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챕터2. 준비하다 (1)
조선 28년. 세종 1년.
컹컹! 엽견獵犬의 울음소리가 숲을 뒤흔들고.
크허헝! 맹견의 울음소리를 옆집 개소리로 만들어 버리는 날카로운 포효가 천지를 뒤흔든다.
두두두. 허나 온갖 무기로 치장한 인마일체는 포효에도 두려움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몸을 때리는 나뭇가지들을 사정없이 부러뜨리고, 풀잎과 부엽토를 짓이기며 소리의 진원지로 달려 나간다.
동글동글하게 박힌 큼지막한 발자국이 눈에 들어오고, 그 옆으로 앙증맞은 개발자국이 이어진다. 흔들리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건, 그런 발자국 사이로 무수히 흩어져 있는 붉은 물방울들.
‘드디어 지쳤군!’
물방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커서 사실 물웅덩이가 아닐까? 싶은 핏줄기가 발자국을 따라 이어진다.
크르릉! 컹컹컹! 가까이 다가갈수록 짐승들의 포효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나무숲 사이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드디어 확 펴진다.
말을 탄 이의 눈에 살의에 몸부림치는 짐승이 눈에 들어왔다.
산을 타 넘고 추적한 지 벌써 얼마인가. 달아나는 호랑이보다 뒤쫓아 간 이가 더 지칠 지경이다.
푸르릉! “후흡. 후훕!”
끝이 다왔다는 생각에 기마는 물론이거니와, 그 위에 올라탄 이 또한 숨을 가다듬었다.
피를 다 쏟아냈을 법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저 거대한 호랑이는 사냥개들과 아직도 대치하고 있다.
등에는 몇 발의 화살이 꽂혀 이리저리 춤을 추고, 옆구리에 박혀 부러진 창대는 땅에 그림을 그린다. 그럼에도 과연 덩치가 덩치인 듯, 아직도 팔팔하게 날뛰고 있다.
크허헝! 분노에 차올라 시퍼렇게 불타는 눈동자.
피 칠한 호랑이는 입가에 가득한 침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오는 인마人馬를 노려봤다.
“뭘 봐. 떼껄룩 색갸!”
호랑이의 귓가에 알아들을 수 없는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녀석은 웅크렸던 뒷다리를 펼치며 앞으로 돌진했다.
컹컹 거리며 귀찮게 하는 사냥개를 향해 앞발을 휘두르자, 녀석들은 깨갱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자리를 비켰다.
크허헝! 귓가를 찢어발기는 포효를 다시금 내지르지만, 전마를 탄 인간은 귀가 막히기라도 한 걸까?
지금껏 호랑이 자신을 목도한 모든 짐승들이 똥오줌을 지리며 물러섰건만, 저 인간은 오히려 반대다.
시퍼렇게 타오르는 호랑이의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눈동자 또한 희열을 느끼는 듯 반달을 그리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히려 그 모습에 포효를 내지른 호랑이가 잠깐 당황할 정도. 허나 여기서 멈춰 섰다가는 남은 건 죽음 뿐.
호랑이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살 길은 오로지 하나.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저 인간을 뚫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쫓아오리라.
호랑이는 다시금 발톱으로 땅을 할퀴고 몸을 날렸고, 마주 오는 이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놀렸다.
이미 재고 있던 시위를 튕기며 화살을 쏘아낸다.
휙휙! 허나 호랑이는 정면에서 날아오는 화살 따위는 겁내지 않았다.
단단한 두개골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풍성한 털로 위장한 덩치를 믿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날아온 두 대의 화살은 흔들리는 호랑이의 머리털만 스치고 지나갔지만, 곧장 뒤이어 날아온 화살은 입가에 틀어박혔다.
크허헝! 비명소리인지 포효소리인지 모를 울부짖음이 들려오기 무섭게 빛살처럼 날아온 투창.
