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못 짚으셨어요 >
뇌물 장부를 확인하고 당혹해하던 것도 잠시, 밀매왕은 피식 웃었다.
“내가 괜히 별생각을 다 했나 보군. 너무 뻔한데?”
타협의 여지를 발견하자, 밀매왕의 안색은 눈에 보일 만큼 환해졌다.
“중정에서 왜 우리를 잡아들였나 했더니, 역시 대선과 총선 때문이었군?”
밀매왕의 목소리도 느긋하게 풀렸다.
“이런 거라면 실력 행사 안 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여당과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될까?”
“잘못 짚으셨어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쪽은 내 알 바 아니거든요.”
“정치 공작과 정적 제거를 위해서가 아니라고? 그럼 왜 이만한 공권력을 동원해서 뇌물 장부를 가져갔지?”
“난 전차 사러 왔을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요?”
“······.”
내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았다.
“참고로 아직도 내가 했던 제안은 유효해요.”
“제안? 재주껏, 능력껏, 눈치껏 탱크 가격을 깎아보겠다는 것 말인가?”
“받고 영입 제안 추가.”
나는 씩 웃었다.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어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물론이죠. 업계 최고 대우를 약속할게요. 공권력과 칼부림에 쫓길 일 없이 편안하게 즐기는 안락한 노후 생활! 어때요?”
“······협박하는 거냐?”
“영입 제안인데요.”
밀매왕의 표정이 요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왕 뽑은 칼, 나는 화끈하게 썰기로 했다.
“참고로 협박은 대통령 들먹이면서 할 거예요.”
같은 말을 꺼냈을 때, 밀매왕은 지난번엔 코웃음 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서라. 그딴 건 나 같은 사람한텐 무섭지도 않아.
-여차하면 외국으로 잠깐 튀면 그만이거든. 나 원양어업도 하는 사람이야.
-전차를 못 구하면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꼬맹이 너지. 당장 두 달 뒤를 준비하려면 시간 빠듯할 텐데?
이번에도 똑같은 말을 꺼냈건만, 오늘은 쉬이 대답하지 못한다.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밀매왕이 간신히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이거였다.
“정말로 대통령을 움직인 거냐?”
저번과 달리 의심 대신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어쩌면요?”
“······그건 무슨 뜻이지?”
“아직은 아니지만, 상황을 보고받으면 청와대에서 움직일 거라는 뜻?”
“······!”
밀매왕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건 한명호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에서 이 일에 개입할 예정이었습니까?”
한명호는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도련님,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닙니까? 청와대라면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대선이 코앞입니다. 이때만큼은 대통령도 부산 민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분명 속삭이듯 나눈 대화였는데.
밀매왕은 눈치껏 알아듣고 버럭 외쳤다.
“살려주십시오!”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차라리 정치 공작이라면 살길이라도 있지. 이건··· 이건 정말······.”
감당불가.
유종태의 예측처럼 밀매왕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통령께선 국산 전차 성능 시험에 사활을 걸고 있고, 그쪽은 명을 받아 전차를 사러 왔다고 했었죠? 좋습니다! 팔겠습니다!”
의심 많고, 머리 좋고, 배짱 좋고, 수완과 능력까지 좋은 밀매왕이었지만.
공권력의 대재앙, 그것도 청와대의 힘 앞에서는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대당 천만 원!”
대당 1억짜리 물건이 단번에 10분의 1 가격으로 떨어졌다.
밀매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뇌물 장부? 간부 놈들 입을 털어서 받아적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제가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아직 옆구리에 끼고 있는 뇌물 장부를 펼쳐보지 않았건만.
대통령의 이름으로 협박의 ‘협’ 자조차 꺼내지 않았건만.
밀매왕은 자발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마약 빼고 무엇이든 어떻게든 구해오겠습니다!”
결론.
“그러니 살길을 터 주십시오.”
한명호가 묘한 눈으로 밀매왕을 내려다보았다.
떠보듯이 툭 던진 말.
“맨입으로?”
“우리 애들 목숨만 살려준다고 약속한다면······ 대가는 확실하게 치르겠습니다.”
“밀매왕,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전차를 숨겨놓은 제주도 창고! 주소를 알려주면 되겠습니까?”
대당 1억짜리 전차를 공짜로 내어주겠다는 소리였다.
목숨값으로.
“이걸 어쩌나. 제주도 창고라면 어제 털었는데.”
“그, 그럴 리가!”
툭.
한명호는 서류 가방을 열어서 검은 서류철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제목은 <제주도 창고 압수 물품 목록>.
“탱크 12대. 보고받고 오는 길이다.”
“으음! 그, 그렇다면 남포동, 감만동, 우암동, 용담동······!”
“총기 8만 정? 그건 사흘 전에 털었고.”
“······!”
한명호는 이번에도 서류 가방을 열어서 검은 서류철을 툭 내던졌다.
제목은 <창고 압수 물품 목록>.
