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0화 (10/538)

10. 챕터3. 이동하다 (3)

“이렇게 계속 앞뒤로만 진퇴를 반복하는 거다. 어때 쉽지? 시작.”

“...!”

다짜고짜 시키는 데 별 수 있나. 하지만 말 그대로 그리 어렵지는 않아서 다들 곧잘 익혔다. 문제는 이걸 실전에서 써먹는 일이다.

“자리 잡고 버텨라. 멍청하게 멧돼지 잡겠다고 튀어나가면 뚝배기 깨진다!”

멧돼지가 딱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아슬아슬하게 포위를 하고서, 열심히 반보씩 움직이며 창을 내질렀다.

“으악!”

“이쪽으로 오지마!”

“옆으로 좀 가라고.”

“또또! 혼자 튀네? 죽을래? 이보 이상 앞으로 나가면 뒤진다!”

그가 한소리 내질러 주자, 움찔하면서 자리를 지키는 게 보였다.

엉망진창 좌충우돌이지만 당연히 예상했다. 중요한 건 저들이 아니니까.

“너희는 뒤에서 엄호한다. 지금까지 오와열 맞춰서 움직였지? 뒤에 서서 화살을 날려라. 제자리에서 말고 열 맞춰서 움직이면서.”

“아!?”

“예?”

활을 잘 쏘는 이들만 모아놨더니 필연적으로 중인과 양반출신이 될 수밖에 없는 바. 나름 머리가 돌아가는지, 그들이 해왔던 행군대열, 전투진형이 뭘 의도했는지 알아차렸다.

“창수가 맞지 않도록 사선으로 비켜서서 움직이라는 뜻이군요?”

“오냐. 그렇다고 멀리서 쏘면 맞추기가 더 힘들다. 거리를 두고 쏘면서 너희들끼리 잘 맞는 위치를 찾아라. 또 창수들과 계속 토의하면서 호흡을 맞추도록 해. 쟤들이 앞을 안막아주면 니들도 죽어. 알지? 양반이라고 뻐길 때가 아니다.”

상리에 어긋나긴 하지만... 진지한 말을 내뱉자, 다들 얼굴이 굳어졌다.

“예! 호장 나리.”

“아. 그래도 모르니까 활촉은 제거하고 이거 달아라.”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대충 뭉쳐 만든 잡털나무뭉치 수백개가 짐에서 튀어나왔다.

“이걸로 창수를 피해서 멧돼지를 맞추는 거다. 멧돼지가 안 죽으면 오늘 취침은 없다.”

“예?”

“으음...”

아니 이런 솜뭉치로 미쳐 날뛰는 멧돼지를 뭔 수로 잡으라고? 창수가 들고 있는 창 역시 창날이 없어 뭉툭한 몽둥이나 다름없다.

“하면 된다. 열심히 찌르면 죽게 되어 있어.”

“맞습니다. 제가 해봤거든요.”

윤현이 옆에서 양념을 치자, 서생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연오랑이 미친 대왕괴물이라면, 윤현은 작은 괴물이니까.

새로운 훈련은 산을 타넘어 가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묵직한 멧돼지가 대상이 되었다가, 날렵한 노루나 사슴이 되었다가, 조그마한 토끼나 족제비가 되었다가. 짐승 씨를 말려 버리려는 듯, 일행은 미친 듯이 사냥감을 잡았다.

이들은 슬슬 군진과 합격진이 뭔지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거제 합포를 얼마 앞둔 마지막 날.

드디어 충격과 공포를 맞이했다.

화살 대여섯대가 깊게 꽂혀 있고, 발목 하나가 짓이겨진 호랑이. 상처를 크게 입고, 덩치가 크진 않지만... 어찌됐건 호랑이는 호랑이다.

연오랑은 기어코 호랑이를 생포해서 데려온 거다. 이놈의 한반도는 호랑이 왕국이라더니, 산 깊숙이 조금만 들어가면 호랑이가 튀어나왔다.

“죽여라. 못 잡으면 못 내려간다. 알지? 여기서 도망가면 니들 집안도 박살난다?”

“아이고. 나 죽네!”

“호장 나리!”

하나같이 벌벌 떨면서 소리쳐보지만, 연오랑은 귀를 후비며 팔짱끼고 누웠다.

별수 있나. 지금껏 뒤통수에 솜뭉치를 맞아왔던 창수들. 활을 잘 못 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창수가 된 천인과 관노들. 그들은 양반어른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저들이 삽질하면 이젠 목숨이 위험하다.

호랑이 발톱에 긁히면 그대로 이승에서 방 빼야한다. 기필코 잡아야 한다.

