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1화 (11/538)

11. 챕터3. 이동하다 (4)

“아무튼 이렇게 됐다 이거지... 아. 기다리느라 고생했소. 혹시 토끼 좋아하쇼?”

“음? 뭐... 조금?”

뜬금없이 토끼 타령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샤샥.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윤현의 손이 움직였다. 이게 뭔가 싶어 보니, 도축 된지 얼마 안 된 토끼 가죽이 놓였다.

“선물이요. 오면서 잡았소.”

“...”

“아. 그리고 승정원 소속 맞소?”

“그렇소만?”

“오면서 표범이랑 호랑이 한 마리씩 더 잡았소. 밖에서 확인하고, 잊지 말고 꼭 기록해 줬으면 좋겠는데...”

“...?”

“그럼 가오. 수고했소.”

관리는 다시금 미친놈 보는 눈으로 바라봤고, 그는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먼 미래의 역사에, 그의 이야기도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다음 수순은 물 흐르듯이 빠르게 진행됐다.

조정에서 보낸 문서를 흔들어대니, 누가 감히 앞을 막을 소냐. 제일 빨리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누구나 파도치는 바다를 보면 감성적으로 변하지 않나?

그도 그랬다.

흔들리는 뱃전에 우두커니 서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팔짱을 끼고 폼을 잡아본다.

이제 익숙해진 잡색군은 “또 저러네.”하고 있었지만, 처음 본 수병들은 신기한 짐승 보듯 보고 있었다.

물에 익숙한 자신들도 몸을 흔드는데, 바윗돌처럼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게 신기하니까.

이게 균형감각을 유지해주는, “무예의 달인” 효과라는 걸 짐작이나 할까?

그러나 말거나, 배는 출렁거리는 바다 위에 몸을 맡겼다.

온갖 풍파와 역사가 서려 있는 바다.

지금은 견내량이라 불리는, 21세기의 통영,거제,창원 사이에 위치한 거친 바다.

임진왜란 때 무수한 왜적을 잡아먹은 그 바다다. 아직 임진왜란이 안 일어났으니까, 그건 아닌가?

하여튼 이 역사 깊은 남해바다를 건너고 있자니... 별거 없다.

21세기 바다나 조선 바다나 뭐 다르겠는가? 그는 대서양과 태평양도 건너 본 사람이다.

감흥은 이내 식고 딴생각이 밀려온다. 보다 심오한 질문을 던져본다.

“흠...”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과거? 아니면 조선과 똑같은 다른 세상. 지구-2에 태어났는가?

오랜 철학자들을 골머리 앓게 한 질문을 지금 던져... 보진 않았다. 그런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문은 이미 갓난아기 때 끝났다.

움직이지도 못하니, 머릿속으로 생각이나 해야지 별 수 있나.

해서 내린 결론.

왜 태어났는지 의문을 갖지 말자. 그저 현실에 충실하자. 진정한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 노력하자.

그리고. “최선을 다해 조선을 변화시켜보자. 하지만 목숨 걸고 거기에만 매달리지 말자. 안되면 어쩔 수 없지. 뭐.”였다.

그는 조선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 그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비슷하게 흘러가겠지.

물론 명나라가 망했으니까 상황이 더 좋아질지 나빠질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극적으로 변화하거나 그러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가 개입하면 어떻게 될까? 이건 미래를 바꾼다는 거창한 목표인 동시에, 한편으론 재밌는 퀘스트, 이벤트 같은 거다.

“과연 조선개혁이라는 최고 난이도 퀘스트를 깰 수 있을까?” 하는 소소한 목표가 생긴 거다.

그런 면에서 지금 원정에 참가하는 이유?

가고 싶으니까. 능력이 되니까. 가서 할 일이 있으니까.

퀘스트는 깨야 제맛 아니냐? 대마도 원정은 조선개혁이라는 메인퀘스트의 시작이다 이거지.

대마도.

일본 땅이면서 한반도에 더 가깝게 붙어 있는 섬.

21세기에도 이런저런 이슈에 휘말리는 곳. 지금 시대에는 더 큰 이슈를 몰고 오는 지역이다.

쉽게 말해서 지금 대마도는 왜구가 모이는 허브항구라고 할까?

대마도는 땅이 더럽게 척박하고 온통 산 밖에 없어서,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곳이다.

그러면 어떻게 먹고 살지? 당연히 무역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근데 조선에선 대마도 물건을 안 받아주네? 우리가 팔 만한 건 물고기나 열도에서 온 몇몇 물품 밖에 없는데, 그걸 안 사주네? 어쩌겠어. 뺏어야지.

