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챕터4. 모집하다 (4)
수년간 사냥해온 가죽을 모조리 소모해서 군화를 만들고, 심지어 전투배낭도 몇 개 만들었다. 바닥에 얇은 나무판을 넣고, 어깨끈에 가죽과 천으로 마감해서 쿠션감을 줬다.
이미 이와 비슷한 망태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다르잖아? 나중에 이 전투배낭을 연오랑 배낭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10년 동안 개고생 했는데, 만약 일이 잘 안 풀렸으면 어떻게 하냐고?
흐흐. 그땐 또 플랜B가 있단 말씀.
하여 산악훈련유격장을 만드는 일. 기타 특전대원에게 필요한 용품을 조달하는 건 빠르게 진행됐다.
아마 21세기에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유격훈련의 효용성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격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상황별 적응훈련을 하는데 있어서 유격만큼 간단하고 싸게 먹히는 게 없으니까.
실전을 수도 없이 많이 겪은 21세기의 미군조차도 집중하는 게 유격훈련 아니냐.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건 PT체조 때문이겠지.
게다가 21세기의 그는 특전사 출신 아닌가.
예전엔 특전사 훈련이 조금 꼰대 같은 부분이 있었지만. 21세기에 와서는 미군을 필두로 세계 유수의 특수부대와 교류하면서 정수를 냠냠했다.
그렇게 간이 훈련장을 만들고 구르기 시작했다.
산악구보를 한 후, 서킷트레이닝을 변형시킨 군용트레이닝을 진행. 기구가 없어서 그냥 맨손운동을 빡세게 시켰다.
처음에는 속옷만 입고 홀딱 벗으라고 했더니 까부는 녀석들이 몇 나왔다. 물론 뚝배기가 깨진 후에 입을 다물었고.
나중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뒤지기 직전까지 몰리니, 양반이고 상놈이고 할 거 없이 알아서 다 벗더라.
그렇게 체력단련이 끝나면, 식사와 동시에 매듭법을 익혔다.
한손으론 숟가락을 들고 죽을 퍼먹고, 다른 한손으론 열심히 밧줄을 꼬아 매듭을 만들고 푸는 방법을 익혔다.
다들 집에서 가마니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서일까?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익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생전처음 보는 온갖 매듭을 보고서, 나중에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아침식사 후에는 개별 무기술 훈련. 이름만 거창하지. 그냥 하동잡색군이 배운 창질이다.
유격장을 만들면서 생긴 나무를 대충 엮고, 품을 줄이고 남은 천을 대충 묶어서 목각인형을 만들어 주르륵 일렬로 땅에 박았다.
대장간에서 창날을 부착한 새로 만든 창을 쥐고서, 목각인형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나란히 섰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찌르기만 시켰다.
출정이 코앞인데 기술은 뭔 기술이냐. 그냥 지들이 하던 건 알아서 하라고 하고, 하나만 우직하게 팠다.
“중요한 건 힘을 줘서 찌르는 게 아니다. 지금 니들 양옆으로 그어져 있는 줄 보이지?”
개개인이 서 있는 자리 좌,우,앞에는 땅에 대충 그어놓은 줄이 있었다.
꼭 땅따먹기 하듯, 사각박스 안에 들어가 있는 모양새다.
“그거 넘어가면 뒤지는 거다. 명심해라. 너흰 적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고, 적이 겁먹고 오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다. 전열이 무너지지 않고 하나가 되는 훈련을 하는 거다. 알겠냐?”
“옙!”
다들 말은 잘하지만, 역시나 쉽게 되겠는가.
자기 구역에서 벗어나 옆을 침범하는 놈도 있고, 선을 벗어나 앞으로 튀어나가는 놈도 있고, 멍청하고 용감하게 목각인형을 향해 돌진하는 놈도 있다.
실수할 때마다 사정없이 뚝배기를 깨줬고, 교관 비스무리하게 변한 하동출신들은 “지금이 기회다!” 싶어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특전대 신병은 애초에 한 가닥 하는 사람만 모았다.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한 하동출신들은 일대일로 붙으면 이길 수가 없다.
그러니 자기가 잘 아는 걸로 괴롭혔다. 연오랑은 경쟁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그냥 내버려뒀고.
그렇게 팔이 끊어질 때까지 창을 휘두르고 나면 유격장에 도착. 또 개처럼 구르기 시작한다.
21세기의 각개전투훈련장과 유격장을 결합한 훈련장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렇게 탈진하듯 몸을 쓰고 나면 다시 식사시간.
그래도 식사는 잘 나왔다. 다른 군영에 있을 때보다 훨씬 낫다.
