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5화 (15/538)

15. 챕터4. 모집하다 (3)

‘썩을. 이러니 내가 못 찾았지. 여기까지 배경설정을 해놨어야 했는데...’

연오랑은 속으로 스스로를 욕했다.

21세기 그는 연전위가 연소황이 죽고 나서 복수심에 불타서, 강진현 잡색군에 속해 박실의 부대에 들어간다고만 해 놨다.

연소황에 대해서는 배경설정을 안 만든 거지.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다.

사람을 풀어 강진만 뒤지고 다녔는데, 황해도 해주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이런저런 확인 작업을 거친 후에, 녀석도 드디어 의심이 풀렸는지 연오랑에게 상전을 대하는 예를 갖췄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연전위라고 하옵니다. 어르신.”

“하하. 너도 어르신이냐?”

“...? 소인 아비가 연씨 가문의 누굴 만나든, 항상 어르신이라 부르라 했습니다.”

“좋다. 가자.”

“...?”

“...?”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연전위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총패까지 놀랐다. 하지만 무려 도체찰사가 서명한 문서를 보여주자, 납작 엎드려야지 별 수 있나.

연전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냉큼 짐을 챙겨들고 따라나섰다.

연오랑은 신이 나서 열심히 썰을 풀었고, 연전위 역시 슬슬 마음이 열리며 입도 풀렸다.

지금은 의리와 원한과 보은의 개념이 강하게 깔려 있는 시대다. 연오랑을 따르는 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

또한 신분제가 살아있는 중세조선.

연오랑은 녀석 입장에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높으신 분 아닌가? 그런 그가 이리도 허물없이 대하니, 녀석의 마음이 녹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연오랑은 그딴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드디어 전설장수를 얻었다는 마음에 기쁠 따름이다.

그렇게 목적이 달성되자, 오늘 뭔가 되는 날인 것 같아서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패다. 여진족은 그의 제안에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족장을 중심으로 하는 촌락 생활을 하잖냐. 그래서 족장은 연오랑의 특전대가 위험한 일을 도맡을 거라고 지레짐작해서 차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는 된다. 저 먼 북변에서 이 남쪽 끝까지 마지못해서 왔는데, 쓸데없이 나서다가 혈족을 잃는 건 싫을 거다.

다만 수확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다. 다른 여진족은 다들 관심이 없었는데, 어려보이는 녀석 하나만은 관심을 보였던 것.

“족장이 안 된다는 데, 넌 뭐냐?”라고 물어보니, 자기는 저쪽 부족이 아니란다. 다른 부족은 단체로 왔는데, 자기 부족은 올 사람이 없어서 혼자만 왔다고 했다.

그래서 여진족하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조선인하고 있는 게 더 편하다나 뭐라나? 게다가 특전대가 쑤시고 다니는 소문을 들었는지, 자기도 거기에 끼면 안 되냐고 먼저 부탁했다.

나쁠 거 있나.

그가 여진족을 합류시키고 싶었던 건, 여진어를 배우려는 게 주목적이다. 더불어 이종무를 비롯한 장군들의 관심을 쏠리게 해서, 그의 주장을 보다 쉽게 관철시키려는 꼼수였고.

여진족의 무력? 물론 쓸 만하겠다만... 약탈에 눈 돌아가서, 명령을 무시하는 놈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골치 아픈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조선에게 호의적이고, 조선말도 잘하는 녀석이 있으면 금상첨화지.

하여 녀석도 합류했고, 녀석은 친해보자는 듯 괜히 옆에 있는 연전위에게 실실 웃어댔다.

본래 진지로 돌아오자,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는 윤현과 저쪽 한편에서 쉬고 있는 무관들이 눈에 들어왔다.

척하면 삼천리다. 대충 보아하니 윤현이 다 박살낸 모양.

“...?”

한데 실실 웃으며 자랑해야 할 녀석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옆에 있는 그 덩치와 여진야인은 뭡니까?’라고 묻는 게 분명하다.

“이쪽은 연전위. 한때 가문의 가솔이었다. 네 아버지도 알걸? 앞으로 함께 지낼 거다. 이쪽은 여진어를 알려줄 우투머다.”

“...”

