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챕터3. 이동하다 (1)
다만... 그가 똑똑한 미친놈이라는 걸 망각했다.
품신을 하라는 말은 결국 현감 자신이, 연오랑이 참전해야할 이유를 만들어대라는 뜻 아닌가.
“그럼?”
“대충 적어서 올려 보내시죠? 그것까지 내가 해줍니까? 거. 내가 잡은 호랑이가 몇 마리요? 지리산 자락에서 사는 백성 중에서 모르는 백성이 없다. 이거지. 나보다 센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
“게다가 내가 이것저것 해서 현감도 포상 받고 그랬잖소. 아니요? 그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더니, 이젠 현감 됐으니 찬밥취급 하겠다. 이거요?”
“아니. 호장군. 말을 해도 꼭...”
팩트로 조져주자. 현감은 고개만 숙였다.
연오랑이 기행을 일삼는데도, 십선비 양반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현감도 꼼짝 못하는 이유?
그로 인해서 하동과 인근 고을은 조선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바뀌었으니까. 더불어 돈벼락도 함께 맞았고.
일례로 어릴 때부터 별 희한한 기물을 만들어서 하동과 다른 고을에 마구 팔아 넘겼다.
이것저것 많이 있지만, 농민들에게 가장 환영 받는 물건? 다름 아닌 훌테와 초창기 족답식 탈곡기다.
훌테는 커다란 빗처럼 생긴 물건이고, 족답식 탈곡기는 철퇴가시마냥 v자형태의 가시를 원통의 회전통에 달아놓은 물건.
이전까지는 넓적하게 눕힌 나무통에 때리거나, 도리깨로 일일이 내려쳐서 탈곡했다. 아주 그냥 어깨 빠지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 아닌가?
훌테는 머리를 빗듯 볏단등을 긁어내면 알곡이 분리되는 방식이고, 족발식 탈곡기는 돌아가는 v자형태의 가시에 걸려서 분리되는 방식이다.
원래대로라면 아마 몇 세기는 넘어야 조선에 등장할 물건이다.
당연히 양심의 가책 따위는 내다버리고, 훌테는 연오랑 탈곡기1호. 족답식 탈곡기는 연오랑 탈곡기2호라고 이름 붙였다.
걱정된 건 오히려 다른 부분이었다.
혹시나 백성들이 “야. 가서 연오랑 가져와라.” 이렇게 부를 줄 알고 살짝 걱정했지만, 천만다행으로 “1호 가져와라. 2호 가져와라.”이렇게 부르더라고. 그래도 나름 눈치가 있어서, 이름을 함부로 부르진 않나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21세기 그는 대도시 빌딩 건물주 금수저가 아니라, 지방 유지 금수저였다.
조금 큰 읍내에 건물 몇 채 가지고 있고, 수만평의 논과 밭을 임대차해서 수익 얻고, 기업형 수준으로 과수원과 비닐하우스, 양봉장을 일구고, 목장과 양돈장에는 수백마리의 소,돼지가 뛰놀고, 양계장에는 수만마리의 닭과 오리를 키웠다.
그야말로 역사와 전통이 가득한 농축산중소기업 그 자체다.
사정이 이러하니... 박물관에 가야 있을 법한 훌테와 족발식 탈곡기를 비롯해서, 일제시절의 온갖 농기구가 낡은 창고에 짱박혀 있었던 것도 이상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그는 칼 들고 사방팔방 싸돌아다니면서, 가축과 놀고 농기계 만지작거리며 놀았고.
그의 부모님이 생각 없이 그가 놀고먹는 꼴을 봐줬겠는가?
제 형들은 자기 앞길 찾아서 도시로 상경했고, 가업을 이을 후계자가 그 밖에 없으니 내버려 둔거다.
“그리고 보시오! 하동부원군 작호를 받은 연씨가 어떤 가문이오? 증조부님은 전조前朝에 충성해 외적과 싸웠고, 조부님은 태조대왕과 함께 싸워 공신이 되셨고, 아버님은 상왕전하와 함께 대업을 이루셨소. 그 피를 이어받은 나! 연오랑 또한 응당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하지 않겠소?”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 도취해 연설을 내뱉어 보지만... 현감이나 옆에 있던 윤현이나 가자미눈을 하고 흘겨본다.
‘그런 대단한 가문의 자제가 이러고 다니냐?’ 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
역시 안 먹히나 보다. 괜히 민망해서 현감의 뱃살을 쿡 찔러준다.
