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6화 (6/538)

6. 챕터2. 준비하다 (4)

원래역사에선 조선초기에 저화라는 종이돈이 있었다. 물론 대차게 말아먹었다.

일반 백성들이 쓰기에는 너무 비싼 돈이었고, 이런 종이돈은 결국 국가가 보증을 해야 하는 건데, 태종시기에 글쎄... 과연 그게 될까?

당연히 망했고, 저화를 보조하기 위해 만들었던 조선통보 역시 대차게 말아먹는다. 위조문제도 있고, 구리수급문제도 있고, 동아시아의 물류역학관계도 있고, 하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생산 중단.

그 후로 우리의 그레이트 킹갓 세종느님께서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지만! 역시나 태종 때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또 다시 말아 먹고 만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관의 헛짓거리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어, 앞으로도 쭉 화폐유통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 또한 이런저런 이유가 얽혀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종 1년.

지금은 아마 조정의 물밑에서만 논의 되고 있을 거다. 아직 시간이 있다. 그는 해결책 몇 개를 가지고 있으니까.

국가도 하지 못하는 일을 그가 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하냐고?

‘뭘 어떻게야. 이 모드mod를 내가 만들었으니까 그렇지.’

그는 혼자 자문자답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두고 봐라. 10년대계가 끝나면 언젠가 반드시 써먹고 말 거다.

사실 안 그래도 이미 준비하는 게 있다.

시중에서 굴러다니는 초창기 동전을 구해서 열심히 분석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 마을에서 만든 장신구가 동전보다 훨씬 품질이 좋다.

이 마을 장인들은 꽤나 수준 높은 대장장이이자 금속세공사다. 이런 허접한 동전 쪼가리가 아니라, 진짜 정교하고 미세한 문양이 살아 있는 장신구를 주조틀로 찍어내고 있다.

어려운 작업은 동전의 재료가 될 합금을 만드는 일.

하여 비싸게 구한 구리를 비롯해서, 온갖 금속을 다 집어넣기를 반복. 녹이고 찍어서 굳히고 다시 녹이고를 반복하면서 최고의 배율을 찾는 중이다.

과연 이 일을 하는 장인들은, 자신들이 미래의 주화틀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까?

아마 모를 거다. 이런 실험을 통해서 생산되는 건, 음각 혹은 양각으로 새겨진 정교한 장신구나 제사용품이니까 말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빌어먹을 중세조선. 반드시 바꾸고 만다.’

뜬금없이 하늘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는 연오랑.

저게 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장인들은 저런 모습을 많이 봐온 걸까? 연오랑이 괴이한 사람이라는 걸 다들 아는 터라, 반응조차 안했다.

“몇 켤레나 만들었냐?”

“말씀하신대로 긴 건 열 켤레, 작은 건 이백 켤레를 만들었습니다. 더 만들고 싶었지만, 가죽이 부족해서...”

“잘했다.”

그가 수년 동안 사냥해온 수백 마리의 짐승가죽을 다 쏟아 부운 결과다.

“...?”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장인은 다음 물건을 내밀었다.

“말씀하신대로 만들어 봤습니다.”

다음 물건은 강철을 얇게 펴서 만든 조끼다.

건틀릿도 만드는 판국인데, 판금갑옷을 만드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닌가? 다만 이건 21세기에 살던 그도 잘 모르는 터라, 아직 완제품이 나오려면 한참 남았다.

판금을 만드는 건 어떻게든 하겠는데... 최적의 각도를 찾고, 두께를 줄이고 열처리를 하는 건 매우 지난한 일.

해서 현실과 타협하여 가죽과 철판을 리벳으로 이어붙인 조끼가 탄생했다.

조선판 방탄조끼라고 할까? 이런 식의 갑옷은 흔해서 딱히 특별한 건 아니다. 특별한 건 구조가 아니라 보다 품질 높은 철 그 자체다.

조끼를 입고 손으로 쿡쿡 눌러보고, 망치로 꾹꾹 누르자 장인들의 얼굴이 살짝 달라지는 게 눈에 보였다. 애써 망친 물건을 망가뜨리는 걸로 보였으니까.

‘됐다. 이정도면 됐지. 뭐. 시간도 없고.’

망치에 푹 눌린 자국이 생겼지만 구멍이 뚫리진 않았다. 이 정도면 눈먼 화살에 뚫릴 일은 없을 거 같다.

“계속 추가해서 만들어 놔라. 주문이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이제 대망의 마지막 물건.

“드디어 완성했습니다.”

중빈은 얼룩무늬가 선명한 큼지막한 모피더미.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호피로 만들어진 긴 장옷을 내밀었다.