군영에서 주는 쌀. 말린 미역줄기나 다시마 등등의 해조류, 넣기 쉽게 작게 잘라 만든 메주. 말린 배추와 상추, 무 등등. 고기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육포와 어포.
이 모든 걸 한 솥에 넣어 죽처럼 만들었다.
생긴 건 진짜 개밥처럼 보여도 필수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는 정찬이다.
맨날 똑같은 것만 먹으면 물리지 않냐고?
이거이거. 15세기조선을 너무 무시하네. 일반 양민들은 이 정도도 못 먹어.
매일 같이 고기,야채,해산물을 먹는 건, 엄청난 부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쉬지 않고 굴려대니,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다. 먹을 걸로 투정부릴 시간에 남의 밥그릇을 빼앗고 만다.
이렇게 먹이고 나면 오후 제식훈련 및 전술훈련이 이어진다.
간격을 두고 줄맞춰 걷는 훈련. 3열로 걷는 훈련. 6열로 걷는 훈련. 일시에 방향전환을 해서 돌격, 후퇴하는 훈련.
기습을 대비해 삼각꼴로 3인씩 포진을 짜는 훈련. 3인이 포진해서 후퇴하고 돌격하고, 하나로 모이는 훈련.
일렬로 가다가 갑자기 세 덩어리로 분열해서, 속도를 달리해 일제히 한곳을 포위하는 훈련. 등등.
이걸 하다보면 머리가 어지러워서, 여기가 땅인지 하늘인지 분간조차 못할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계속 굴린다.
평지에서 하다가, 비탈진 산기슭에서 하다가, 여긴 파이고 저긴 솟아 있는 유격장 험지에서 하다가, 건물이나 바윗돌로 옆이 끊어지는 곳에서도 한다.
그야말로 산을 중심으로 섬을 빙글빙글 돌며 미친 듯이 굴렀다.
그렇게 해가 완전히 저물면, 식사를 끝마치고 잠시 휴식.
아니 휴식 겸 이론 교육을 받으면서 배를 꺼트리고, 이내 저녁 실전훈련에 들어간다.
각개전투 비슷하게 충분히 서로 거리를 두고 산과 험지를 오가며 전열을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잊지 마라! 너흰 적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포위망을 짜듯 포진을 하는 게 목적이다! 한 놈이라도 빠져나오면 다 죽는 거다!”
지가 표범도 아니고 저게 뭐람?
나뭇가지에 위태위태하게 올라타서, 장도를 빼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연오랑을 보고 있자니...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다.
그렇게 달이 중천에 오를 때까지.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컴컴한 산속을 뛰어다닌다.
처음에는 잡풀에 걸려 미끄러지고, 나무에 부딪쳐 쓰러지고, 돌부리에 치여 쓰러지던 녀석들.
이내 익숙해져서 맹수가 되어 능숙하게 산을 타기 시작.
역시 다들 깜냥이 있던 녀석들이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하동출신들을 보며, 원한과 갈굼을 원동력 삼아 진화를 시작한다.
그렇게 저녁실전훈련이 끝이 나면, 제각각 횃불을 들고 산기슭의 어설픈 계곡을 찾아가 옷을 홀라당 벗고 뛰어든다.
사람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역시나 “어디 양반이!”하며 까불던 놈들이 있었다. 하지만 연오랑에게 뚝배기가 깨졌던 하동출신들이 또 ‘이때다!’ 싶어선 두들겨 패고 계곡물에 쳐 넣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씻고 나서야, 하루의 일과가 마무리 됐다.
오전에 창수가 개별훈련을 할 때. 궁수 또한 개별훈련을 했다.
이들은 더욱 개처럼 뛰어야 했는데, 유격장 온 사방에 걸어놓은 짚더미를 향해 활을 쏴야했기 때문.
“왼쪽 위!”하면 뛰다가 일제히 왼쪽 흙언덕에 있는 짚 인형을 쏴야했고, “이동!”이라는 명령에 흙더미를 오르고 나면 “오른쪽 아래!”라는 신호에 몸을 틀어 방향을 바꿔 밑으로 쏴야했다.
사격과 이동 명령은 언제나 제멋대로였고, 훈련장은 말 그대로 화살밭이 되어갔다.
이리 가서 쏘고, 저리 우르르 뛰어가서 각을 딱 잡고 일제사격을 하고, 빠르게 이탈해서 저쪽 가서 쏘고.
손가락이 더 아픈지, 발이 더 아픈지 모를 지경. 차라리 한자리에 서서 창질을 하는 이들이 더 부러울 정도다.
“너무 가까이에서 쏘는 연습만 하는 게 아니냐?” 하겠지만, 어차피 이들이 싸울 곳은 산속이다.