푸핫! 두툼한 가죽으로 뒤덮여 있던 이마가 찢어져 핏줄기가 흩날렸지만, 호랑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앞발을 크게 벌렸다.
흡사 자신의 몸으로 전마를 덮어버리려는 형상.
일촉즉발의 순간이건만, 전마에 올라탄 이의 눈 또한 호랑이처럼 불타고 있었다. 놀라서 감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크게 뜨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호랑이의 모습을 응시한다.
‘왼쪽. 이 정도?’
갈고리마냥 벌려 있는 호랑이의 발톱이 눈에 들어오고, 흡사 착시라도 일으킨 것 마냥 궤적이 읽힌다.
북을 치는 것 마냥 두근거리는 심장의 파동은 이내 곧 온 몸으로 뻗어나가고.
심장에서 품어져 나온 혈액은 정수리까지 치솟아 온 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들고.
비틀어지는 허리 근육은 거대한 종처럼 메아리를 울리며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극한의 긴장감과 극도의 희열감이 정수리에서부터 어깨를 거쳐 손아귀에 다다른 순간.
번쩍! 대체 어느새 뽑아든 걸까? 안장에 비껴 끼어놨던 장도가 하늘을 가르며 치솟았다.
퍽! 호랑이의 공격을 그저 허리를 비틀어 흘러냄과 동시에,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쳐올려 목덜미를 베어낸 것이다.
하늘을 피범벅으로 수를 놓은 호랑이는 인마를 지나치기 무섭게 땅에 처박혀 움직임을 멈췄다.
호랑이와 인간의 대치상황은 그야말로 일순간. 목숨을 건 하루 반나절의 사투는 결국 인간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믿을 수나 있을까? 세상천지에 어느 누가 칼질로 대호를 때려잡을 수 있을까. 보고도 믿지 않을 거다.
“음...”
허나 별로 기쁘지 않은 걸까?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새로 생긴 입 마냥, 목이 쩍 걸라진 호랑이를 툭툭 건드리며 상처를 살펴본다.
“흠. 힘이 조금 모자랐나?”
이미 피를 왕창 흘렸겠다, 마무리로 목울대가 반으로 잘렸으니 즉사한 건 당연한 일.
허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칼 끝에 목뼈가 닿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 아직 힘이 부족해서 목 근육을 전부 베어내지 못 한 거다.
‘씁... 아직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으니까. 뭐.’
속으로 생각하며 아쉬움을 털어낸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뒷다리를 들어 묶고선, 밧줄로 말안장과 연결.
“이랴.”
피의 강을 만들며 질질 끌고 갔다.
오면서 아까 미리 봐뒀던 실개천에 도착. 살짝 비틀진 자리를 찾아낸 후에, 풍덩 사정없이 호랑이의 머리를 거꾸로 개울에 처박았다. 귀찮으니 그냥 물에 담가서 피를 쫙 빼려는 속셈이다.
“끄응...”
심드렁하게 손을 씻어내고선,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바윗돌에 엉덩이를 붙였다.
지친 사냥개들은 호랑이 사체를 아랑곳 하지 않고 물을 마셨고, 다 마시기를 무섭게 몰려와 꼬리를 흔든다. 흡사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 잘했다.”
피식 웃으며 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다른 녀석들 모두 달려와 폴짝폴짝 몸을 날렸다.
허나 벌써 정신은 다른 곳으로 달아난 걸까? 기계적으로 사냥개들을 쓰다듬어 주면서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벌써 17년인가?’
그는 멍하니 하늘을 보며, 블랙탄을 닮은 사냥개의 볼따구니를 마구 흔들었다.
******
주원장의 군세에 원의 수도였던 대도가 함락된 후, 명의 군대는 순식간에 북방으로 뻗어나갔다.
고려는 명과 원이 대치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요동을 공략하니, 훗날 이를 일컬어 1차 요동정벌이라 불렀다.
