 소리.
‘그가 애송이었던 시절에는 내가 너무 어렸고, 내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이미 거물이 되어서 신원 일체가 극비에 부쳐졌지.’
한명호는 정보기관의 거물이었다.
그냥 거물도 아니고 훗날 손꼽히는 권력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중정과 안기부를 거쳐 국정원까지.
엘리트 코스만 골라서 고속 승진을 거듭했거든.
‘왕년에 내가 그렇게 한 번만 만나자고 거듭 청했는데도 번번이 거절했었겠다?’
절대로 안 만나주더라고.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내 편으로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는데.
그 한 번의 만남이 끝내 성사되질 않더군.
한명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답신 받았던 쪽지가 아직도 기억난다.
<신림동 개미지옥, 네놈이 아무리 투자회사의 간판을 내걸었다고 해도 결국 지하금융계의 거물이듯, 내가 아무리 음지에서 굴러먹고 있다 해도 태생까지 바뀔 리 있나. 제안은 거절하겠다.>
솔직히 한명호는 꼭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적이 되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는 자였지.’
한명호는 정보부 출신답게 뒤를 털어내는 능력이 대단했다.
어떤 것을 상상했든 그 이상을 가져온다던가.
게다가 집념과 독기, 집착까지 정말로 지독했었기에.
한명호가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면 답이 없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음모의 냄새를 잘 맡았거든.’
특히 돈과 권력을 둘러싼 음험한 꿍꿍이의 냄새!
그래서 그런가.
나와 징하게 얽힐 일도 참 더럽게 많았다.
‘한명호가 끼어들면 잘 짜놓은 판을 망쳐놓기 일쑤였지. 숨통 끊어지기 직전인 상대를 건져가는 건 예사였고.’
생각해 보면 희한한 일이다.
우린 출신도, 소속도, 목표도 정반대였지만, 신기할 정도로 하는 짓은 비슷했단 말이지.
‘왠지 우리 한 팀이 되면 제법 손발이 잘 맞을 것 같은데.’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한명호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아까 허락하셨던 월권 말입니다.”
월권? 그게 왜?
“대통령 각하께서 원하는 결과만 확실하게 챙겨준다면 나머지 사항은 묵인해주겠다는 것, 어디까지 가능하겠습니까?”
한명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털었다.
“중정부장님께서 콕 짚어서 책임자를 지정하지 않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한명호는 공을 독차지하길 바라는군.’
이 정도 규모의 공권력을 대대적으로 투입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 테니까.
윗선에서 주목하는 일이고, 따로 중정부장의 지시까지 내려온 일.
이참에 단단히 눈도장을 찍고 싶은 모양이다.
“이 사건을 한 요원님이 단독으로 만져보고 싶단 뜻이군요?”
“안 됩니까?”
“맨입으로?”
한명호는 일순 당황했던 듯 흠칫했다.
설마 일을 맡기러 온 내가 대가를 요구할 줄은 몰랐겠지.
그런데 말이야.
원래 세상은 아쉬운 놈이 굽혀야 하는 거라고.
내가 중정부장한테는 청탁해도, 당신에게 청탁할 입장은 아니거든.
“나는 한 요원님이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한 요원님은 제가 도와주지 않으면 많이 아쉽지 않겠어요?”
“그럼······.”
이만한 기회를 잡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놔야 하는 법.
설마 재벌3세가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겠냐.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
-인재.
밀매왕을 얻든, 한명호 당신을 얻든.
나는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수지타산이 맞을 것 같단 말이지?
······이쪽은 무단가출, 무단결석, 무단외박에 따른 잔소리 폭탄을 감수하고 왔거든.
“능력으로 제 가치를 증명해 보이면 되겠습니까?”
월척이요!
일단 하나 얻어걸렸다!
“어떻게 가치를 증명해 보이실 건데요?”
“밀매왕, 제가 잡아드리죠.”
“당연한 소리를 가지고 생색낼 생각하지 마시고요. 이만한 공권력을 누가 동원했다고 생각하세요?”
“오늘 현장검거 했다고 밀매왕을 제대로 잡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력과 자금줄까지 전부 털어내야 제대로 잡았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명호는 씩 웃었다.
“참고로 마약왕도 제가 잡았습니다.”
아니, 마약왕을?
이건 몰랐네?
