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2화 (12/538)

12. 챕터3. 이동하다 (5)

“멈...”

머뭇거리며 멈추라고 소리치기 전에, 연오랑이 먼저 멈춰 섰다.

착착. 거침없이 왕지王旨를 펼치며 입을 연다.

“잡색군 총패대도위總牌大徒尉로 임명받은 연오랑 돈용부위敦勇副尉다. 아마 도체찰사 대감께서도 아실 거다.”

멀리서 펼쳐서 보이지도 않지만, 하급무관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총패대도위)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돈용부위)을 조합해 결론을 내렸다.

‘아. 우리가 어찌할 사안이 아니구나.’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이들은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대감께선 어디 계시나?”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잘됐군.’

귀찮게 인사 다닐 필요 없이 한방에 해결 할 수 있겠다.

“안내해라.”

“옙!”

괜히 늦으면 안 될까봐 싶어, 무관들은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 거제현 소속 섬들은 예로부터 조운선이 오가는 곳이라 군영이 존재했는데, 장군들이 머무는 곳은 그 중앙에 있었다.

군영 입구에 도착하자, 윤현에게 표범과 호랑이 가죽을 들게 하고선 나머지는 대기 시켰다.

고풍스럽고 낡은 관사 몇 개를 지나서 가장 큰 건물에 도착. 이곳에서 지휘관 회의를 하고 있는 모양? 주변에 심상치 않게 생긴 무관들이 지키고 있다.

“연오랑 돈용부위가 도착했다고 알리게.”

“예.”

“잠시 기다리시지요.”

그를 데려온 무관은 시위무관에게 말하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서 자리를 피했다.

“...”

무료함에 슬쩍 옆을 보니 윤현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이 자식도 어지간히 간이 부었나보다. 21세기로 치면 별들이 잔뜩 모여 있는 회의실 앞인데, 말단 병사가 긴장도 안하고 있는 꼴이다.

“안 쫄리냐?”

“예.”

“왜?”

“어르신이 계시지 않습니까. 헤헤. 무서워봤자 호랑이보다 더 무섭겠습니까?”

“아서라. 무서운 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예예.”

나름 분위기 잡으면서 현기어린 말을 내뱉어 보지만, 윤현은 건방지게 눈을 흘기며 한귀로 흘렸다.

좋은 말을 해줘도 못 알아먹는다.

이윽고 전달이 되었는지, 수위하던 무관이 다가와 안내했다. 윤현의 손에 들린 가죽을 보며 눈빛으로 묻는다.

‘이건 뭐냐?’

‘뭐긴 뭐야 선물이지.’

말없이 눈빛으로 대답하자, 결국 무관이 굴복하고 말았다.

“연오랑 부용도위입니다.”

큰소리로 소리쳐 알리고 드르륵. 문을 열어준다.

‘과연? 어떤 인물일까?’

기대감을 잔뜩 담고서 자신 있게 들어간다.

“...”

길고 큼지막한 탁자 위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지도가 펼쳐져 있다.

저게 대마도 지도인가 본데... 저걸로 길을 찾아가겠냐. 역시 고지도는 알아보기 힘들다.

상석에는 나이 지극하게 먹은 노인. 양 옆으로는 흰수염, 검은수염이 반반 섞인 이들이 줄줄이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 중,좌,우군이 다 섞여서 앉아 있는 모양이다.

한칼 했던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몇몇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풍채 좋고 탄탄하게 생겼다.

‘저 노인이 이종무란 말이지?’

생전처음 보는 사람인데... 역시나 전혀 모르겠다. 21세기에 인터넷에서 봤던 그림하고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그가 이종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마도정벌에 대해서 잘 아는 이유는 역사공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다.

모드mod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만 인터넷으로 찾아본 것. 하여 얼굴을 봐도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대충 앉은 자리를 보고 짐작했다.

그래도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미운털 박히면 안 되지.

“연오랑이라 하옵니다.”

그는 꾸벅 고개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고, 임명장이나 다름없는 왕지를 무관에게 넘겨줬다.

무관은 후다닥 달려가 이종무에게 건넸고, 다른 장군들은 하나같이 그를 품평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다고 내가 쫄 줄 아냐? 한칼도 안 되는 것들이. 쯧쯧.’

별들이 눈앞에 즐비하지만 공경심이라곤 전혀 없다.