그래서 대마도 출신 왜구가 생겼다.

시간이 흘러 일본이 남북조로 나눠서 싸우면서 왜구가 더 늘었다. 그런 왜구가 중국이나 한반도로 오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대마도다.

하여 대마도는 영화 속 해적무역항 마냥, 왜구에게 물건 팔고, 왜구가 약탈해 온 물건도 사고, 그걸로 조선과 밀무역도 하고, 뭐 그렇게 지내왔다.

동시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 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둘 사이를 조율하면서 콩고물도 뜯어 먹고 그랬다.

지금은? 얼마 전에 왜구 대선단이 대마도에서 요동으로 출전했고, 그 와중에 일부가 조선 해안가를 약탈했다.

하여 대규모 왜구가 출병한 걸 알아챈 조선.

그들은 요동에 왜구공격을 알리고, 이 틈에 빈집러쉬를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원정군이 모인 것이다.

원래 역사에서 이 원정은 성공이긴 한데... 조금 애매하게 끝난다.

대마도주가 살아남아 끈덕지게 늘어지면서, 일본 세력인 동시에 조선의 관직도 동시에 받는 형태가 된다.

그 후로는 뭐... 몸을 사리면서 적당히 왜구기지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전진기지가 된다.

21세기 사람들은 “아니? 조선은 코앞에 붙어 있는 저 땅을 왜 그냥 놔뒀어?” 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은 어찌됐건 농본주의 사회고 무역을 등한시 했으니, 먹어봐야 오히려 손해나는 저 땅을 왜 탐냈겠는가.

지금 조선의 상황에서 저길 먹으면, 꼬박꼬박 먹여 살릴 거지떼 수천수만명이 생기는 거다.

하지만! 그는 21세기 사람이다.

대마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번 원정을 어중간한 성공이 아니라 대성공으로 만들어 줄 작정이다.

뭐? 대마도가 쓸모가 없어? 그럼 쓸모 있게 만들어 주마.

그것도 힘들어? 내가 가지지 못하면 남도 가지지 못하게 부숴주마.

여의치 않으면 싹 불태워서, 대마도를 짐승새끼 하나 없는 무인도로 만들어 줄 거다.

“크으! 대마도주의 목은 이 몸께서 친히 댕강해버릴 거다. 이거지.”

“예?”

“어우...”

“댕강? 뭘 댕강...?”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용케 들었는지, 주변에 있던 이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또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아무튼. 이게 대승적인 차원의 목적이라면, 개인적인 목적이 하나 더 있다. 아닌가? 오히려 후자가 사실 더 중요할지도?

해협을 건너는 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노을빛을 머금어 주황빛으로 변해가는 지평선. 그 지평선 위에서 힘차게 휘날리는 깃발들.

“오...”

또 다시 칼덕후의 가슴은 뜨거워진다.

보라. 저 좁은 항구에 오밀조밀 몰려 있는 배가 몇 척이요. 그 뒤로 보이는 수많은 막사가 몇 개인가? 크...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진짜 원정군. 만명이 넘는 병사가 저곳에 우글거리고 있으니 그 땀냄새가 바다짠물을 넘어 밀려드는 듯 했다.

빨리 가서 진짜 중세군대를 보고 싶어진다.

엉망일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좋다. 아무리 개판이어도, 리인엑터들의 취미생활과는 차원이 다를 거 아닌가.

연오랑은 당장이라도 저 틈에 끼고 싶어서, 우렁차게 외쳤다.

“다들 챙겨 입고, 표범과 호랑이 가죽을 창대에 달아라! 오면서 개처럼 굴렀는데 너희가 저 놈들보다 못할 게 뭐냐? 우리 하동 사내의 기개를 보여줘야지!”

“옙!”

“그러문요! 호장 어른!”

천인들뿐만 아니라 서생과 향리들마저도 냉큼 답하고선 옷을 챙겨 입고 무기를 챙겼다.

이제는 누가 이놈들을 먹물이라고 하겠는가. 피맛을 보고 나니, 사대부의 예의 따위는 던져 버린 지 오래다.

그저 한 마리의 수컷이 되어, 저 수많은 병졸들의 기세를 꺾어버리려 하고 있다.

저 먼 여진족마냥 가슴과 복부에는 커다란 호주머니를 만든 요상한 스타일의 한복. 그 안에는 산에서 열심히 깎아 만든 나무판을 끼워 넣었다.

