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챕터2. 준비하다 (5)
온갖 짐을 가득 실은 수십필의 말을 이끌고, 둘은 하동현청이 있는 고을로 나아갔다.
현청이 있는 고을답게 나름 큰 도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래봐야 눈에 들어오겠냐.
문화재 같이 고풍스런 성벽과 기와집도 이젠 질렸다. 처음에나 좀 감흥이 있었지, 지금은? 그냥 촌 동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날도 더운데 호피장옷을 입고, 중무장한 모습으로 거리 한복판에 등장.
“오... 드디어 오셨구만. 그래.”
“또 잡으셨나 보네.”
“오우야.”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반응이 흘러나온다.
‘그래야지. 이럴 줄 알고, 더워죽겠는데도 이걸 입었다고.’
연오랑은 손으로 땀을 털어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동현을 넘어서 지리산 자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냐?
바로 그다.
공신이니 그보다 높은 양반출신도 없고, 호랑이를 마구 때려잡아 팔아넘긴 걸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어릴 적부터 괴이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 걸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한 번씩 쇼를 해줘야 사람들이 그를 잊지 않고, 경외한다는 말씀. 햇살을 피해 어슬렁 돌아다니던 포졸마저도, 그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좋아. 좋아. 이 맛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만끽하고 있자.
“흐흐.”
그를 따라온 소년. 윤현 역시 개선장군이 된 것 마냥 기분이 좋은 걸까? 남들 들리지 않게 실실 웃고 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거침없이 나아가 다다른 곳은 현청.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윤현에게 고삐를 넘기기 무섭게, “이리오너라.” 라고 말할 틈도 없이 자동문 마냥 벌컥 열린다.
힐끔 살피니 포졸이 입을 살짝 벌리고 감탄하고 있다.
‘이 자식이 빠져가지고.’
“현감은?”
“안에 계십니다.”
“음... 거제 합포로 갈 잡색군은 모였나?”
“예.”
“흐음. 일찍 모았는데도 다들 모였네.”
“예.”
공손하게 잘 대답했는데도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포졸은 괜히 불안해서 눈을 깔았다.
“야. 너도 갈래?”
“예? 어... 어딜 말입니까.”
흉신악살을 만난 것 마냥, 포졸을 벌벌 떨면서 말을 흐렸다.
“어디긴 어디야. 왜구 때려잡으러 가는 거지. 언제까지 포졸만 할 거야. 가서 한탕 해서 공도 세우고, 돈도 벌고 그래야지.”
“흐익...”
포졸은 감히 말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몸을 꼬았다. 장난을 쳐도 진심으로 받아들이니 재미가 없다.
“농담이다. 가서 일 봐라.”
“옛! 나리.”
부리나케 달려가는 녀석을 뒤로하고 몇 걸음 옮기기 무섭게, 현감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진짜로 버선발로 뛰어온다. 어지간히 쇼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헉헉... 호장군! 오셨소.”
호장군은 그의 별명 아닌 별명. 마을사람이야 어르신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품계도 높은 현감이 그렇게 부를 리가 있나.
그렇다고 도령이나 도련님이라 부르기에는 또... 괜히 찝찝하다. 호랑이를 마구 때려잡는 흉악한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호칭.
“야. 인마!”라고 부르기에는 신분이 거슬리고, “네 이놈!”하고 불렀다가는 칼 맞을 거 같다. 또한 과거를 본적이 없으니, 진사나 참봉 같은 하급직으로 부르지도 못한다.
이렇듯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해서 그냥 별칭 아닌 별칭으로 부르고, 심지어 하대도 못했다.
계급보다 칼이 더 무서운 법이고, 따지고 보면 현감이 현감 자리에 오른 것도 연오랑 덕택 아닌가. 하여 그냥 호장군이라 불렀다.
현감이 별을 본 신병마냥 각 잡고 소리쳐 보지만, 돌아오는 건 쓴소리다.
“거. 저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숨이 차고 그러쇼? 살 좀 빼요. 살 좀.”
쇼를 해도 누구 앞에서 쇼를 하고 있나. 세상의 주인공은 그다.
두툼한 뱃살을 손으로 툭툭 찌르자, 현감은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비틀었다.
