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화 (5/538)

5. 챕터2. 준비하다 (3)

온 사방이 피범벅이고, 짐승은 적나라하게 해부되고 있다.

21세기에는 호러영화가 따로 없는 모습이건만, 이젠 이런 것도 익숙한 걸 넘어서 무덤덤하다.

이 땅에 태어나 살아온 지 벌써 몇 년인가.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봤고, 그가 자기 손으로 죽인 도적도 수도 없이 많다.

인류애? 살인에 대한 혐오? 피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정신적 트라우마? 고립된 현실에 대한 혼란과 고민과 고통?

에라이. 확. 지랄마라.

아주 평범한 한국인을 내전 중인 아프리카에 던져놓고 10년만 살게 해봐라.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긴 건만 한국인이지, 무자비한 야만인이 될 걸? 기회가 된다면 사정없이 총칼을 휘두르고, 달러를 빼앗는 무도한 약탈자로 변모할 거다.

그런 면에서 그는 21세기의 마인드를 장착한 동시에, 아주 훌륭하고 제대로 된 중세인이 된 셈이다.

“으차...”

도축을 끝내고서, 타고 온 말과 끌고 온 말에 차곡차곡 옮겨 실었다.

화살과 투창에 맞아서 가죽이 상하긴 했지만, 저 정도면 양호하다. 게다가 덩치도 크니, 제값을 톡톡히 받을 수 있을 거다.

“가자.”

냉큼 올라타 냅다 소리를 내지르자, 컹컹! 쉬고 있던 사냥개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

그가 사는 곳은 경상도 하동현에 속한 마을이다.

깡촌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그의 땅은 산자락에 박혀 있어서, 넓긴 더럽게 넓다만 개간하기에는 지랄 맞은 곳이다.

아무리 배경설정을 해놨다지만, 이렇게까지 디테일 하게 설정해 놓지 않았다. 얼굴도 보지 못한 그의 선조들이, 연오랑이라는 전설장수의 탄생을 위해 희생당한 거다.

괜히 미안해지니까 선조께 묵념 한 번 하자.

컹컹! 마치 시위하듯 사냥개가 마을 어귀에 등장하자, 퍼질러 있던 꼬마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와아아!”

“오우야. 연 장군!”

“호랑이 잡는 연 장군!”

‘장군이라니?’

누가 들으면 경을 칠 소리를 마구 내뱉고 있다.

아이들이 웅성거려서 일까? 아니면 개짓는 소리 때문일까? 집안일을 하고 있던 노인과 아낙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그를 반겼다.

이 사람들 중 대부분은 한 때 연씨 가문의 가솔이었던 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연씨를 보며, 안타까워서 눈물 한 방울 쯤은 흘렸던 이들이다.

말에서 내려 휘적휘적 걸어가 다다른 곳은, 마을에서 그나마 큰 건물.

건물이라고 해봐야, 15세기에 뭐 얼마나 대단하겠냐. 초가 대신 기와를 얹혀 놓은 거대한 1층 창고처럼 생겼다.

그래도 부지는 넓어서 가옥 몇 채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곳은 그가 제작하고 관리해서 만든 상점 아닌 상점이다.

사실 산골자기에 뭔 상점이 필요할까. 잡화점 + 가죽세공소 + 대장간 + 수공업 작업장 + 창고 + 우체국 + 마을회관 + 놀이터라고 할까나? 21세기로 치면 백화점. 아닌가? 코스트코? 편의점인가? 아무튼.

조선시대로 따지면 공장工匠 중에서도 사장私匠. 그러니까 전문 민간 가내수공업 업장이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이런 이들을 일컬어, 양인이지만 천한 일을 한다고 하여 신량역천인身良役賤人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감히 연씨 가문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한다? 다들 뚝배기가 깨지고도 남는다. 이미 여럿 깨졌고.

어찌됐건 연씨 가문은 이 마을의 대들보요, 수호자란 말씀.

소란스러움을 느꼈는지, 문지방을 넘자마자 사내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오냐.”

‘나이도 어린 것이 뭔 어르신이냐?’ 하겠지만, 계급과 신분이 깡패인 세상 아닌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연씨 가문의 주인이 되면서 어르신이라 불린지 오래다.

이 곳 주인은 촌장아들인데, 현대로 치면 시골마을 청년회장 쯤 되려나?

그의 집안 또한 연씨의 가솔이었던 터라, 인신의 구속에서 풀려났음에도 연오랑을 깍듯이 대했다.

투자금이라는 목줄을 쥐고 있는 걸 떠나서 말이다.

“이번에는 꽤 큰 놈이군요.”

“어. 저놈의 떼껄룩 잡으려고 남원 근처까지 갔다가 왔다.”