하지만 고려군은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정벌의 핑계이자 명분이 된 기사인테무르는 놓치고 말았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요동성을 점령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군량고에 불이 붙어 군량을 다 잃어버리고 만다.
고려군은 어쩔 수 없이 요동에서 퇴각하여 압록강 너머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설상가상.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퇴각로를 잘못 택해 요동반도 해안가를 빙 돌아가는 헛수고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수많은 병사가 죽음을 당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지만, 고려와 조선은 다시는 압록강을 넘지 못했다.
이게 원래 역사인데... 역사책엔 한 줄도 적혀있지 않은 야사가 하나 있다.
고려군이 요동반도 해안가를 따라서 후퇴할 때. 그들을 도와준 이가 있었다.
바로 금주 천호 연케리크바트.
고려유민 출신인 그는 원나라를 버리고 고려에 투신했고, 고려왕은 대공을 세웠다고 치켜세우며 무려 공신으로 삼아 우대했다.
그가 지원한 군량이 아니었으면 굶어 죽은 병사들이 더 생겼을 테니까.
그렇게 연케리크바트. 아니 연군강으로 개명한 이는 저 먼 지리산 촌구석을 식읍으로 받고 고려인으로써 새출발했다.
그 후로는 뭐... 역사를 따라 흘러간다.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침공, 온갖 반란 등으로 몸살을 앓았고, 연군강과 함께 온 사병들 또한 하나둘씩 칼끝에 쓰러져갔다.
시간이 흘러 위화도회군이 벌어질 때. 연씨 가문은 이성계 편을 들어 개경에서 싸웠다.
하여 개국공신이 되었건만 기쁘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사병과 자식들이 다시금 쓰러졌으니까.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편에 서서 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지만, 또 혈족과 사병들이 쓰러졌다.
끝으로 왕권이 나날이 강화되어 사병이 철폐되자, 연씨 가문의 몰락 아닌 몰락이 시작됐다.
대를 이어 충성해 온 사병들 아닌가. 그런 그들을 노비삼아 휘두를 수 없는 법. 연씨 가문은 그렇게 염치없지 않았다.
하나둘씩 땅을 떼어주고 재산을 나눠주니, 남은 거라고는 경작하기도 힘든 산과 몇 마지기 되지도 않는 논밭뿐이었다.
또 다시 시간은 유유히 흘러 세종이 즉위했을 때. 연씨 가문의 후손은 단 한명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라고 하면, 야사 치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말 하겠지? 흔하디흔한 몰락 양반 가문의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게 자기 가문의 역사라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또 공신 가문이 어떻게 저렇게 쫄딱 망할 수 있는지 의심되겠지?
의심을 풀어주마.
*****
신은 존재하는가?
그 물음에 그는 단호히 답할 수 있다.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그 개자식이 뭘 원하는지, 왜 그러는지는 절대 알 수 없으리라. 그에게 펼쳐진 일은 신의 손이 닿지 않고서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찌된 영문인지 모른다. 게임을 시작했는데,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왔다. 아닌가? 과거로 되돌아갔나? 그도 아니면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왔나?
과거로 왔다면 타임패러독스에 빠질 것인데... 만약 새로운 세상으로 왔다면?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평행세계!? 여기는 지구-2?
답을 찾을 수 없으니 이 또한 개소리다. 하지만 뭐가 됐건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해 살고 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인데, 답도 안 나오는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
물론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 건 두말하면 잔소리지.
아무튼! 신은 그를 이 세상에 던지며 큼지막한 선물을 같이 보냈다.
21세기 그가 재미삼아 집어넣었던 재해옵션. 그중 운석충돌.
새로운 세상에 태어난 걸 축하라도 하듯, 실제로 운석이 떨어져 남경을 날려버렸다.
재수도 없지... 이 넓은 동아시아 땅 중에서, 하필 남경에 떨어질 줄이야.
나중에 말귀를 알아듣고 말문이 트였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