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챕터2. 준비하다 (2)
어찌됐건... 새로운 세상에 떨어졌는데 멀쩡할 리가 있나. 그나마 말 못하는 아기 때라서, 누구도 눈치 못 채서 다행일 따름이다.
한국에 있을 부모님, 친구들, 형제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
21세기에 누렸던 풍족한 문명생활들. 이 거지같은 조선시대와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그 상실감을 누가 이해해 줄까?
허나 시간이 약이라고. 새로운 가족이 있어 구멍 난 가슴이 채워졌다.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다.
움직이면 땀을 흘리고, 다치면 피가 흐른다.
밥을 굶으면 배가 고파지고, 아프면 고통이 밀려온다.
이게 단순히 게임이 아니라는 건 얼마 지나지도 않아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먼 미래와 게임과 현실의 사이를 떠도는 방랑은 끝이 났다.
그리고... 몸이 점점 커갈수록 현실을 자각할수록, 희열이 밀려왔다.
그는 21세기의 이단아였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미친놈이 칼질이 좋다고 인생을 갈아 넣어? 아무리 돈 걱정 없는 금수저의 취미라고 해도, 취미는 인생이 될 순 없다.
허나 그는 그렇게 살았다.
언젠지도 모를 어릴 적에 죽도를 쥐었을 때부터, 어쩌면 조막손으로 조심스럽게 검을 쥐었을 때부터.
그는 칼잡이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직감했다.
이게 너무 좋으니까.
하여 미친 생각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세계에 온 것을 반겼다.
그는 투사다.
그는 칼잡이다.
그는 칼덕후다.
칼 들고 다니면 미친놈 취급받는 21세기에서, 칼을 잘 쓰면 모두에게 칭송받는 15세기 조선으로 왔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만의 희열이었다.
그렇게 인생 2회차를 칼과 함께 다시 시작했다.
헌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깨달았다. 그는 단순히 새로운 세상에 떨어진 게 아니다.
연씨 가문은 그저 게임 속 텍스트 쪼가리를 바탕 삼아, 현실에 남아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새로운 이름은 연오랑.
그가 플레이하려 했던 모드mod의 주인공.
그렇다. 전설장수. 비교불가 최강의 캐릭터. 조선의 소드마스터다.
게임 미디블워에서 장수와 군주는 각기 다른 고유특성을 가진다.
고유특성이란, 스탯과 별개로 전투 시 능력를 상승시켜 주거나, 내정에 보너스를 주는 능력.
전설장수는 스탯 전반이 상향되고, 고유특성도 여러 개 가질 수 있단 말씀.
그리하여 21세기 그가 연오랑에게 박아 넣은 고유특성은 무려 5개.
무한한 활력. 노련한 훈련관. 무예의 달인. 파고드는 일격. 굳건한 신념.
하나같이 흉악한 능력으로, 오로지 혼자서 무쌍을 찍기 위해서 넣은 특성이다.
사기라고 욕하지 마라. 이 모드는 21세기 그가 처음 만든 작품. 경험삼아서 이것저것 다 집어넣어 만든 실험작이다.
어떤 능력과 어떤 설정이 충돌하는 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넣는 게 당연한 일이지.
첫째로 무한한 활력.
게임에선 전투 시에 부대를 움직이면 활력이 줄어든다. 활력이 줄어들면 이속과 공속 등이 떨어진다. 무한한 활력은 이 디버프를 삭제한다.
즉. 지치지 않게 되는 것. 하지만 현실이 게임도 아니고, 사람이 지치지 않는 게 말이나 되나.
중요한 건 따로 있다. 21세기의 그가 자기 딴에는 모드mod의 디테일을 살린답시고, 이런저런 배경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나.
무한한 활력 밑에도 짤막하게 설명을 붙였다.
-연씨 가문은 오래전 고려에 투신한 요나라 왕족의 피와 원나라 시절 유럽에서 온 색목인의 피. 끝으로 몽골 왕족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우수한 유전자를 이어받은 연씨 일족은 대대로 체구가 좋고 힘이 좋기로 소문났습니다.
이게 뭔 개소리인가 할 거다. 맞다. 개소리다. 왕족이라고 뭐 유전자가 다르겠는가?
그냥 설정에 디테일 좀 살리겠다고, 억지로 이것저것 덧붙였더니 이 꼴이다.
이 배경설정이 현실이 되어, 연씨 일족은 그야말로 거한이었다. 당장 그 자신도 그렇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크니까.
그 뿐일까? 뼈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근육은 고래심줄처럼 탱탱하고, 유연하기는 뼈 없는 문어처럼 유연했다.
두 번째. 노련한 훈련관.
게임 상 효과는 부대경험치200%추가획득. 지배력 강화 및 공포유발.
게임에서는 전투를 하면 할수록 베테랑이 되어 스탯이 조금씩 상승한다. 이 능력은 그 경험치 획득량을 세 배로 늘려주는 것.
지배력 강화와 공포유발은 전투시 아군의 사기를 지속적으로 회복시키고, 적의 사기는 지속적으로 깎는 특성이다.
이번에도 덧붙인 설정이 중요하다.
-연씨 가문은 투쟁을 통해 성장해 왔습니다. 그들은 몽골군,여진족,명군,왜구,해적들과 싸워왔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전투전문가가 되었고, 이 경험을 토대로 체계적인 훈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연씨는 탁월한 지도력과 강력한 지배력으로 언제나 아군을 단결 시켰고, 적들은 연씨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려 분열되었습니다.
이게 뭔 말이냐고? 간단히 말해 연씨 가문에 속해 있는 가솔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뜻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이가 없으니 무소용이다.
