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챕터5. 설파하다 (4)
하지만 이 녀석. 뭔가 싹수가 있는 녀석 아닌가.
몰래몰래 훈련장에 와서 염탐했다. 물론 본다고 뭘 알겠냐만.
그렇게 혼자서 연오랑 몸풀기운동. 도수체조를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연오랑에게 딱 걸렸다.
“너. 여진인이냐 조선인이냐?”
“...”
녀석은 단도직입적인 말에 대꾸조차 못했다. 시선은 온통 장도에만 쏠려 있다. 언제 뽑힐지 몰라 부들부들 떨었다.
“배우고 싶으면 조선에 귀부해라. 너희 부족 전부다. 그거 아니면 훔쳐 배우다가 뒤질 줄 알아라.”
“예. 나리.”
이미 뒤지게 맞는 걸 여러 번 본 터라, 우투머는 절로 몸을 움츠렸다.
이 인간은 녀석이 지금껏 봐온 조선인이 아니다. 미친 조선인이니까.
하지만 연오랑이 괜히 이러는 게 아니다.
이게 조정에 알려지면 또 “아니! 야인에게 비기를 알려주다니, 역도요!” 이지랄 할 게 뻔하다.
정말 재수가 없어서, 혹여나 여진족이 진짜로 배워서 북변을 어지럽히면?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연오랑 그 자의 책임이오!”라고 떠들게 분명하다.
이러니 우투머에게 가르쳐 줄 수 있나. 충성맹세를 하기 전엔 절대 불가능하다.
“너 이 새끼... 설마 지금 당장 귀부하려는 거 아니지?”
“...”
찔렸는지 뜨끔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널 뭘 믿고 봐줘. 인마. 가서 네 부족을 전부다 데려오기 전엔 불가능이다.”
“예... 나리.”
“흐음. 훈련을 배우는 건 불가능하지만, 네가 정말로 특전대와 함께 대마도에서 움직일 거면... 그만한 각오를 보여라!”
“어떤...?”
동아줄이 내려오자, 녀석은 ‘혈서라도 적을까요?’라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머리라도 박박 밀어 인마. 지가 무슨 황비홍인 줄 아나.”
황비홍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가볍게 던진 말의 무거움에 우투머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면 조선인도, 여진인도 아니게 되는 거고, 여기 온 여진족 모두가 바로 알아차리게 된다는 뜻이니까.
훈련은 계속 이어졌고, 출정의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원래 역사에선 조정에서 독촉은 계속 오고, 원정군은 나가고 싶으나 풍향 때문에 늦춰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진 게 있다.
원정군 규모가 대략 2만명 정도로 늘어났다. 북방이 안전해진 탓인지 평안도 쪽 병력이 합류했다. 당연히 배도 늘어나고.
원래 역사에선 한번 나갔다가 바람이 안 맞아서 다시 돌아와야 했는데... 지금은?
병력이 모이길 기다리다보니, 원래 역사에서 진짜 출정한 날에 맞춰서 한 번에 나가게 됐다.
물론 이건 미래의 일이다.
출정일 이틀 전인 오늘.
뜬금없이 무관이 와서 연오랑을 불렀다. 중군 회의실에서 이종무가 부른다는 거다.
왜 불렀는지 대충 짐작은 되는 터라, 휘적휘적 걸어가 회의실에 도착.
간단한 안부인사 좀 나누고, 눈인사도 하고, 그렇게 자리에 앉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순몽사건은 장군들 사이에서 쫙 퍼져서, 전보다 연오랑을 조금 높게 취급해주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감탄이 무례함을 눌러버린 것이다.
그 뿐일까? 대마도 정벌 목적론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을 게 분명. 아마도 “연오랑. 너라면 이번 원정을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어보려고 부른 것일 테다.
들어보는 게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추측은 들어맞았다.
드디어 역사를 틀었다. 원래 역사처럼 어영부영 싸우다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다.
‘조선. 너 이 새끼. 딱 대라. 이제부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연오랑은 속으로 생각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두지포에 상륙 후에 훈내곶을 점령해 진을 세우고 항복을 종용하겠다는 게 본래 계획이라는 거군요?”
“그래. 한데 그것만으로 과연 항복을 쉽게 받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알다시피 이제 곧 풍랑이 몰아치는 시기가 온다. 또한 요동으로 간 왜구본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일. 하여 시기가 애매하다.”