‘거. 잘 좀 합시다. 양반나리.’

‘아니. 내가 어디하기 싫어서 안하냐? 그렇게 자꾸 머리 흔들면 나도 맞추기 힘들다니까?’

운명공동체가 된 두 집단은 서로 눈빛으로 욕을 하면서도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온갖 우역곡절 끝에 거제 합포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조선의 슬로우 라이프는 잊어버리고, 21세기의 빨리빨리 라이프가 몸에 익었다.

이들은 이제 피맛을 즐길 줄 아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투사가 되었다. 물론... 실전에 들어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연오랑은 확실히 느꼈다. 이놈들은 그의 말을 너무 잘 들었다. 그리고 너무 빨리 성장했다.

해답은 하나 뿐이다.

게임 미디블워의 “노련한 훈련관” 특성. 지배력강화와 경험치추가획득.

이게 현실에서도 적용되는 게 분명하다. 잡색군은 그의 예상보다 배는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며 증명했다.

원정군이 머무는 합포. 21세기의 마산.

근처에 다가가자 보이지 않아도 웅성거리는 게 느껴진다.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하자, 드디어 눈에 들어온다.

여기까지 밀려오는 짠 바다내음. 수십, 수백개의 군막과 온 사방에 꽂혀 있는 군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형형색색의 병사들.

정군도 잡색군도 모두 섞여 있는 터라, 그들의 무장과 복장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키야. 이거지 이거야.”

“...?”

또 헛소리를 내뱉자, 다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애써 무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21세기에 미군 캠프도 가보고, 수많은 장병들과 함께 훈련도 해보고, 리인엑터들과도 함께 했지만... 이건 다르다.

이건 현실이자 실전이다. 앞으로 또 언제.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겠는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되고 가슴이 떨린다.

남아 있는 이들만으로도 이런 감동인데, 주원방포에 있을 본대를 본다면?

‘끝내주겠지!’

칼덕후로서 그야말로 덕통사하기 직전이다.

물론... 조선이 이렇게 대규모 병력을 모아서 원정을 가본 적이 있나. 예전에 대마도 정벌이 있었지만 벌써 수십년전 일이다.

대충 봐도 엉성하고 허술한 점이 수두룩하지만, 그게 뭔 상관이냐. 그가 장군도 아닌데.

그저 어수룩하면 어수룩한대로 좋고, 칼 같으면 칼 같아서 좋다.

수상한 이들이 다가오자, 주변을 돌던 병사들 몇이 다가왔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모습이다. 앞선 자는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고, 뒤를 이어 따라오는 이들 또한 온갖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

날도 더운데 뭔 미친놈들인가 싶다.

혹여나 여진야인이 여기까지 왔나? 의문이 들 정도지만 시원하게 깐 머리는 상투를 틀고 있었다. 삐쭉삐쭉 솟은 뭉툭한 창대와 온갖 짐이 가득 실린 말들까지. 더욱더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군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자 소란스러움은 더욱 커지기 시작.

“뭐여. 저게?”

“야인 놈들인가?”

“생긴 건 아닌 거 같은데?”

“이야. 눈빛 한 번 살벌하네.”

“저 사람은 양반 복색인데? 소매 자락이 왜 저래?”

진중의 소란은 더욱더 커져가고, 일행은 쥐구멍을 찾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즐기는 건 연오랑과 윤현. 그리고 몇몇 서생들이다. 이 자식들 피맛을 좀 보더니, 정신줄을 세게 놨나 보다.

그런 즐거움도 잠시. 올게 왔다.

미리 도착해 있던 현감 졸때기. 향리 중 하나가 냉큼 달려와 맞이했다.

그는 자신의 동료가 여기까지 오면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도 못하나 보다. 독이 잔뜩 올라 있는 동료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얼른 연오랑에게 보고부터 해야지.

“호장 어른! 한성에서 오신 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래 기다렸냐?”

“예.”

단칼에 대답하는 걸 보면 정말 오래 기다렸나 보다. 왜 이제야 왔냐고 시위하는 눈빛이다.

‘일이 잘 풀렸구만.’

일찍 왔다는 뜻은 궁에서 별말 없었다는 뜻. 논의가 길어졌으면 늦게 도착했을 거다.

“가자.”

“이리로.”

긴 말없이 곧장 나아가자, 향리는 후다닥 달려오며 앞장섰다.

웅성거리는 병졸을 뚫고 나아간 곳은 나름 격식을 갖춘 군막. 주인은 이미 주원방포로 떠났는지 시중드는 병사도 없다.

“윤현은 따라오고 나머지는 대기해라.”