따지고 보면 머리 하얀 노인들 빼고는 그가 더 연장자 아닌가? 21세기 지구-1과 15세기 지구-2에서 산 세월을 더하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고, 그저 가벼운 미소만 지으며 매서운 시선을 흘러 넘겼다.

연오랑을 살피던 시선은 이내 곧 윤현에게 닿았고, 다들 입이 살짝 벌어진다. 녀석이 들고 있는 가죽이 관심을 끈 모양이다.

“오면서 잡았습니다.”

“호오.”

“오...!”

말 없는 의문을 한마디로 해소해 준다. 감탄사는 당연히 나와야지.

“...”

이종무는 왕지를 다 읽고서 다른 장군들에게 보라고 건넸다. 그리곤 뜬금없이 환한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하동부원군 어르신의 손자가 이리 컸구나. 내 연장군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가지 못해 참으로 안타까웠다. 헌데 너를 이리 보게 되니 참으로 반갑구나. 가까이 오거라.”

“허... 자네가 하동부원군 어른 손자라고? 그간 챙겨주지도 못했군. 미안하네.”

어라? 이건 또 무슨 탱큐한 상황? 이제 보니 이종무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노인. 유습마저 그의 조부는 물론이고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아는 눈치다.

이건 그도 예상 못했다.

‘내가 만든 배경설정은 이렇게 까지 디테일 하지 않았다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고 감격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긴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르면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의 조부는 무려 개국공신. 지금까지 살아 있은 노장군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거다.

또한 이종무 연배면 아버지와 현역에서 같이 뛰었을 수도 있고.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이거 오히려 손해 본거 아냐?’

깡촌에 처박혀 혼자 살아남는 걸로 설정하지 않았으면, 공신끼리 다 알고 지냈을 거 아닌가. 당연히 그도 공신 자제들과 교류하고 말이다.

‘아니다 됐다. 그게 뭔 상관이냐. 집중하자.’

상념을 지우고 정신을 바로 깨운다.

어찌됐건 잘 됐다. 이러면 일이 훨씬 더 잘 풀리게 생겼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 쇼를 제대로 해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다른 장군들도 연오랑을 다시 보더니, 자기들끼리 조용히 소근 거렸다.

연천후니, 연오진이니 하는 이름이 들리는 걸로 봐서, 이제야 그의 조부와 아버지를 떠올리는 모양새다.

역시 조선은 인맥빨이다.

“대감...?”

그래도 모르는 인사가 있는 모양?

연오랑이 이종무 옆에 서자, 그는 자식 자랑하듯 입을 놀렸다.

“내 어릴 적에 태조대왕 곁에 계시던 하동부원군 어르신을 보았네. 참으로 대단하셨지. 이 녀석만큼 큰 분이셨어. 이 녀석 아버지인 연장군 또한 보통이 아니었지. 대도의 명수라고 소문이 자자했지 아마? 허허.”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연오랑 아닌가? 여기 있는 풍채 좋은 장군보다도 훨씬 컸다. 당연히 연씨 가문은 대대로 덩치도 크고, 키도 컸고.

이종무는 장하다는 듯, 연오랑의 등을 팡팡 때리며 옛날이야기를 늘어놨다. 정말 옛날이야기다. 무려 조선 건국시절 이야기니까.

그리하여! 걱정했던 일은 싱겁게, 즐겁게 풀어졌다.

그를 따라온 윤현도 장군들에게 칭찬을 들었고, 가지고 온 가죽에 대한 썰도 맛깔나게 풀어줬다.

원래 계획은 “야. 봤냐? 내 실력 이 정도야.” 라고 시위하려고 가져온 물건인데, 어째 선물로 둔갑할 지경이다.

“하면... 정녕 잡색군만 따로 운용하겠다고?”

“예. 소인. 조부님과 아버님께 병법을 배웠습니다. 자랑 같아 부끄럽지만 제가 홀로 사냥한 범도 한두마리가 아니니 무용 또한 부족치 않다 생각합니다. 허나 장군들이 계시는데 제가 어찌 나서겠습니까. 하여 일단은 잡색군 중에서 골라 대를 채울까 합니다.”

“어찌 생각하시오?”

대답에 흡족해 하는 이종무가 묻자, 제장들 모두 별다른 말없이 승낙했다.

왕지에 적힌 내용 그대로이고, 잡색군인데 뭐.

잡색군은 정규군을 보조해 주는 역할이라서 욕심나는 정예가 아니다. 먼저 나서서, 알아서 잡색군에서 뽑아간다니 천만다행일 거다.