어째 눈빛이 건방지다. 흡사 질투하는 모습 아닌가.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 걸 경계하는 것 같다.

“눈깔 안 풀어? 뒤지고 싶냐?”

“아닙니다. 어르신.”

연오랑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서자,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글사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서 짐 푸는 거 도와줘라.”

“옙!”

윤현은 둘을 향해 턱짓을 하고선 먼저 걸어갔다.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해서 일까?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무관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하나둘셋넷...열둘? 어이쿠. 이 양반들 보게. 관심 없는 척 하더니, 하나같이 휘하 무관을 다 보냈다.

“부용도위를 뵙습니다.”

“앞으로 특전대장이라 불러라.”

“...”

“예.”

딱 잘라서 말하자, 다들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어째 분위기가 싸늘하게 느껴졌기 때문. 자신들이 뭘 잘못했나? 고민해 보지만... 고민할 게 뭐 있나.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설마 저 녀석에게 다 졌냐?”

“...”

자존심은 아직 남아있는지, 자기보다 어린 녀석에게 진 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한 명도 자신 있게 답하는 사람이 없다.

“괜찮다. 앞으로 구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라.”

“...?”

연오랑은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고, 무관들은 왠지 오한이 느껴져 부르르 떨었다.

“오늘은 쉬어라.”

“예. 나리.”

“옙. 특전대장님.”

무관들까지 보내고서,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본래 잡색군들은 끊임없이 신병 지원자를 데려왔다.

동시에 자기 병사를 뺏긴 총패들이 우르르 찾아왔고, 말도 없이 보여주는 명령서에 오던 길을 따라 그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드디어 밤이 찾아올 무렵, 소란은 끝이 났다.

총원은 284명. 나쁘지 않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거리는 녀석들에게 꿀대추 특식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출항까지 대략 십여일 밖에 안 남았다. 너희가 했던 훈련을 저들도 하게 될 거다. 하지만 저들은 본래 깜냥이 되던 이들이니, 너희보다 나을게 분명하다. 그러니 너희도 분발해야 할 거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전쟁을 하러 간다. 죽고 사는 건 하늘이 아니라 너희가 결정하는 거다.”

“...”

“예. 나리.”

한없이 무거운 말에, 모두는 대추를 씹던 걸 멈추고 침묵에 잠겼다.

“앞으로 너희가 모범이자 선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가르치기에는 시간이 없다. 하니 지금부터 시작해라.”

“...?”

“복장부터 시작한다. 알지?”

출발하기 전 하동현에서 난리를 피우지 않았나.

소매자락과 바지자락을 잘라내는 걸 말하는 거다.

사실 다른 병졸이 보기에, 연오랑만 특이한 복색을 한 게 아니다.

이들 또한 상의와 바지를 길게 잘라서, 천을 떼어내고 다시 꿰매지 않았나.

해서 한복 특유의 헐렁한 소매와 헐렁한 바짓단이 없다. 21세기의 바지와 티셔츠마냥 타이트하게 붙어 있는 꼴이다.

나아가 자르고 남은 천으로는 가슴팍에 큼지막한 호주머니를 만들어서 나무판을 끼워 넣었다.

꼬락서니가 이러니 다른 병사들이 볼 때, “저 미친놈들은 뭐지?”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러고 한 달 가까이 구르다보니, 이미 익숙해지고 오히려 이게 더 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시키고 굴리면, 다 알아서 적응하기 마련이다.

“싫다고 하는 놈들은 패라. 어리광 봐줄 틈 없다.”

“옙!”

역시 남을 괴롭히는 건 신나는 모양이다. 큰 목소리로 답한다.

“기본제식도 너희가 가르쳐라. 또한 너희가 어떤 훈련을 했고,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너희가 깨달은 바를 아끼지 말고 풀어라. 특히나 중요한건, 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 지 똑똑히 알려라.”

“으음...”

“아악!”

트라우마가 생긴 듯, 다들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흐흐. 나 이제 무無관직이 아니다. 조정에서 품계 내려온 거 다 알지? 이젠 진짜로 뚝배기를 깨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이거지.”

“옙!”

“꼭 알려주겠습니다. 나리!”