그 위로 또 무두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나는 모피갑옷을 걸쳐 입는다.

그가 입은 호피장옷의 하위버전이라고 할까?

갑옷 위론 짐을 한가득 메고, 또 그 위에는 활과 화살을 빼곡하게 올리고, 한손으론 아직도 진액이 굳지 않은 나무창대 여러개를 품고, 다른 한손으론 말고삐를 잡는다.

끝으로 궁수와 창수의 수장으로 뽑힌 이가, 연오랑 양옆에 서서 창대 끝에 호피와 표범피를 걸었다.

“오우야.”

“어우...”

“살벌하구만.”

멧돼지, 사슴, 삵, 토끼, 노루, 등등.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동물 잔치 아닌가?

배 위에선 아무렇게나 퍼져 있던 잡색군이 이렇게 한순간에 정예병? 비슷하게 변하자 수병들은 놀라서 중얼거렸다.

쿠궁... 배가 나루터에 닿고 잔교가 내려지자, 워킹애니멀들은 일제히 진격.

보부도 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는 연오랑과 윤현을 따라, 착착 오와열을 맞춰 발맞춰 걸어갔다.

근 한 달간의 미친 훈련과 수컷으로서의 본능이 튀어나와, 자신의 앞을 막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려는 투지가 뿜어 나온다.

“뭐시여 저게?”

“허...? 잡색군 아닌감?”

“어디서 온 놈들이지? 저 북변에서 왔나?”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리지만, 녀석들은 합포에서와 달리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실전이다. 이놈들도 아는 거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잡아먹힌다는 걸. 힘이 없다는 걸 보이면, 죽을 자리에 내 몰릴 가능성이 크다는 걸 말이다.

겉으로 보면 승전 장수마냥 늠름하게 가고 있지만, 연오랑의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방구에 온 어린아이마냥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이야. 저건 특이하게 생긴 칼이네.’

‘저건 또 뭔 창이야?’

‘오? 확실히 돈 없으면 다들 지갑紙甲이구만?’

지갑이 종이갑옷이긴 한데, 무시하면 안 된다. 생각보다 매우 쓸 만한 물건.

‘오우. 저거 진짜 쇄자갑인가?’

21세기 십자군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사슬갑옷도 있고.

‘저건 또 뭐야? 경번갑?’

사슬과 철판을 이어붙인 경번갑.

‘뭐야 저건. 명광개가 여기 왜 있어?’

찰갑위에 큼지막한 금속판을 달아 방어력을 높인 명광개. 중국에서나 입는 갑옷도 보인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무기박물관 아닌가. 조선군은 갑옷과 무기를 알아서 챙겨야 하니, 집안 대대로 물려오던 무기와 갑옷도 제각각인 모양이다.

‘어?’

그런 그의 눈에 또 색다른 게 들어왔다.

잡색군과 비슷한 옷을 입고, 민머리마냥 앞머리를 친 빡빡이들. 무려 여진족이다.

‘쟤들도 여기 왔어?’

이건 예상 못했다. 남경을 폭파시킨 운석핵꿀밤으로 인한 나비효과인지, 아니면 원래 역사인지 모르겠다만...

‘여진족이라. 좋은데?’

좋은 패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미소가 절로 흘러나온다.

연오랑이 쓱쓱 고개를 돌려가며 살피자, 병졸들은 하나같이 눈을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중군 관사는 어디냐?”

“에?... 그 뭐. 뭐시냐.”

옆에서 입을 벌리고 구경하고 있는 병졸에게 묻자, 녀석은 제대로 답을 못하고 눈을 굴렸다.

아무리 봐도... 괴상한 옷을 입은 연오랑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어서다.

얼빠진 녀석을 붙잡고 있어봐야 시간 낭비다. 계속 나아간다.

그럼에도 길을 막는 이는 없었고, 일행은 그저 병졸이 비켜나 생긴 길을 따라서 계속 걸어갔다.

원정군이 모인 곳은 21세기 한산도 바로 옆에 있는 추봉도라 부르는 섬. 지금은 주원방포라 부르는 곳이다.

달리 말하면 이곳은 더럽게 조그마한 항구라는 뜻이고, 장군들이 모여 있을 관사는 뻔하단 말씀.

막사 위치를 살피며 대충 어림잡아 걸음을 계속 옮기자, 두정갑을 제대로 차려입은 무관 몇이 빠르게 달려왔다.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빨리 빨리 와야지.’

웬 수상한 무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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