“예.”

펄럭. 천을 걷어 올리고 들어가자. 웬 젊은 관리가 상석을 차지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기다리던 주인공이 오긴 왔는데, 요상하게 생긴 호피장옷을 입고 있어서 당황한 모양이다.

“비답은 가져오셨소?”

“잠시만...”

그와 윤현이 알아서 무릎 꿇고 기다리자, 관리는 허둥지둥 황급히 비답을 찾았다.

맨바닥에 아랑곳하지 않고 궐을 향해 절을 하고 기다리자, “크흐흠.” 관리는 목을 가다듬으며 읊었다.

쓸데없이 길고 긴 내용을 요약하면.

- 네 충정은 잘 알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하나 바로 관직을 줄 수 없다. 하지만 호환을 여러 번 막아 이미 나라에 공을 세웠으니 이번 원정에 한해서 임시로 관직을 주겠다. 적게 줬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아. 윤현이라는 장정은 네 소속으로 하여라.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예를 끝마치고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자, 관리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래도 나름 궐에서 생활해서 눈치가 있는 모양이다. 윤현이 슬쩍 눈짓을 하자 냉큼 상석을 양보하고 옆에 섰다.

보나마나 여기까지 직접 온 걸 보면 승정원소속 말단 관리일게 분명. 가차 없이 치고 나간다.

“나 알지요?”

모를 리가 있나. 연오랑을 기다리면서 거제도로 떠나보낸 병사만 몇 명인가. 하는 일 없이 하동현 향리랑 노닥거리기만 했다.

그도 솔직히 ‘대체 이 미친놈은 뭐하는 놈인가?’ 궁금했으니까. 그리곤 향리의 썰을 듣고 이내 깨달았다. “아. 이놈은 정말 특이한 놈이구나.” 라고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짜고짜 “나 아냐?” 라니? 하지만 옆에서 다시금 눈짓하는 윤현을 보고선 냉큼 대답했다.

“조금...”

“궐에서는 별 말 없었소? 내 나이부터 시작해서, 취재도 없이 관직을 준다고 반대하는 이가 있었을 거 같은데 말이오?”

“그게...”

관리는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현감이 상소를 꽤나 잘 썼는지, 호랑이를 혼자서 때려잡는 어린 무사에게 기회를 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대세. 그것도 대체불가한 공신 자제 아닌가.

나아가 태종이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 원정의 핵심주장자가 바로 태종이다.

그의 입장에선 웬 어린 공신자제가 자신의 뜻을 알아서 밀어주니, 명분이 확 살게 된거지.

그래서 결론도 빨리 나왔단다.

임시품계는 정7품 돈용부위敦勇副尉. 정식 관직을 줄 순 없어서 잡색군 총패대도위總牌大徒尉라는 임시관직을 내줬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없어지는 관직이다.

역시 예상대로다.

‘정7품이면 어차피 내가 음문으로 받을 품계고, 잡색군 중에서 인원을 뽑아서 독립부대로 쓰라. 이 말이지?’

총패는 잡색군 50인을 이끄는 대장을 뜻한다.

총패대도위는 그 총패 중에서도 우두머리? 비슷한 건데, 정확한 병력 수를 정해주지 않았다. 원정군 사령부에서 알아서 정하라는 뜻 같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원래 총패 역할을 해왔지 않나. 그러니 조정에선 뭔가 거창하게 내준 것 같아 보여도, 사실 별거 없는 거다.

“잡색군이라고 콕 박아 넣은 걸 보면, 정군은 못 건든다는 말이군?”

“그렇소!”

관리는 혹여나 그가 정규군에 욕심을 낼까봐, 눈을 부릅뜨며 강한 어조로 답했다.

그가 원정에 방해되지 않게 잡색군으로 빼놓았는데, 그걸 건드리면 쓰나. 현직 지휘관이나 조정의 인사나, 다들 그 사태는 피하고 싶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이 승정원 관리의 목이 무사하기 힘들다.

하지만 연오랑은 걱정 없었다. 정군이나 잡색군이나 뭐 다를 거 같나? 일 년에 두세 달 군역을 치르고, 그 외에는 농사일 하는 게 조선군이다.

두어 달 깨작 배운 놈이나, 하나도 안 배운 놈이나 뭐 얼마나 차이 날까. 연오랑의 눈엔 전부 바닥이다.

“거. 목에 힘 좀 풉시다. 목 부러질라. 내가 조정의 어르신들 고심을 모를 거 같소? 이거면 충분하외다.”

“크음.”

냉탕온탕을 왔다갔다하는 화법에, 관리는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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