아. 아직도 마을에 남아 있는 아저씨들이 싸움을 잘하긴 하더라. 그리고 확실히 확인한 건 아니지만... 향교의 애들을 가르치다보니, 게임 상의 효과가 발동되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애들이 알아서 자습할 때와 그가 직접 가르칠 때랑 습득속도가 다른 느낌이 랄까?
정량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확신을 못하겠는데, 느낌은 그랬다. 뭔가 촉이 왔다.
지배력 강화 및 공포유발 효과? 이건 영 모르겠다.
잘 싸우면 사기가 유지되는 건 당연하지 않나? 반대로 최정예병하고 싸우면 당연히 무서운 거 아닌가? 사기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고 말이다.
세 번째. 무예의 달인.
게임 상 효과는 공격력200%증가. 공격정확도200%증가. 공격속도200%증가. 공격회피확률100%상승. 원거리방어100%상승.
이거야말로 무쌍의 제1조건.
21세기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은 모드제작자들이 전설장수를 만들 때에 필수적으로 넣는 능력이다.
당연히 설정도 덧붙인다.
-무예의 달인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갖지 못하는 비상한 재주를 타고 났습니다.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지형을 불문하고 완벽한 적응력을 보여줍니다. 오감을 넘어서 예지에 가까운 육감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공격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을 오감각. 흔히들 오감이라 부른다. 여기에 직감 혹은 예감 등을 더해서 육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무예의 달인은 이 육감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칼잡이가 강인한 육체에 월등한 육감을 갈고 닦다보니... 실제로 호랑이를 칼질로 때려잡을 수 있더라.
네 번째. 파고드는 일격.
효과는 적 방어력40%감소.
말 그대로 장갑을 쪼개고 공격하는 능력인데... 같은 품질의 쇠라 가정할 때, 사람 힘으로 쇠를 쇠로 자르는 게 말이나 되는가.
칼을 휘둘러서 갑옷을 통째로 자르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걸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하려고, 또 억지설정을 덧붙였다.
-과거. 적으로 둘러싸인 연씨 가문은 수많은 투쟁을 거듭하면서,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무기와 방어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장인을 우대했고, 광산을 찾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제련기술을 발달 시켜왔습니다.
그는 양반 출신 칼잡이 주제에 천한 대장장이 일도 할 줄 안다. 그것도 그냥 대장장이가 아니라 도검장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해? 그 하나 남았는데.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 또한 병을 앓다 돌아가셨다.
하도 싸움터에 붙들려 다녀서, 남은 일가친척이 한 명도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설정에 친척도 넣는 건데... 아까울 따름이다.
다섯 번째. 굳건한 신념.
효과는 사기무한과 질병면역.
즉. 전멸하기 전까지는 패퇴하지 않는 거다. 게임에는 사기士氣라는 수치가 존재했다.
주변의 아군이 후퇴 또는 전멸하거나, 후면이나 측면에서 공격받거나, 완전히 포위되거나, 자신의 부대원 수가 줄어들거나, 더 상위티어의 부대와 마주치면 사기가 떨어진다.
사기가 많이 떨어지면? 유저가 더 이상 그 부대를 조종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떠돌게 된다.
만약 계속 사기가 유지가 안 되면, 전장 밖으로 퇴각한다. 유저가 조종할 부대 하나가 없어지는 거지.
무쌍의 제2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뽕을 추구하는 모드제작자들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능력이다.
당연히 21세기의 그도 집어넣었다.
이게 있어야 수십 개의 적 부대 한가운데에 던져 놔도, 후퇴하지 않고 무쌍을 찍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에서 이게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음... 솔직히 조금 영향이 있나? 심령을 쥐고 억죄는 호랑이의 포효를, 귀 후비며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노련한 훈련관”에 달려 있는 지배력강화와 공포유발은 바로 이 사기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면서 적의 사기는 깎는 특성이다.
허나 더 중요한 건 질병면역이다.
게임 상에서 질병은 그저 재해옵션 중 하나일 뿐이다. 질병에 걸리면 장수가 이끄는 부대가 모든 능력치가 떨어지는 더버프를 받는다.
하지만 이걸 신경 쓰는 유저는 아무도 없다. 걸려도 어차피 장수는 죽지 않을뿐더러, 능력치가 아무리 떨어져도 도시에 주둔하면서 몇 턴 기다리면 다시 차니까.
그저 사기무한에 곁다리로 붙어 있는 능력에 불과했는데... 이게 현실이 되니 오히려 주가 됐다.
질병면역이라니!? 제대로 된 의약체계조차 없는 거지같은 15세기조선 아닌가.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이 됐다.
사실 이게 진짜로 적용되는 지도 몰랐다. 돌림병으로 인해 마을 주민과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쓰벌...’
그저 게임 좀 재밌게 해보겠다고, 자기 딴에는 짜임새 좀 있게 만들어보겠다고 이것저것 가져다 붙였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그저 헛웃음만 흘러나온다.
시부래. RPG게임이면 억지로 끼워 맞추기라도 하지, 이건 전략게임이라고. 인벤토리나 상태창, 스탯 분배, 레벨업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아?
인생 참 뭣 같다.
호랑이를 처리하는 건 금방 끝이 났다.
맹렬한 투사이자 능숙한 사냥꾼이자 훌륭한 도축자인 그는 순식간에 호랑이 가죽을 발라당 벗겨 속살을 들춰냈다.
뼈를 발라내지 않은 살코기와 힘줄은 따로 모았다.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내장은 이미 사냥개가 게눈 감추듯이 싹 집어 먹었다. 칼로 쓱쓱 잘라낸 내장을 던질 때마다, 녀석들은 곡예를 부리듯 껑충껑충 뛰며 받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