“다음에 올 때도 이러면 호랑이 사냥에 끌고 갑니다. 살이 많아서 호랑이가 포식하겠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히익!”
“대답하세요.”
“끄응... 빼겠소.”
“좋습니다! 안내하시죠.”
“크흠!”
울상을 지으면서도 현감은 군말 없이 발을 놀렸다.
그가 말은 까칠하게 해도 속은 소탈한 걸 알지만... 현감 체면에 다른 백성들처럼 굴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하는 짓이 괴상해서 그렇지. 2대에 걸친 공신의 후손인 터라, 아무리 품계가 없어도 쉽게 건드릴 수 없다.
현감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뻔히 아는지라, 그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발을 놀렸다.
이윽고 도착하자. 현청 한쪽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또한 연오랑을 보며 냅다 고개를 숙였다.
신분을 넘어서서 해괴하게 생긴 호피장옷을 보며, ‘저 인간이 또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냉큼 시선을 피했다.
“이게 끝?”
“우리가 보낼 인원은 그렇다만...”
현감은 또 뭔가 트집 잡을까 싶어 말을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무리 잡색군이라고 해도 그렇지. 저렇고 가라고요? 갑옷 없어? 칼은? 창은 저게 뭐야 저게. 창이야 나뭇가지야?”
“그게...”
“이거이거.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네, 잘 못 봤어. 현감 어른이 사람 목숨을 똥값으로 알 줄이야. 고을에 곡소리가 울려 퍼져야 정신 차릴 양반이구만 이거?”
반말 존댓말 섞어가며 한소리하자, 현감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무슨 말을 해도...”
그가 쌍심지를 켜고 현감의 배를 쿡쿡 찌르자, 모여 있던 이들은 동의한다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 됐고. 현청을 싹싹 뒤져서라도 화살은 다 주시죠? 날 저물기 전에 출발할거니까.”
“끄응. 그렇게 하겠네!”
“에휴...”
연오랑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현청의 대청마루에 대충 걸터앉았다. 어찌할 바 모르는, 저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도 한마디 해준다.
“거. 뒤지기 싫으면 밖에 나가서 뭐라도 챙겨 와! 내 목숨이 아니라 네 목숨이야. 이것들아! 한 시진 준다. 빨리 갔다가 튀어 와라. 아. 화살하고 활은 빠짐없이 챙기고! 옆집 거라도 다 뺏어와!”
“예. 나리.”
“옙!”
한소리하기 무섭게, 모여 있던 이들이 우다다 사방으로 퍼져갔다. 반대로 바톤터치를 하듯, 말을 맡기고 온 윤현이 그에게 다가왔다.
호피장옷을 벗어 놓고 퍼질러 누워 있는 연오랑. 그 옆으로 와서 큼지막한 대나무 부채로 부채질을 시작했다.
점수 따려고 아양이라도 떠는 건가? 허나 솔솔 부는 바람이 나쁘지 않아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한데 어르신.”
“왜?”
“아무리 잡색군이라지만 무장이 너무 부실한 거 아닙니까?”
“기대도 안했다.”
연오랑은 피식 비웃고 말았다.
태종이 집권하고 사병철폐가 이뤄지면서, 꽤나 살벌한 조치가 취해졌다.
왕권강화를 위해 미친 듯이 달리는 그가, 지방 세력이 무장하거나 무력을 갖추는 꼴을 가만 놔두겠는가?
조선시대에 활쏘기란 그야말로 놀이이자 유흥이나 다름없는 일인데, 그것마저 금지할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유명무실해졌고.
아무튼 그런 시절을 겪다보니 단병기류 무장이 약화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대체 나라는 어떻게 지키고, 군대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조선은 신분제 사회이고 군역은 양인만 지게 되어 있다.
이 양인에는 양반, 양민이 모두 포함된다. 그렇다. 아직은 조선초기라서 원칙적으로는 양반도 무조건 군대를 가야했다.
다만 양반을 양민하고 똑같이 대하는 건 조금 그러니까, 관직에 오르면 군역이 면제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각종 특수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갑사나 중앙군의 별시위, 친군위등의 직업군인. 국왕의 친족이나 공신,훈신 자제들이 들어가는 족친위 같은 귀족숙위군이 존재했다.