“마약왕을 잡았는데도 왜 아직까지 부산에 있어요?”
“뒷배 없는 놈은 공을 세워도 강탈당합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알 만했다.
“공은 위에서 다 털어먹고 짬처리까지 당했군요?”
“······이걸 바로 알아들으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예. 맞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지금은 21세기와 달리 육사 출신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을 때다.
출세를 원한다면 육사를 나와서 요직을 노려야 했을 텐데.
한명호는 경찰, 검찰이 아닌 정보부에 뛰어들었다.
이건 뒷배는 물론 끗발까지 없다는 소리거든.
“그러니까 나더러 뒷배가 되어 달라?”
“밀매왕을 잡은 공까지 눈 뜨고 강탈당할 수는 없잖습니까.”
한명호는 야심만만하게 웃었다.
“도와주십시오. 도련님께서도 바라는 일이잖습니까.”
응, 그건 맞지.
여러 가지 의미로.
나는 미끼를 문 김에 냉큼 낚싯대를 잡아당기기로 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크고 싶어요?”
“······!”
한명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눈이 야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디까지 키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꼭대기까지.”
“······!”
한명호는 내가 아니어도 정보기관의 우두머리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거야 먼 훗날의 일이고.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죠. 이거 보면 몰라요?”
나는 보란 듯이 종이 마패를 흔들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중정부장님께서 말씀하셨나요? 내가 어디에서 왔다고.”
“태성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한명호의 계산은 끝났다.
태성, 중정부장, 대통령.
이보다 더 굵은 황금 동아줄은 다시 내려올 리 없을 테니까.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난 최선을 다한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든든한 뒷배를 원하는 놈들은 넘쳐나거든요.”
“실력 확인이 먼저란 뜻이로군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것 봐.
말귀가 빠르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사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한명호의 실력이라면 믿어 의심치 않거든.
그런데 열의를 가지고 보여주고자 하니, 굳이 마다할 생각이 안 든단 말이지.
“그럼 실력 구경 좀 해볼까요?”
“밀매왕이 목표입니까?”
“정확하게는 밀매왕과 밀수 루트예요. 덤으로 전차도.”
“밀매왕, 밀수 루트, 전차.”
한명호는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눈앞에서 밀매왕 일당을 어떻게 검거하는지부터 확인하는 건 어떠십니까?”
“좋아요.”
“국장님들이 도착하기 전에 상황 정리 완벽하게 끝내놓겠습니다.”
계산이 빠르다.
원래 위에서 동원령이 내려져도 웬만해서는 무거운 엉덩이를 옮기지 않는 간부급 인사들이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중정부장이 전화를 넣었으니, 어떻게 내다보기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야밤중에 현장에서 밤새 구르기는 싫고.
그런 이유로 현장에는 말단 요원들부터 먼저 보내 지저분한 상황을 정리하도록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야 명분 좋게 제가 전권을 일임하기 편하실 것 아닙니까.”
이것이 한명호의 큰 그림이었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그거야 능력껏, 알아서, 편할 대로, 좋을 대로.”
“그것부터 월권을 용인해주시는 겁니까? 시원시원한 분이시군요.”
그 정도 각오라면 이쪽도 지원할 용의가 있다.
“밀매왕이 국제시장을 꽉 잡은 지도 상당히 오래됐다면서요?”
“꽤 됐죠. 한국전쟁 때부터라고 하니까요.”
“짭짤한 시장 상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세력들도 제법 크겠죠?”
“마약왕이 잡혀가면서 이미 달콤한 콩고물 맛을 제대로 본 부산 뒷골목이 아닙니까.”
밀매왕까지 뽑혀나가면 텅 빈 국제시장을 노리고 조폭들의 구역 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마약왕 때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과감하게.
“다들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겠네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날고뛰는 놈들도 지금까지 밀매왕을 고꾸라뜨리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제법 수완 좋고, 머리 좋고, 의심 많고, 배짱도 좋은 자였다.
“밀매왕이 그간 구축해 놓은 방어선이 만만치 않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참에 싹 다 털어보죠?”
“······예?”
“밀매왕의 뒤를 봐주는 고위관료들과 정재계 인사들까지. 전부 다.”
공권력의 대재앙이라니까.
이쪽은 중정부장과 마패가 있다고요?