“오...”

절로 탄성이 나온다. 과연 예상대로 끝내준다.

저 옷을 만드느라 무려 호랑이가 여섯 마리나 들어갔다. 팔았으면 쌀이 몇 섬인지 가늠도 안 된다.

“마무리를 다 했나보네? 호주머니는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손가락이 고생 좀 하긴 했습니다만, 이런 경험을 언제 해보겠습니까.”

내피에 박은 속주머니, 즉. 호주머니라는 물건을 처음 만들어보지만, 연오랑이 이상한 짓을 지시한 게 어디 한두번인가.

중빈은 의심 없이 실행했고, 그 결과를 자신 있게 보여줬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을 내밀며 자랑한다.

‘음.’

연오랑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생각해 봐라. 저렇게 두꺼운 가죽에 바늘을 박는 일이 쉽겠냐? 바늘이 아니라 대침이라고 불러야 할 물건을 가지고, 망치로 두들겨 가며 가죽을 뚫어야 한다. 아무리 연하게 무두질해도 가죽은 가죽이니까.

하물며 그가 들고 있는 건 털을 정리하지도 않은 모피. 안쪽만 무두질 하고 바깥 털을 남겨놓은 물건이라,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을 거다.

그래도 집을 건 집고 넘어간다.

“제작법은 다 남겼지?”

“예.”

지적을 한두번 당했던가. 중빈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모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면서, 왜 이런 건 기록으로 안 남기냐. 별 수 없이 맨땅에 헤딩하면서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만든 호피장옷. 21세기로 표현하면... 음. 무릎까지 내려오는 모피 후드 롱코트?다.

한복 특유의 치렁치렁한 소매 따윈 없다.

거의 딱 달라붙을 정도로 좁은 소매를 시작으로 가슴과 어깨, 허리 부분 역시 맵시 있게 달라붙는다. 앞섬은 트여 있지 않고, 목까지 덮을 수 있게 꽉 막혔다.

당연하지. 이건 갑옷을 대신해서 입을 옷이니까.

현대의 더블코트처럼 안쪽은 철단추로 걸고, 밖은 호랑이 발톱을 이용해 단추를 만들었다. 어깨품을 넓게 살려 만들었는지, 팔을 붕붕 휘둘러도 옷이 전체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확인 작업.

엎드려 뻗기, 달리기, 뜀뛰기, 칼춤 추기, 포복하기 등등. 할 만한 걸 다해보지만 흠잡을 곳이 없다.

마음에 들어 쓱 하고 어깨를 훑어보니, 흡사 어깨뽕 마냥 탄탄한 금속이 손에 잡힌다.

두정갑을 만들 때 쓰는 리벳공법 있지 않은가. 그걸 응용해서 어깨에서 목덜미까지 이어지게 박아 넣었다.

‘이야. 고생 좀 했겠네.’

속에 껄끄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안감도 제대로 마감 완료.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본다.

겉은 호랑이 머리가죽, 속은 사슴가죽으로 덧댄 후드. 소리를 잘들을 수 있게 귀를 덮는 부분은 구리단추를 이용해 탈착식으로 만들었다.

휙. 후드를 뒤집어쓰자.

“오우야.”

“어르신. 멋있습니다.”

“걸어 다니는 산군 아닙니까.”

연오랑에게 배운 걸까? 다들 엄지를 치켜세우며 따봉을 날려댄다. 조선사람 답지 않은 안 좋은 물이 잔뜩 들었다.

‘내가 무슨 늑대인간. 아니 호랑이인간이냐?’

하는 짓이 웃겨 피식 웃고선, 높게 올라온 목 단추를 잠가본다.

호랑이 발톱에 구멍을 내고, 힘줄을 꼬아 만든 끈으로 마감한 단추를 딱 끼우자. 착. 목덜미가 갑자기 서늘해지는 게, 비늘처럼 붙인 철판이 목을 감싸고 있는 게 느껴진다.

목운동을 하듯 비틀어 보지만 생각보다 거슬리지 않다. 가로로 붙인 철판이 접히면서 자연스럽게 가죽이 구부러진다.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무거운 두정갑을 입기 싫어서, 이렇게 가죽찰갑을 응용해서 만들어 봤는데... 정말 훌륭하다.

“남은 가죽도 다 똑같이 만들 수 있겠냐?”

“예. 문제없습니다.”

년마다 현감에게 꼬박꼬박 가져다준 거랑, 돈 벌려고 판 거 빼고도... 아직도 서른장 정도의 호피가 창고에서 잠을 자고 있다.

“그럼 그렇게 해라.”