“저기 한성에 있는 높으신 분들은 모를 거 아뇨. 그러니까 잘 포장해서 작품 하나 만들어 보라 이거지. 그래야 현감도 좋고, 나도 좋고. 내가 공을 세우면 현감도 공을 세우는 거 아니요?”
‘해를 끼치면 그건 내가 잘못이 될 텐데. 이 자식아!’
현감을 그리 생각하며 잠시 눈을 치켜떴지만, 호랑이처럼 이글거리는 연오랑의 눈을 보며 냉큼 고개를 숙였다.
좀 더 머리를 굴려보자...
“흐음...”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듣다보니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다. 연오랑의 실체를 모르고 겉만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다.
“아직 나이도 차지 않았는데 정식 무관은 꿈도 안 꾸오. 그거 하나는 확실히 적어 주쇼. 나를 천지분간 못하고 공에 미친놈으로 만들면...?”
뒷말은 굳이 하지 않고, 주먹으로 대신했다.
“...”
“그래서 그냥 잡색군 몇명쯤? 음. 한 수백명 정도만 밑에 있으면 좋겠는데?”
‘수백명이 몇 명이냐? 이놈아!’
현감은 소리치려다가 애써 참았다.
“이번 원정에 한해서 지휘할 권한만 받아주면 좋겠소. 아. 이 녀석도 함께 넣어주쇼. 올해 군역이 끝났는데도 이렇게 의용병으로 함께 하니, 이런 충정忠情이 또 어딨소?”
“끄응.”
“또... 내가 짐이 많으니까 그걸 지키고 있을 사람이 필요하니까 포졸 몇 명도 같이 보내주시고.”
“...”
현감의 아니꼬운 시선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연오랑은 자기 할 말만 계속 늘어놨다.
“그리고 여기서 장계 받았다가 출발하면 늦을 테니까, 현감이 거제 합포로 가라고 알려주쇼. 필요하면 우리 집에 있는 말을 타시고.”
듣다보니... 이거 각오를 단단히 한 거 같다. 절대 무를 리가 없으니, 일이 잘못되면 현감 자신이 화풀이를 당할 게 분명.
현감은 단호히 각오를 다졌다.
“알겠네. 내 일생의 역작을 한 번 만들어 보지!”
“암. 그래야지요.”
현감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조선시대에 글 솜씨는 기본소양이나 마찬가지. 현감 정도면 충분히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다.
“한데... 그래도 조정에서 허락이 안 떨어지면?”
“그럼 말짱 꽝이지. 현감 어른은 뚝배기가 쾅이고.”
“흐힉.”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는 현감.
현감은 죽기 살기로 화끈하게 써보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생각해보니 연오랑만한 칼잡이가 왜구토벌에 나서면?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지 않나?
이윽고 시간은 또 흐르고 흘렀다.
잡색군들은 왔다가 핀잔먹고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 “소매 자락하고 바지자락 치렁치렁하게 하고 온 놈은 뚝배기가 깨질 줄 알아라!” 라고 소리치자, 궁시렁궁시렁 불평 소리가 들려왔지만 깔끔하게 무시.
해가 질 때 쯤 되자, 다들 그나마 시키는 대로 준비를 끝마쳤다.
윤현도 바빴다. 연오랑이 미리 준비하라고 시킨 일이 있었기에, 수십필의 말에 짐을 한가득 실어 놓았다.
이제 더 뭉그적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21세기나 15세기나. 군대 돌아가는 건 비슷하다. 몇날 몇시까지 도착해라라고 명령이 떨어지면, 뭐가 어찌됐건 그에 맞춰서 가야한다.
이 난리를 피웠는데 늦으면, 말짱 꽝을 넘어서 문책을 받을 거다.
“자. 출발!”
그렇게 삼십여명의 사람들과 그보다 더 많은 말을 이끌며 연오랑은 나아갔다.
그 모습은 전장을 향해 용맹정진 하는 정병이 아니라... 꼭 장사하러 떠나는 상인무리와 더 닮아 보였다.
*****
조선의 길은 험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오솔길만 계속 이어지는 건 아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바퀴건 뭐건 간에, 꾸준히 지나다니다보면 땅이 단단해지기 마련. 그런 땅에는 씨앗이 싹을 틔우기 힘들다.
그렇다보면 점점 맨땅이 드러나고, 밟기 쉬운 곳을 계속 밟다보면 점점 길이 넓어지는 건다.
이 한반도 역사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몇 번인가. 고려후기 때는 또 얼마나 많이 싸워댔는가. 수많은 길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21세기 한국인이 생각하는 조선의 거지같은 육상교통망.