“까먹으셨어요? 이 정권은 부정부패 척결이란 기치를 내걸었거든요.”
“······!”
“뒤에서 하는 정경유착은 모른 척 눈감아줘도, 눈앞에 드러난 부정부패엔 가차 없이 철퇴를 내리칠 거예요.”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았기에 정부는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웠다.
한명호는 헛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내친김에 부산 바닥 세력도를 재편할 판을 짜볼까 하는데. 생각 있어요?”
“그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지방 한직 전전할 것 없이 초고속으로 서울 본부에 입성해 요직이나 꿰어차 보죠?”
“······!”
중정요원은 눈을 빛냈다.
야심만만한 눈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밀매왕부터 단단히 붙들어야겠죠?”
“맡겨 주십시오. 잡는 즉시 바로 중정 물고문실로 끌고가겠습니다.”
“그럼 죄목은요?”
우리는 동시에 씩 웃었다.
“대북 송금책 겸 무장공비 수송선 운영.”
“대북 송금책 겸 남파간첩 밀항선 운영.”
역시 이 사람, 나랑 하는 짓이 비슷하다니까?
이 시절엔 간첩이랑 얽히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중정으로 끌려가던 때였다.
“이거 잘하면 서울 본부 간첩 전문가께서 부산으로 눈썹 휘날리며 튀어오시게 생겼는데요?”
어라? 혹시······?
“무장공비 최악의 천적, 간첩 수색의 스페셜리스트, 박철구 요원이라고 들어보셨나 모르겠군요.”
아니, 여기서 철구 아저씨가 왜 나와?
“대한민국에서 간첩 하면 그분이 이겁니다. 미국으로 튄 김형원까지 한 방에 잡았다 아닙니까.”
나는 팔짱을 꼈다.
“이왕 소환하는 거 거물도 괜찮다니까요?”
“서, 설마······!”
“공직에 종사하시는 분께서 공권력의 힘을 되게 우습게 보시네요?”
“이야······!”
척하면 척!
군말이 필요 없다니까?
* * *
밀매왕과 그 일당은 물론 고등어 배까지 전부 잡아들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
밀매왕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군!”
격렬하게 대치했던 방금 전이 무색하게도.
웬 젊은 놈이 진두지휘하는 중정 요원들이 투입되자,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뭐 그런 새끼가 다 있지?”
밀매왕은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얼굴을 쓸어내리자 손바닥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제야 얼굴에 또 다른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부림의 결과였다.
“대체 몇 명이나 뒈졌는지 감도 안 오는군.”
그러고 보니 그 새끼가 마약왕을 잡았다던가?
역시 총질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설마하니 총을 꺼내들 줄이야.”
밀매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깔이 제대로 돌았더라니. 제대로 미친놈에게 단단히 잘못 걸렸나.”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어르신.”
부산검찰청에서 나온 검사였다.
덕분에 밀매왕은 상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검사는 쩔쩔매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퍽 난감하게 되었으니, 잠시만 양해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칼빵이 웬 말이야? 양 프로, 자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밀매왕은 차갑게 노려보았다.
수갑부터 지금 이 상황까지 전부 마뜩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위에서 까라는데, 별수 있습니까. 어떻게든 무마해 보겠습니다.”
“일단 당장 장 변호사부터 불러야겠는데.”
“예, 예. 그래야죠. 대검찰청에 계셨던 장 변호사님 말씀이시죠?”
“부산시장한테도 전화를, 아니다, 여긴 직접 찾아가 사정을 전했으면 하는데.”
“시장님께, 제가 직접이요?”
“그 밑으로 3급까지 싹 다 전화 돌려야 할 거야. 부산 바닥에서 내 돈 안 먹고 다닌 공무원이 있던가?”
밀매왕은 화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무섭도록 얼굴을 씰룩거렸다.
그럴 때마다 길게 패인 칼자국 흉터는 살벌하게 움직였다.
“부산지부의 야당 사무실에도, 여당 사무실에도 전부 전화 돌려야겠지?”
“어, 어르신······!”
“내 돈 안 먹고 국회의원 배지 달고 있는 놈들은 빼도 돼. 그런 놈이 있을까는 또 모르겠다만.”
밀매왕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총력전으로 몰아쳐야지. 별수 있나?”
< 공권력의 힘 (3)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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