“옙. 어르신.”

그런데 뜬금없이 완전무장을 준비한 이유? 별거 있나. 이제 한바탕 칼춤을 추러 갈 시간이 된 거다.

지금은 세종 1년. 서력으로 치면 1419년.

1419년 조선의 가장 큰 이벤트가 뭘까? 뭐긴 뭐야.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지. 그래. 이젠 왜구들 때려잡으러 갈 시간이다.

‘그리고 찾아야겠지.’

*****

짐 정리가 모두 끝난 다음 날.

길을 떠나는 연오랑 앞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다들 소문은 들었던 터라 어떤 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어떤 이는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하태평인 연오랑 아닌가.

“다들 가서 일봐. 별 일도 아니구만. 훠이휘이.”

그가 손을 휙휙 휘젓자, 다들 예상했다는 듯이 웃음을 머금으며 자리를 찾아갔다.

하긴 왜구가 아무리 대단해도 지리산 호랑이만큼 무서울까. 그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괜한 걱정을 했다 싶은 표정이다.

“너흰 나 올 때까지 애들 좀 잘 봐주고.”

“예.”

“예. 어르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냉큼 고개를 숙였다.

비록 개간이 힘들다 하나, 그 넓은 땅을 놀릴 수는 없는 노릇. 하여 꽤 많은 수의 말과 소, 양, 염소. 그리고 십여마리의 사냥개를 키우고 있었다.

몽골출신이라서 그런 걸까? 남들이 천하다고 무시해도 연씨가문은 터 잡을 때부터 목축업을 해왔다.

다만 지금은 손이 없어 마을 사람들에게 시키고 있다. 물론 돈도 주고. 그는 악덕사장이 아니다.

다들 물러났건만 어째 두 사람이 남아서 그를 빤히 바라봤다. 흡사 뭔가 부탁이라도 하려는 모양새다.

“윤현. 넌 왜 무장을 하고 있냐? 두정갑은 또 어디서 났고?”

눈을 흘기며 묻자.

“호피장옷도 만드는 데, 두정갑이 뭐에 어렵겠습니까.”

사내가 그리 답하고.

“어르신과 같이 갈까 합니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녀석이 강단 있게 대답했다.

연오랑이 “진짜냐?” 라고 청년회장을 바라보자,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촌장아들 부자가 쌍으로 난리친다.

“조선에서 성공하려면 먹물을 묻혀야지. 쯧쯧. 칼잡이는 아무리 칼질 잘해도 높게 못 올라가.”

쓴 소리를 내뱉자, 두 부자는 ‘그게 네가 할 소리냐?’ 라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호랑이를 하도 때려잡아서, 온 고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사람이 할 소리인가. 지리산 너머 반대편의 함양사람도 알고 있더라.

“그래도 무관이 되려는 녀석인데,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어르신을 모실 사람도 필요하구요.”

“쯧쯧. 이 녀석은 너무 약하잖아.”

“... 제가요?”

혀를 차는 연오랑을 보며,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니! 동네는커녕, 인근 큰 고을에 나가도 저 보다 싸움 잘하는 사람. 아니 무관도 없는 데요?’

눈빛으로 강렬하게 반발했다.

“너. 나보다 약하잖아?”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어르신.”

억울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때렸다.

소년은 어릴 적에 연오랑이 칼과 창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봤다. 그것도 자기와 나이차도 안 나는 동갑내기가 말이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은 조선에서 제일가는 칼잡이구나. 이 사람한테 배우면 무과 따위는 엎드려 헤엄치기겠지?’ 라고 말이다.

그래서 삼고초려. 아니 백고초려 끝에, 제자 아닌 제자가 되어 열심히 수련했다. 그런데 자기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빠지라고?

“이 세상에 어르신보다 강한 사람이 있기나 합니까?”

“음... 그건 그렇지.”

단칼에 자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연오랑은 어벌쩡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팩트로 공격당하니 할 말이 없다.

그는 조선의 소드마스터니까.

‘흐음.’

솔직히 말해서 녀석의 실력이 쓸만한 것도 사실. 당장 무과에 합격하고도 남을 걸? 아니다. 양반 신분이었으면 내금위內禁衛도 합격할 거다. 그만큼 빡세게 굴렸으니까.

“그래. 같이 가자. 대신 목숨은 알아서 챙기는 거다. 잘못 되도 나 원망하지 말고.”

장난기 빼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해보지만

“예!”

“예. 어르신.”

엄포를 놓아도 자식이나 애비나 그저 신나서 웃고 있다. 하여간 이 빌어먹을 중세조선. 사람 죽고 사는 걸 장난으로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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