그건 이렇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을 관리하지 않고, 지나다니지 않아서 점점 소멸해 간 거다.
조선초기인 지금은? 벌써부터 그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빌어먹게도 말이다.
물론 길은 있고, 생각보다 충분히 넓다. 다만 포장 따위는 전혀 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울퉁불퉁한 흙길.
이러니 수레나 마차를 끌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나. 지금 저 작은 수레에 실린 물건들은 이리저리 머리를 부딪치며 울고 있다.
“아악! 이 빌어먹을 비포장도로. 콘크리트! 콘크리트가 필요해!”
발작하는 연오랑을 보고서도, 잡색군 모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걸음을 옮겼다.
저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게 한두번인가. 게다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옆에서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들을 살피는 소년.
윤현은 날이 시퍼렇게 선 투창을 어깨에 걸치고, 각을 제대로 못 잡는 이들을 색출하고 있다.
‘아니. 이 정도는 우리 동네 꼬맹이도 하는 건데?’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잡색군이 들었다면, ‘거긴 미친 동네잖아!’라고 소리쳤겠지.
“줄 맞춰 서서. 왼~발. 왼~발. 왼발. 왼발.”
윤현이 박자를 넣어 선창하자.
“하나둘. 하나둘.”
잡색군들은 힘없는 목소리로 후창 했다.
컹컹!
오히려 옆에서 걷고 있는 사냥개 두 마리의 소리가 더 크다.
“휴... 우리는 왜.”
“너 때문이야. 이 자식아.”
그리고 이 일행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 현청 정문에서 찍혔던 포졸 일당이 함께 구르고 있다.
기초적인 제식훈련이자 행군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지.
대체 걸어가면 그냥 걸어가면 되는 거지, 왜 이렇게 오와열을 맞춰서 걸어가야 할까? 당연하고 근본적인 물음에 연오랑은 답해주지 않았다.
이것저것 설명하는 건 너무 귀찮다.
아무리 서류만 남은 잡색군이라고 해도, 행군조차 못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 열 맞춰서 걷는 걸 왜 못해? 눈이 없어, 발이 없어!” 울화통이 터져서 그냥 두들겨 패며 시켰다.
‘걷기만 하냐! 줄 맞춰서 이상한 뜀박질도 시키잖아!’ 반대로 모두는 눈을 부라리며 속으로 욕을 쏟아냈고.
그렇게 하동현을 벗어났을 때.
이들은 혹시나 거쳐 가는 고을에서 쉴 줄 알았지만... 연오랑을 너무 쉽게 봤다.
“제군. 이제부터 저 산을 정복한다. 너흰 등애가 된다.”
“...?”
“...예?”
“등... 등애가 누군데...?”
아직 삼국지연의가 대중적으로 안 퍼져서 모르는 모양이다. 모두가 얼이 빠져 한마디 했지만.
“닥쳐! 까라면 까!”
언제 뽑았는지 모를 시퍼런 칼날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산악행군이다!” 라는 요상한 말과 함께, 멀쩡한 길을 놔두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연오랑은 대체 여기서 길을 어떻게 찾는 걸까? 호랑이만 잡더니 아주 그냥 산짐승이 다 된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들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꿋꿋하게 나아갔다.
앞에서 열심히 흔들거리는 말 엉덩이. 가서 한 대 팍 후려 쳐주고 싶다.
조금이라도 속도가 늦춰질 법 하면, 연오랑이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니들이 사람새끼냐?”라며 욕을 해댔으니까.
아니. 말은 원래 달리기 위해 태어난 동물인데, 사람하고 비교하면 쓰나. 하지만 연오랑에게 그런 핑계가 통할 리가.
공자왈 맹자왈 하던 서생 하나가 뚝배기가 깨진 이후로는 아무도 군말 하지 않았다.
그저 죽을힘을 다해 산을 타넘는다.
쉴 때도 훈련은 끝나지 않는다. 숙영은 항상 물이 있는 곳에서, 못 찾으면 손바닥만 한 실개천이라도 찾아서 그곳에서 해야 했다.
하루에 한 번은 무조건 씻고 빨래하기. 이들은 청결유지가 아니라 이걸 고문처럼 여기는 듯 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못 찾으면 잠을 못자니, 얼굴 하얗던 서생들마저 흙을 묻히고 개처럼 구르며 물을 찾아다녔다.
가장 훌륭한 변신을 보여준 건, 역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서생. 뚝배기가 깨진 이후로 귀신이라도 들렸는지, 사람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