이건 원래 역사대로 흘러가나보다. 그렇다는 건 항복을 종용하겠다는 건가?
“상왕전하와 전하께서는 대마도주가 항복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
“...”
별로 날카로운 질문도 아닌 것 같은데, 다들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역시 그런가?’
아마도 원래 역사대로 흐르고 있나보다.
원래 역사에는 명나라가 “아. 왜구들 진짜 짜증나네. 우리가 가서 쳐버릴까?” 하고 고민하니, 조선에선 다급해졌다. 왜냐고? 여몽연합군 꼴이 날까 싶어서다.
일본으로 가려면 명군이 조선땅을 가로질러 와야 하는데, 조선을 그걸 감당하고 싶겠냐?
하여 “아니. 명나라 쟤들이 진짜로 고민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서 정리하죠?” 이런 분위기가 되어 조선이 대마도를 쳤다.
물론 여기에 요동으로 왜구본대가 떠난 사정도 있고, 조선도 왜구한테 하도 시달려서 본 떼를 보여주려고 기회만 보고 있던 것도 있고.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대마도 정벌이 진행된 것.
그런데 지금은? 어라. 명나라가 없네? 명분의 큰 축 중 하나가 없는 상태라서 응징파의 힘이 조금 약했다.
세종은 살짝 소극적이지만, 태종이 워낙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일이 진행된 것.
이들은 그 사이에 껴서 자세히 말을 못하는 거고.
하지만 연오랑이야 조정 사정을 신경이나 쓰겠냐.
대마도를 아주 조져버릴 생각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장 큰 문제는 원정군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군요.”
“그러하다.”
이종무는 잘 집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연오랑은 척척 멈추지 않게 설명을 이어갔다.
오늘을 위해 무려 10년을 계획해왔다.
21세기의 옛기억을 떠올리며 계획을 이리 굴려보고, 저리 굴려봤다.
다시 태어나서, 움직일 수도 없는 갓난아기가 되어 봐라. 하루 종일 뭐 할 거냐? 머리 굴리는 거 밖에 없다.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고, 옛 기억만 더듬고 외워댔다.
그게 걸음마를 할 때까지 이어졌으니, 생생하게 기억할 수밖에. 그 후로 글을 쓰게 되면서 열심히 21세기의 기억을 기록해놨고.
“대마도는 땅이 험해 사람이 사는 곳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문池門을 통해 아셨겠지만, 대마도의 요충지는 이곳 등입니다.”
지문이란 태조시기에 투항한 항왜로, 대마도 출신이 많아 원정군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연오랑은 어설픈 지도를 보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 집어나갔다.
대마도 중간에 움푹 파인 곳을 아소만이라 부른다.
그 아소만 입구 안쪽 아래를 보면 두지포가 있다. 21세기의 오자키. 여기가 왜구소굴인데, 왜구는 항상 이곳에 모여서 출정했다.
원정군도 그 사실을 알고, 여기를 쳐서 대마도의 병량을 빼앗으려고 했던 거고.
그다음 아소만 북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면 니로군(니이)이 나온다.
원래 역사에선 박실은 니로 포구로 바로 가지 않고 옆쪽의 작은 포구로 진입했다가 이리저리 유인책에 말려 패한다. 이종무가 갈팡질팡하며 명을 헷갈리게 내린 것도 있고.
다음으로 아소만 동쪽으로 쭉 가다보면 훈내곶이 나온다. 21세기에는 오후나코시,고후나코시라 부르는 곳.
이곳은 대마도 남북을 이어주는 유일한 육지로, 이곳을 막으면 허리가 끊긴다.
이 폭 좁은 육지를 넘어가면 바로 바다가 나오는 바. 왜구는 수심 낮은 강에서, 배를 직접 끌고 밀어서 반대편 바다로 넘어 다니곤 했다.
강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실 바다가 이어져 있는 거니까.
그래서 20세기 일본은 이곳에 운하를 뚫어서 대마도 동쪽, 서쪽 바다를 쉽게 오길 수 있게 만들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북쪽은 상현, 남쪽은 하현이라 불렀다.
이곳 바로 밑에 계지(마쓰시마)가 있는데, 이곳 또한 오래전부터 번성한 요지다.