“어이쿠야. 고생하셨습니다. 어르신.”

하동에서 남원까지라면 말 그대로 지리산을 타고 넘었다는 뜻.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떼껄룩이라는 괴상한 표현을 썼지만, 사내는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

연오랑이 어릴 때부터 몹시 특별하고, 비상하고, 괴상하고... 간단히 말해 미친놈인 걸 익히 알았으니까.

“도축은 알아서 해서 나눠 줘라. 나머지도 전처럼 처리하고.”

“예.”

벌써 때려잡은 호랑이가 50마리가 넘어간다.

안 믿기겠다고? 그도 처음에는 안 믿겼다.

미디블워에선 한반도에만 있는 재해옵션 중에 호환虎患이 있었다.

“아니. 뭔 호랑이가 재해옵션이야?”하고 의아해 할 거다. 그도 당연히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알았다.

이 빌어먹을 조선땅엔 호랑이와 표범이 너무 많다. 매년 꼬박꼬박 10여마리씩 잡아 죽여도, 대체 어디서 자꾸 기어들어오는 지 모르겠다. 지리산이 맛집이라고 소문이라도 난 걸까?

하여튼 그래서 뒤처리는 익숙하다 못해 능숙했다.

고기는 마을사람들이 나눠 갖고, 이빨과 발톱은 장신구로 만들고, 힘줄은 잘 말려서 끈으로 만들고, 몇몇 내장은 잘 말려서 약재로 만들고, 뼈는 곱게 갈아서 행상에게 팔아먹고, 가죽은 무두질 잘해서 한 벌로 만든다.

그야말로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일용한 짐승이다. 물론 잡기 전에는 흉악한 놈이지만.

“만들라는 건?”

“잠시만... 호빈, 중빈을 불러오겠습니다.”

대청마루에 대충 누워 묻자, 사내는 다른 이들과 함께 냉큼 창고 안으로 달려갔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주섬주섬 뭔가 많이도 들고 나온다.

둘 다 일을 하다가 나왔는지, 수건을 두건처럼 두르고 있다.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대갈못을 더 얇게 해봤습니다.”

호빈이라는 사내는 강철을 덮은 쇠장갑을 내밀었고, 그는 매의 눈으로 유심히 살폈다.

21세기 그는 검에 미친 미친놈이다.

저 먼 스웨덴과 체코, 불가리아 등의 유럽 전역을 돌며 리인엑터들과 교류하고, 수작업으로 만드는 검과 갑옷도 질리도록 봤다.

그런 그가 갑옷에 관심이 없는 게 말이 되나. 특히나 갑옷 없이도 손목을 방어할 수 있는 건틀릿에는 관심이 많았다.

그랬던 이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당연히 만들어 봐야지.

21세기의 이론과 배경설정으로 인한 연씨 가문의 실전기술. 이 둘을 합치자 꽤나 근사한 작품이 여럿 만들어졌다.

그 중 백미가 바로 이 건틀릿. 연오랑이 손에 망치를 쥘 나이가 될 때부터 설계를 하고 만들었단 말씀.

살피는 걸 넘어서 쇠장갑을 끼고 움직이자, 호빈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연오랑의 아버지. 연오진은 배경설정대로 매우 유능한 대장장이다.

칼질 잘하는 게 오히려 덤이다. 그런 연오진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 호빈.

하지만 연오랑은 연오진의 실력마저 뛰어넘은 지 오래이니, 그가 긴장하는 게 당연하다.

퇴짜 맞은 게 벌써 10개가 넘어가니까.

“음...”

“크흠...”

연오랑이 신음을 흘리자 호빈도 함께 신음을 흘렸다.

대체 이번에는 또 뭐가 잘못 된 걸까? 안에 끼는 사슴가죽도 나비날개마냥 얇게 만들어 완벽하고, 철판의 두께도 양호하고, 마디마다 박아 넣은 대갈못도 수정의 수정을 거쳐 최대로 작게 만들었다.

이젠 더 바꾸라고 해도 뭘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흐흐.”

눈 동그랗게 뜨고 땀을 흘리고 있는 호빈. 그런 그를 보며 연오랑이 실웃음을 흘리자, 덩달아 긴장하고 있던 다른 장인들 모두 웃음이 서렸다.

드디어 끝났다. 이 길고긴 고통에서 벗어날 시간이 된 것이다.

“좋아! 아주 잘 만들었어. 제작법은 다 적어놨지?”

“예! 그러믄요.”

“너희들은? 너희들도 만들 수 있겠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실 호빈이 만든 것보다 저희가 만든 부분이 더 많습니다.”