“하면 어디에 소속되고 싶으냐?”

“명에 따라 움직이겠으나 홀로 대를 이끌고 싶습니다.”

“흐음...”

대답이 시원치 않은 걸로 봐서, 아무래도 혼자 움직인다는 게 미덥지 않은 모양새다.

경력도 없는 꼬맹이 놈이 건방지게 까부는 모양새로 보일 게 분명. 일이 꼬이기 전에 얼른 말을 덧붙인다.

자랑 아닌 자랑을 또 해야 되지만, 지금 어필하지 않으면 복잡해 질 수도 있다.

“지금껏 호랑이 사냥만 오십회 이상 해왔습니다. 대다수는 저 혼자서 잡았으나, 열번은 고을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호오...”

“오.”

“허. 오십!?”

역시나 혼자서 호랑이를 때려잡는 건, 장군들 눈에도 놀랄 일이다. 그것도 오십이라니? 믿을 수 없는 눈치다.

사실 현감을 통해서 조정에 정식으로 올라간 건 10마리 정도다. 그것도 현감과 하동 양반들 공으로 돌렸고.

나머지는 그냥 혼자 가서 잡고 창고에 박아뒀다.

왜냐고? 그래야 그가 마음 놓고 활개치고 다녀도 뒷말을 안 할 거 아닌가. 또한 10년대계를 위해서는 이름이 너무 팔리면 곤란하지.

이름값이 높아지면 여기저기서 관심을 가질 거다. 그럼 그의 행적을 가지고 또 “공신자제가 사대부의 체면을 다 깎아먹고 있소!” 이지랄 하면서 방해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웅거雄據는 이제 끝. 이제 웅비雄飛할 시간이니 숨길 필요가 없다.

“몰아치고, 나아가고, 숨어서 복병하고, 퇴로를 막아 분쇄하고!”

“...”

“여러번 하동 인근 고을의 백성 천여명을 이끌며 사냥에 성공해, 호랑이를 비롯해 수많은 산짐승을 사냥했습니다. 전하께서 강무를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냥과 전법훈련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대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

“하니, 산을 타는 데 능숙한 잡색군을 추려 꾸린다면, 산세가 험한 대마도에서 능히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장군님들께서 앞장서 적을 몰아치면, 적들은 견디지 못하고 산으로 도주할 게 자명한 일. 하여 제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가 복병해, 적들이 도주하지 못하게 후위를 점하겠습니다.”

“...”

“일을 그르쳐 적이 퇴주한들, 제가 없어도 어차피 퇴주할 적이 아닙니까? 적병이 많으면 피하여 뒤를 쫓고, 적으면 격퇴하면 그만이니 대계에는 영향이 없지 않겠습니까?”

강무는 왕이 병사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하는 건데, 그 형태가 꼭 사냥과 닮아 있었다.

사실 군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몰이사냥과 군대 운용이 비슷한 면이 많지 않나.

서로 긴밀하게 통신하고, 목표물을 찾아 추적하고, 들키지 않게 포위하고, 퇴로를 터놓고 유인해 일망타진.

연오랑은 왕을 넌지시 언급하면서 무게감을 실었다.

나아가 그가 독립부대를 운용하든 안하든 대세에 영향을 못 주니, 고민하지 말고 그냥 시켜달라는 뜻.

“일리가 있기는 한데...”

“계획에 영향이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흡사 기병대의 역할을 하는 별동대가 존재하는 건 충분히 혹할 제안이다.

그 별동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나 없나가 문제 되는데, 어차피 계획 상 별동대가 있지도 않았으니... 그가 이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의 말대로 제대로 역할을 하면 좋고, 못하면 합류시키면 그만이다.

“허나 말로만 해서 무얼 증명하겠습니까. 선봉대에 합류할 테니, 그 성과를 보고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

연오랑은 그리 말을 하고선, 하교를 기다린다는 듯이 깊게 읍했다.

‘아이고. 혀 아프다. 이만하면 그냥 승낙해라. 나중에 삽질하는 니들 보다 내가 나아.’

물론 속으론 뒷담화를 사정없이 깠지만.

그가 알아서 탁자에서 떨어져 구석에 처박히자, 장군들끼리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모양이다.

이윽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은 빠지려고 노력하는 싸움터에, 무려 공신의 자제가 직접 참가하겠다고 저리 열변을 토한다.

이치와 사리가 맞는 말을 하고 있으니, 기특해서라도 한번 믿어보자고 합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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