게다가 조선군은 자기 돈으로 무기사고, 갑옷사고, 도시락 챙기고, 다 자기가 알아서 했다.
물론 법으로 치면 봉족奉足이라고 해서, 4,3,2인이 1조를 이뤄서 a가 군역을 지면 b,c가 비용을 대주기로 되어 있는데, 이게 쉽게 될 리가 있나. 나중에 문제가 터지게 된다.
게다가 기병이나 무관은 아무나 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말은 더럽게 비싼 동물인데, 그걸 타고 훈련할 재력이 있는 양민이 몇이나 되겠나. 잡소리지만 윤현 녀석은 그야말로 봉 잡은 거다.
또한 지금은 조선의 군사제도가 완전히 정착된 게 아니다.
나중에 진관체제로 바뀌게 되지만, 지금은 12사의 중앙군과 지방의 영진군과 잡색군, 나머지 기선군이라는 수군으로 편제되어 있다.
양인출신으로 현역병이라 할 수 있는 영진군은 해안가나 국경지대에 진을 치고 복무하는 이들이다.
허나 테두리만 지키고 속안인 내륙을 비워둘 수 없는 노릇. 그래서 잡색군이라 하여, 군역을 지진 않지만 그래도 예비군 비스무리한 명단을 만들어서 내륙을 지켰다.
물론 서류상으로만 그랬지.
이 잡색군은 양인 경계에서 살짝 걸친 이들로 이뤄져 있었다.
훗날 중인계급이 되는 향리, 서리, 향교의 서생 같이 살짝 위로 걸친 이들. 양민이긴 한데 천한직종에 속해 일하는 신량역천인身良役賤人같이 살짝 아래에 걸친 이들. 끝으로 관에서 일하는 노비들.
이들을 엮어서 21세기의 동원예비군처럼 만들었는데... 이게 잘 돌아갈 리가 있나. 자기 일이 아닌데 하라고 하면, 누구나 농땡이 피우기 마련이다.
“이럴 줄 알고 먼저 출발하는 거니까... 가면서 굴려봐야지. 시간이 없으니까 속성훈련을 해야겠어. 그나마 활은 대부분 쏠 줄 아니 다행이다.”
“예.”
보우마스터 이성계의 나라답게, 그렇게 억압했는데도 활만큼은 개나소나 다 쏘고 다닌다.
하지만 윤현은 ‘속성훈련’이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왜냐고? 윤현은 이미 몇 번 겪어봤으니까.
“가서 현감 불러와라. 어차피 밑에 사람 시킬 거면서, 어딜 짱박혀 있는 거야?”
“크큭. 옙!”
윤현은 웃음을 삼키며 얼른 현감을 찾아 데려왔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할 시간이다.
“현감 어른.”
“...?”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어서 일까? 현감 또한 자세를 바로하고 경청했다.
“조정에 품신해야겠소. 아무리 내가 대단한 인물이라지만,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설치면 문제가 되겠지 않겠소?”
자화자찬을 늘어놓지만, 현감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선 대마도 정벌이 끝이 나고 이종무가 탄핵 당했다.
그 이유 중에 이런 게 있었다. 그가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졸을 이끌고 참가했다고 말이다.
물론 왕의 구두허락이 있었으나 문서를 못 받았고, 또 이런저런 권력다툼을 이유로 꼬투리를 잡은 거지만... 어찌됐건 빌미가 됐단 말씀.
미래에 뻔히 저런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는데, 자신의 앞날에 스스로 먹칠할 이유는 없다.
그리 말을 하자 현감은 하나의 궁금증이 풀려 얼굴이 퍼졌다가, 다른 궁금증에 얼굴이 찌그러졌다.
연씨 가문은 대를 이어 공신을 배출한 가문이다. 당연히 모든 세금과 역이 면제. 당연히 군역도 면제다. 가만히 기다려서 나이만 차면, 문음門蔭을 통해 한성으로 갈 수 있는 인물 아닌가.
그런데 대체 왜 지금? 직위도 없이 전쟁터를 사서 찾아갈까?
‘역시 미친놈인가?’
현감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