연오랑이 인정을 해줘서 일까? 이곳에서 일하는 다른 장인들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여기 제작서입니다.”

호빈 뒤에 있던 이가 분위기에 편승하며 냉큼 서책 하나를 건넸다.

개발새발 갈긴 조잡한 글자는 넘어가자. 내용이 중요한 거다. 어차피 다시 옮겨 쓰면 그만.

‘음... 돈이 되려나 모르겠군.’

이 빌어먹을 15세기 조선. 아니다. 조선만이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의 문제다.

중세시대의 지식이라는 건 하나같이 폐쇄적이다. 규격화된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라, 이른바 장인의 손길이라는 게 있단 말씀. 도제라는 게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물론 사정은 이해가 된다. 그래야 먹고 살고, 무보수 노예를 부리면서 좀 편하게 살 거 아닌가.

하지만 그는 다르다. 이 웅장한 제련, 세공법을 널리 퍼트려 조선을 이롭게 하리라!

‘...는 아니고, 기회가 되면 잘 팔아먹어봐야지.’

왕실, 아니면 상단과 쇼부를 잘 치면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몇 개나 만들었지?”

“네 개입니다. 어르신.”

“좋아. 다 챙겨 놔라.”

“예.”

가장 난이도 높은 건틀릿이 성공했으니, 나머지는 일사천리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의 속마음을 읽은 걸까? 호빈 뒤에 서 있던 장인이 냉큼 자리를 차지하며 제품을 내밀었다.

이번에 내민 건, 목이 긴 두 켤레의 장화와 목이 짧은 장화 한 켤레. 긴 장화에 붙이는 얇은 쇠판이다.

아마 지금쯤 저 먼 유럽에서도 만들고 있을 바로 그 물건. 그리브라 불리는 정강이 보호대다. 동양에서는 각반이라고 불렀고.

각반을 끼기 전에 목이 긴 가죽장화를 먼저 살핀다.

단단한 나무판을 겹쳐 바닥에 깔고, 발꿈치 쪽에는 쇠를 두른 나무를 박아 굽을 만들었다.

하나는 쇠를 덮어 앞을 뭉툭하게 다듬었고, 다른 하나는 쇠를 말아서 앞코가 들리게 만들었다. 더불어 박차도 달아 놨다. 둘 다 발목을 넘어 정강이까지 가리는 긴 목을 가졌다.

현대의 전투화와 닮은 건 하마용.

웨스턴부츠, 카우보이 장화를 닮은 건 기마용이다.

이름? 당연히 연오랑 보병군화1호. 연오랑 기병군화다.

사실 목화木靴라고해서 이런 비슷한 장화가 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21세기식으로 완성. 다만 혹시나 문제될까 싶어서 검은색으로는 절대 안 만들었다.

장화에는 가죽끈이 달려 있는데, 각반의 위아래와 양옆에 뚫린 구멍에 넣어 단단히 고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걸 잘 결합하면, 강철다리가 생겨난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제자리에서 뛰었다가 쪼그려 앉았다가,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발차기를 연거푸 날리기를 반복.

이윽고 세 종류의 장화 모두 품평이 끝났다.

“좋은데? 이것도 제작법을 남겨놨겠지?”

“물론입니다.”

“예! 어르신.”

호빈은 물론이거니와 옆에 서있던 중빈이 함께 답을 했다.

둘은 형제로 호빈이 대장장이라면 중빈은 가죽장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죽장인들의 수장이라고 할까? 형제라서 그런지 몰라도, 둘의 합은 꽤 잘 맞아서 만족할 물건이 나왔다.

발목까지만 올라오는 목이 짧은 장화. 그러니까 하마용 긴 장화의 하위버전이라고 할까? 이 또한 만족스럽다. 이건 연오랑 보병군화2호라 부르리라.

“이거 팔면 얼마나 할까?”

“그게...”

“글쎄요...”

둘 다 쉽게 답하지 못했다.

들어간 가죽은 전부 연오랑이 잡아온 짐승에서 얻었다. 제작기술 또한 연오랑에게 받았다. 철은 어쩔 수 없이 사야했지만 장인들이 한 번 더 재가공을 해서 만든 물건.

원가에 이것저것 더한다고 해도, 얼마나 더 더해야할지 가늠이 안 된다.

‘하긴 나도 모르겠는데... 아. 시부랄. 돈 생각하니 또 짜증나네. 내가 반드시 동전을 만들고야 만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 지면서 삼천포로 빠진다.

대상 없이 애꿎은 한탄만 날려본다. 저걸 제값 받으려면 분명 쌀이나 승포로 받아야 할 텐데, 아오... 그거 보관하는 창고 짓는 일에 돈이 더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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