다들 눈을 부릅뜨며, 흡사 말을 안 듣는 놈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패버리겠다는 각오를 보여줬다.

“그리고... 너희가 양반을, 너희가 나머지 사람을 알려줘라.”

“...!”

“...!”

연오랑이 짚은 방향을 보며, 이제는 하나가 된 두 집단이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이 견고한 신분제 세상 속에서, 유일하고 아슬아슬하게 하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하동현 잡색군.

연오랑은 지금. 천인이 양반출신을 가르치고, 양반이 나머지를 가르치라고 말하고 있다.

이거 초장부터 군기를 무지하게 세게 잡는다.

“그저 재물만 보고 온 이도 있고, 의욕만 앞서서 찾아온 놈도 있을 거다. 그러니 똑똑히 알려줘라. 나는 내 말에 복종하는 수하를 구하는 거지, 상전을 모시고 가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

연오랑은 특히나 천인 출신들을 보며 말했다.

“만약 거부하거나 너흴 함부로 대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물어봐라.”

“...?”

하나. 검지를 펼치며 입을 연다.

“왜구에 대한 원한”

둘. 중지를 펼치며 말을 이어간다.

“천인에게 부림당하는 모멸감.”

“...!”

“둘 중 뭐가 더 가슴이 아프냐고 물어봐라. 그럼에도 너희의 명령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 붙잡지 말고 내보내라. 알았냐?”

“... 예.”

“예... 나리.”

천인들은 힐끔 양반네들 눈치를 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답을 했다.

솔직히 연오랑이 더 무섭지, 양반네들이 무섭겠는가.

“그럼 해산. 내일 해뜨기 전에 기상해라. 복장정리는 빠르게 끝내고 취침하고.”

“옙!”

“넵! 특전대장님.”

*****

시대를 뒤흔들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엄포를 놓긴 했지만, 생각보다 이탈은 많지 않았다.

십여명 정도? 과연... 개처럼 구르다보니, 녀석들도 사람 보는 눈 생긴 모양이다.

다들 제대로 된 사람만 추려서 왔다.

사람 보는 눈. 더 정확히는 적을 빠르게 평가할 수 있는 눈썰미.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굉장히 중요하다.

이름 모를 적을 딱 마주쳤을 때. ‘아. 이 자식은 좀 치겠구나. 조심해야겠는데?’ ‘아. 이놈은 폼을 보니 별거 아니구나.’ 이걸 재깍재깍 알아차려야 반응을 달리 할 수 있다.

세보이면 더욱 조심하면서 틈을 노릴 거고, 약해보이면 더욱 거칠게 몰아붙일 수 있다.

기세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그렇게 추려진 특전대는 요상한 옷을 입고 산으로 올라갔다.

비록 작은 섬이지만 그래도 산은 있다. 역시 산의 나라 한반도답다.

다른 병졸들은 깨지도 않은 이른 새벽부터 산에 올라 땅을 파고 험지를 조성하고, 이리저리 밧줄을 매달았다.

21세기 군인들이 치를 떠는 유격장을 조성한다. 물론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

곡괭이? 군영에 있는 거 대충 쓰고. 삽? 21세기형 접이식 군용야삽 수십개를 이미 만들어왔다.

물론 21세기와 비교할 수 없는 15세기수준이지만,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돈이 많이 든 건 당연한 일.

마을사람들은 ‘저렇게 작은 삽을 대체 왜 계속 많이 만들까?’ 항상 궁금해 했었다. 내다가 팔지도 못할 물건을 말이다.

하지만 그는 무려 10년 전부터 웅비할 계획을 세워왔다. 그 화려한 등장을 알리는 시작이 지금 이 대마도 정벌이고.

때를 기다리며 차곡차곡 준비했단 말씀.

조부 때 항복한 왜인 노인네에게 왜어를 배웠고, 증조부 때 항복한 홍건적출신 노인네에게 한어漢語를 배웠다.

몽골어? 그건 기본이지. 연씨 집안은 본래 원나라에서 왔는데.

주변에 여진인만 없어서 여진어을 못 배웠고, 그래서 우투머를 데려온 거다.

그 뿐일까. 특전대에 필요한 온갖 물건들. 조선의 실정에 맞춰 개량한 21세기형 개인장구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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