“협상 지루하게 끌지 말자고. 아, 차라리 이쪽이 더 빠르려나?”
한명호는 서류 가방에서 검은 서류철을 차례대로 꺼내 툭툭툭툭 내던졌다.
“대청동, 보수동, 초량동, 수정동, 대교동, 신선동, 남항동, 용호동, 반송동 등 부산에만 8개 지구 총 17군데 창고의 압수 수색은 어제부로 완료.”
“······!”
“부산, 울산, 거제, 포항, 창원 등 19개 항구에 거점을 뒀던 수산 창고 조사는 현재 진행 중.”
“······!”
“이제 동해, 남해, 서해안을 따라 인천까지 동선 및 창고 수색은 예정.”
한명호는 툭툭툭 내던졌던 검은 서류철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웃었다.
“진술서에 따라 하나씩 뒤져가며 확인하는 것만 남았다. 협상거리가 더 남았나?”
밀매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다면 차명 계좌와 은닉 재산은······!”
“장순일 변호사, 김영득 회계사, 최영욱 세무사, 이선평 중계사, 고동철 재무이사, 신형국 총무이사, 백건영 상무이사, 정호균 사외이사.”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한명호의 서류 가방에서는 목록별로 정리해둔 검은 서류철이 계속해서 나왔다.
이번 시리즈는 <은닉 재산 목록 및 관리 장부>였다.
고작 열흘 만에 저런 걸 만들어서 가져왔다.
“국제시장과 자갈치 시장의 뒷골목 상인들까지 탈탈 털어내면 빈 구멍까지 전부 채워질 것 같은데.”
“항복.”
마침내 밀매왕은 두 손을 들었다.
“뭐가 됐든 윗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밀매왕은 협상 테이블에 이마를 쿵 박았다.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죽이라면 죽일 것이고, 구해오라면 구할 것이고, 엎으라면 엎을 것이니!”
쿵!
“더러운 일, 힘든 일, 쪽팔린 일, 위험한 일, 짜증 나는 일, 골치 아픈 일까지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쿵! 쿵! 쿵!
“창고를 털어가든, 재산을 털어가든, 배를 털어가든 상관없습니다. 전부 내어드리겠습니다!”
쿵!
“그러니 우리 식구들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탁.
나는 밀매왕의 이마와 테이블 사이에 손을 끼워넣었다.
그제야 밀매왕의 머리박기가 끝났다.
“내가 언제 밀수 조직 박멸하러 왔다고 했어요?”
난 경찰도, 검찰도, 중정도 아니거든요?
심지어 금감원이나 국세청에서 나온 것도 아닌데, 밀수 잡아서 뭐 한다고.
“누누이 말하지만 난 전차 사러 왔다니까요.”
겸사겸사 인재를 영입할 수 있으면 더 좋고.
“도련님, 더 털어 봤자 이젠 푼돈밖에 안 나올 겁니다.”
한명호가 슬쩍 중재에 나섰다.
은근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 새끼들 전부 감옥으로 처넣으면 뒤탈 걱정할 것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겠습니까?”
밀매왕을 막다른 벼랑 끝으로 몰아간 공에 대한 포상을 기대하는 눈이었다.
밀매왕은 이때다 하고 덧붙였다.
“감옥에 가야 한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대신 남은 식구들 입에 풀칠할 정도는 봐주십시오!”
잘못 짚었다니까 그러네.
나는 밀매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차 대당 천만 원, 콜.”
“······?”
“통관비, 보험비, 판공비, 부가가치세까지는 못 얹어줘도 물건값과 운송비, 수고비, 위험수당은 챙겨드릴게요.”
“······??”
“물론 전쟁터에서 굴러다니던 중고 탱크니까 신형 탱크의 반의반의 반값. 그래서 대당 천만 원! 불만 있어요?”
“어, 없습니다!”
밀매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내가 재주껏, 능력껏, 눈치껏 가격을 후려쳐 깎아보겠다고 했지, 언제 날도둑놈처럼 맨입으로 꿀꺽 먹겠다고 했어요?”
“그, 그럼 감옥살이는······.”
“내가 언제 감옥 보낸다고 협박한 적은 있고요?”
“이만한 공권력이 동원됐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그쪽이 감옥 가면 부산 경남의 고아원, 양로원, 야학당, 참전용사 후원은 누가 하죠?”
국제시장과 부산항을 꽉 잡고 있는 밀매왕이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였다.
밑바닥 생활을 하는 뒷골목 놈들 중에 밀매왕의 도움을 받은 놈이 꽤 많았다.
-정혁아, 난 그분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시장 뒷골목에서 굴러다녔지 싶다.
태성대학병원장을 지냈던 내 하나뿐인 불알친구.
밀매왕의 후원 덕을 봤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유치장에 잡혀갔던 사람들은 간단하게 조사받고 전부 안전 귀가 끝난 지 오래예요.”
“······!”