하현 서쪽해안 중앙의 소무전(고모다). 여몽원정 때 원정군이 상륙했던 곳이다. 하현 최남단해안의 엄원정(츠츠). 하현 동쪽해안중앙의 요라(이즈하라). 이곳이 남쪽의 주요도시다.
특히나 요라가 중요했는데, 수백년간 대마도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기 때문.
상현 니로군에서 살짝 북서쪽에 삼근(미네). 상현 최북단 서쪽에 상현정(사고). 상현 최북단 동쪽에 비전승(히타카츠). 상현 동남쪽에 좌하(사카)가 위치했다.
이중 좌하가 가장 중요했는데, 현現 대마도주의 가문이 도주가 되면서 요라에서 좌하로 중심지를 옮겼다.
지금까지 반백년 가까이 수도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다들 들어본 이름 같지? 이 시기부터 사람들이 계속 모여 살아서 21세기에도 도시로 남은거지.
그렇다면 연오랑이 생각한 계획은? 별거 있나. 대마도 쌈싸먹기 초토화 작전이다.
군을 세 개로 나눠서 좌군은 하현 해안을 따라서 쓸어버리면서, 배를 타고 한바퀴 돌아서 하현 중심지인 요라에 상륙.
우군 둘로 나눠서 일군은 상현 해안을 따라서 쓸어가면서 배를 타고 한바퀴 돌아서 좌하에 도착.
다른 일군은 아소만에 진입. 니로군으로 진격해 함락 후, 육지를 통해 좌하로 이동.
중군은 두지포를 점령 후. 일부병력은 아소만 남쪽을 정리하면서 훈내곶으로 이동.
본대는 훈내곶으로 곧장 이동해 진을 치고서 남쪽 계지를 함락.
그 후 왜인들이 하던 것처럼 배를 끌어서 동쪽바다로 이동. 그리곤 남쪽의 요라로 상륙.
이러면 남는 게 도시가 하나도 없네? 말 그대로 초토화다.
하지만... 이런 휘황찬란하고 거창한 계획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어떨까?
“허...”
“거참.”
“끄응...”
“으하핫!”
누군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누군가는 허탈하게 웃고, 누군가는 머리를 싸매고, 누군가는 호탕하게 웃는다.
호탕하게 웃는 거? 이순몽이지. 누구겠냐.
하여간 좀생이들 같으니라고. 분명 어디 짱박혀서 대충 싸우다가 항복받고 오려고 했던 게 분명하다.
솔직히... 생각해 봐라.
원래 역사에선 1만7천을 끌고 가서 해치운 적이 고작 이삼백명이다. 조선군은 한 이백명 정도 죽었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전과냐?
대마도나 조선군이나 제대로 쾅 붙지도 않고, 대마도는 도망 다니고, 조선군은 빈 가옥이나 불태우고 다닌 거다.
연오랑은 절대 이렇게 어설프게 할 생각이 없다.
대마도가 뒤지든, 조선이 피의 수렁에 발을 담그든, 둘 중 하나다.
“대마도의 가호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희 원정군보다 많을 거라 생각하시는 어른이 계십니까!”
21세기 대마도의 인구는 대략 3만. 일제시기에 최대로 많았을 때조차 9만이다. 인구부양력이 떨어지는 15세기대마도는? 아무리 많아도 2만을 못 넘는다.
왜구가 중국을 털어먹겠다고 이번에 대원정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병력이 고작 2천이다. 대마도에서 칼질 조금 하는 사람을 다 털어서 간 게 2천이라고.
그래서 지금은 완전 빈집이고.
아무리 조선군이 못 싸워도 그렇지. 머릿수가 몇 배나 차이 나는데, 이걸 이렇게 쫄고 있냐?
“반의 반의 반도 못될 것입니다!”
그가 쫄보들에게 왁! 소리를 내지르자, 다들 흠칫 놀라서 몸을 떨었다.
자신의 추태를 숨기며, 어른을 몰라보는 무례함을 꾸짖으려 했으나... 살기등등한 연오랑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한칼 입니다.”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으니까.
“만약 계획대로 두지포를 점령한 후 항복을 권유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왜구는 전부 산으로 숨을 것이고, 또한 대마도주의 명을 받아 북도와 남도에서 병력이 몰려와 저항할 겁니다. 그렇게 대마도주가 치일피일 결전을 피하고 버티면서 태풍을 기다리면 어쩌시겠습니까?”
원래 역사에서도 이래서 퇴각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