또한 총도 보면 최대사거리, 유효사거리, 실전교전거리가 각기 다르지 않나? 놀라운 건 그 강력한 총조차도 실전교전거리는 20~50미터 사이라는 거다.
화살은 멀리 날아갈수록 힘이 떨어진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 그 말을 반대로 하면 표적이 가까이 있을수록 파괴력이 세다는 뜻.
그렇다는 건? 활 또한 50보 안에는 들어와야 실전교전거리라는 거다.
즉. 활은 생각보다 가까이서 쏘는 물건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산악전을 가정하면.
그래서 근접사격훈련 및 속사를 죽도록 시켰다.
돌격대도 궁수처럼 오전에는 개별훈련을 했다.
잡색군이 뭔가. 신분과 직업 등의 구별로, 군역을 지지 않는 이를 모아둔 예비군이다.
조선초기가 워낙 살벌한 시대지 않나. 그러다보니 온갖 출신이 다 있었고, 그중에는 나름 칼질을 익힌 이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따로 모아 돌격대를 편성. 물론 그래봐야 십여명밖에 안 된다.
실력테스트? 연오랑이 나설게 있나. 윤현 선에서 죄다 컷이다.
윤현은 “노련한 훈련관” 특성을 가진 연오랑 밑에서, 21세기의 훈련법에 따라서 몇 년을 구른 녀석이다.
만약 녀석을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연오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의 수족으로 만들 거다.
이런 이들을 창이나 휘두르게 하는 건 아까운 일.
하여 돌격대라 칭하고 창수의 후위나 좌우에 포진해서, 적이 창벽을 뚫지 못하게 치고 빠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훈련을 시작하자마자 연오랑에게 깊은 충성과 공경을 표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그의 조언 한마디가 금과옥조나 다름없기 때문.
자신들이 막히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자신들이 몰랐던 이치를 이해하기 쉽게 이론적으로 풀어서 설명했으니까.
지들 딴에는 나름 칼잡이라 자부하는데, 소드마스터의 가르침에 감명 받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조선은 무기소지 및 패용을 금지하지 않았다.
애초에 훈련받을 때 개인무장을 알아서 챙겨 와야 되는데, 무기소지 및 패용을 금지시킨다? 이게 뭔 개소리냐.
더군다나 마을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숲과 산에서 들짐승이 내려오는 게 15세기조선이다.
하지만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얼마 없다. 눈치 보이기도 하고, 포졸들이 괜히 시비를 거니까.
조선건국 이후 사병철폐가 벌어지고, 태조와 태종은 지방 세력을 극도로 억눌렀다.
보우마스터의 나라가 활쏘기를 금지할 정도로 억눌렀는데, 칼을 들고 설치는 걸 가만 놔뒀겠냐?
“저거저거. 큰일 낼 놈 일세? 어디서 흉악한 물건을 휘두르면서 마을을 어지럽혀? 역도 아니냐? 역도?” 이런 풍조가 자자했다.
그러다보니 흔히 생각하는 무관? 교습소? 무술학원? 이런 게 생겨날 리가 있나. 칼질로 먹고살 수 있는 시대는 끝나버렸다.
또한 이 시대는 전 세계를 막론하고 비기, 비술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장인이 아무나 도제를 들이지 않는 것처럼, 칼질도 아무나 가르치는 게 아니다.
헌데 지금 조선상황에서 뭔 일인전승이냐. 칼질 배웠던 이도 때려 치고, 밭일을 하는 판국이다.
세상의 흐름이 이러한데, 돌격대로 뽑힌 이들은 시대의 패러다임과 조선사회의 무게를 어떻게든 견디며 칼을 버리지 않은 자들.
연오랑을 보고 뻑이 갈 수밖에 없다.
“아니, 군에서 배우는 무술이 있잖아요?” 라고 하겠지만, 정밀한 표준이 있는 게 아니다.
나라에서 만든 가장 기본적인 훈련법을 바탕으로, 무관이 경험하고 익힌 기술을 일반병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주먹구구식이라 이거지.
게다가 동양은 서양처럼 아기자기하게 싸우는 게 아니잖아?
한판 붙었다 하면, 기본이 몇천,몇만이고 많으면 수십만이다. 거기서 아무리 칼질 잘해봐야 의미가 있겠냐? 바가지로 바닷물 퍼봐야 티도 안 난다.
그럴 바에는 개인무력보다 투사화력에 집중하고, 전법훈련을 하는 게 낫다고 봤다. 군의 기조가 그렇게 흘러간 거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연오랑은 굉장히 시대역행적인 혹은 시대초월적인 인물이고, 돌격대의 칼잡이들 또한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