뒤로는 밀수조직을 운영한다지만.
엄연히 고등어와 갈치, 새우와 참치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들이기도 했다.
농림축산어업은 나라에서도 보호하는, 이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1차 산업이라구?
“대신 죄질 더러운 놈은 못 봐드려요.”
나는 동전 지갑을 열었다.
한명호에게 넘겨받았던 검은 서류철을 검토하면서 따로 작성해뒀던 명부였다.
나는 제목 큼직하게 ‘살생부’라고 써놓은 종이를 들이밀었다.
내가 아무리 뒷골목에서 굴러다녔지만, 약쟁이들이랑은 상종 안 하는 스타일이라서.
“마약 판 돈으로 청소부와 용병을 고용하려고 했던 모양이던데요.”
밀매왕을 죽여 짭짤한 국제시장과 밀매 루트를 장악하기 위해서.
“마약 때문에 형제들에게 칼을 겨누려 했던 놈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나는 빨간 줄을 쳐놓은 살생부 이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마약 밀매 루트 뚫는 김에 여자들을 납치해서 팔아치운 건 좀 그렇잖아요.”
여자들이 돈 벌겠다고 일본 밀항 브로커를 찾아간 건 내가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돈이 된다고 연고 없는 여자들을 납치해서 야쿠자에 팔아치운 것까진 눈감아줄 수 없겠더라고.
“이 새끼들이 빼돌린 마약이랑 마약 공장은 내가 불태워버렸으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사채는 당장 급한 불이라도 끄고, 조폭은 상인 보호라도 하고, 해결사는 가정 내 분란이라도 해결하고, 청소부는 인간쓰레기를 처리하기라도 하지.
마약은 좋은 것 하나 없이 사회에 해악을 끼칠 뿐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탁.
나는 동전 지갑에서 곱게 접은 계약서를 꺼냈다.
배달 날짜와 배달 장소, 구매 금액을 명기한 전차 구매 계약서였다.
“읽어 보고 서명날인하세요.”
밀매왕은 구매 계약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나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덕분에 깜빡할 뻔했던 일을 상기할 수 있었다.
“참, 창고 털 때 발견한 총기와 폭탄류는 청와대에 바치겠어요.”
대한민국 총기 규제국이다.
또한 폭탄류도 제조 및 소지, 유통만으로도 처벌 대상이다.
“그건 목숨값이라 생각하고 나라에 헌납하세요.”
총기 약 8만 정.
내가 구매할 전차 3대를 제외한 탱크 9대.
폭탄류 약 10톤 분량.
“잠수함도 다섯 대 있던데. 그것도 청와대에 바칠까 해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대신 이건 눈도장 찍는 가격을 톡톡히 받아줄게요.”
“눈도장?”
“대통령님이라면 왠지 몹시 좋아하실 것 같거든요.”
“······!”
한명호와 밀매왕이 동시에 기함했다.
“대통령 각하께서······?”
“잠수함을······?”
“잘못 짚었어요.”
대통령, 그 양반이 잠수함 몇 정에 넘어갈 위인이야?
어림도 없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럴수록 한명호와 밀매왕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물음표 숫자가 많아지는 것 같았다.
“청와대에서 이 난리를 보고받고 열받으면 피차 곤란해지긴 마찬가지잖아요?”
“······!”
“그러니 이왕이면 문책 대신에 포상이나 화끈하게 받아볼까 하는데요.”
“······포상?”
밀매왕이 넋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라에서 금지하는 밀수에, 부산지역 고위 관료들부터 위아래로 골고루 뇌물을 살포했는데······.”
그 뒷말은 한명호가 멍한 표정으로 대신 받았다.
“거기에 불법 총기 및 화약류 밀반입까지. 이러고도 처벌 대신 포상을 받아내는 게 가능하긴 합니까?”
“안 될 것도 없잖아요?”
나는 동전 지갑을 열어서 곱게 접었던 종이를 꺼냈다.
“그런 의미로 계약서 쓰실 분?”
물론 내가 준비한 고용 계약서는 2인분, 각각 따로 준비했다.
대신 이번엔 협박도 함께였다.
“싫으면 대통령의 불호령을 맨몸으로 받아보시든가.”
이게 바로 대통령을 들먹이는 협박!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 눈에 이만한 화력이 곱게 보일 것 같아요?”
“······!”
“반역으로 몰려 죽기 딱 좋겠죠?”
“······!”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니까.
* *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대통령은 보고서를 집무실 책상 위에 내던졌다.
“뭐? 총기 8만 정에 탱크 9대, 폭탄류 10톤?”
대통령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반역인가?”
“반역이라면 제가 한가하게 이런 보고나 드리고 있겠습니까?”
중정부장이었다.
태성의 전차 개발 계획에 관해 그 공을 나누기로 이미 말 끝낸 후였다.
“반역이 아니라면 뭐야?”
< 잘못 짚으셨어요 > 끝
ⓒ 오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