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챕터6. 출정하다 (1)
“상왕전하께서는 단호한 응징을 원하십니다. 대체 무얼 걱정하시는 겁니까? 태풍이 문제라면! 태풍이 불어 닥치기 전에, 우리가 태풍이 되어 대마도를 휩쓸면 되지 않겠습니까?”
“...”
“적병은 아무리 많아봐야 1,2천을 넘지 못할 것이고, 그 병력 또한 앞서 말한 주요고을에 퍼져 있을 텐데, 우리가 삼군으로 병력을 나눠도 몇 배는 차이나지 않습니까? 적을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는데 어찌 시간을 끌어 항복을 권하려 합니까? 상왕전하께서 대마도주의 목을 원하실 거 같습니까, 아니면 항복문서를 원하실 거 같습니까?”
“...”
상왕. 태종을 이야기하자 다들 얼굴이 찌그러졌다.
아마도 전자이지 않을까? 지금도 태종은 “야 이 새끼들아. 왜 빨리 안가고 있냐?”라면서 계속 사람을 보내 독촉하고 있으니까.
“이번 원정을 반대한 대소신료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제대로 싸우지 않고 설익은 승리만 가지고 온다면, 그들이 뭐라 말하겠습니까? 전투를 회피하려고만 했다고 모함하면 어쩌실 겁니까?”
“음...”
“흐음.”
자기 목이 달린 문제를 거론해서 일까? 드디어 입을 떼고 신음을 흘려댔다.
원정이 끝난 후, 자신의 위치를 열심히 그려보는 모양이다. 누군가는 승자가, 누군가는 패자가 되어 위치가 갈릴 테니까.
이렇게 일군이 아니라 삼군으로 쪼개진다? 어느 하나가 지기라도 하면? 그땐 매장 아닌 매장을 당할 거다.
무조건 이기려고, 죽도록 싸워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또한 험준한 대마도 산지와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해로에서 원정군이 한 덩어리로 모여서 싸울만한 곳이 있습니까? 지리를 잘 아는 적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적들이 모일 시간을 주는 게 과연 옳겠습니까?”
“...”
“삼군을 나눈다하여 불안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먼저 기습하면, 역으로 적이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는 형세입니다. 하면 우리는 병력이 더욱 많아지고, 적은 병력이 더욱 줄어든다는 뜻!”
“...”
“설령 우리가 전과를 크게 얻지 못하고,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어르신들께서 대마도의 모든 고을를 불태워버리면! 굶어죽든지 자중지란이 일어나든지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흠칫. 무시무시한 말에 몇몇은 소름이 절로 돋았다. 순간적으로 아비규환이 된 불탄 대마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
“원정군이 퇴각한 후. 왜구가 조선을 범할까 걱정하실 수도 있습니다. 허나 우리도 태풍을 걱정해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하는데, 왜구라고 배를 띄울 수 있겠습니까?”
“...”
“태풍 기간이 끝나려면 한 달은 훌쩍 지나갈 터, 그 사이에 왜구는 대부분 굶어죽을 겁니다. 살아남은 잔당은 그때 가서 다시 군을 일으켜 쓸어내면 여반장이겠지요. 지금처럼 대군을 일으킬 필요도 없을 것이고.”
“...!”
잔혹하기 짝이 없는 말에, 몇몇 장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오랑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무서운 인간인 걸, 본능적으로 느꼈나보다.
“하여 소인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열변을 토하는 연오랑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마도주가 항복하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들께서 제 계획을 참고하든 안 하든 상관없습니다.”
“...!”
‘이 불타는 우국충정을 보고 속에서 끌어 오르는 게 없냐! 굼벵이 영감들아! 너희도 한 때는 풍운남아이던 시절이 있었잖아. 불타오르라고! 버닝업!’
연오랑은 신라의 화랑에 빙의한 듯 열변을 토해냈다.
잊지 말자. 연오랑의 정신나이는 태어난 후부터 쭉 어른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고작 열일곱이다.
덩치는 커도 장군들이 보기에는 아직 애다. 애.
그런 애가 이렇게 싸우자고 발광하는데, 어른들이 되어가지고 엉덩이 붙이고만 있을 거냐?
연오랑은 그런 망측한 눈빛을 뿌리며 장군들을 계속 자극했다.
“중요한 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온힘을 다해! 초전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야 합니다. 그래야 상왕전하와 전하께서도 흡족해 하실 것이고, 원정에 반대하던 대소신료들 또한! 좋든 싫든 어르신들의 공을 인정할 것이고, 우리가 교전을 크게 일으켜야! 왜국막부가 겁을 먹고 다시는 조선을 우롱하지 못할 것이고, 근거지가 없어진 왜구는 다시는 대마도에서 부흥하지 못할 겁니다.”
“...”
“...”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우렁찬 연설이 끝이 나자, 뭐라 더 말하기도 힘들 정도의 침묵이 맴돌았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무거운 공기가 깔렸다.
“이야기 잘 들었다. 나가보아라.”
“예.”
연오랑은 힘없이 손짓하는 이종무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향했다.
‘자. 과연 어떻게 할 거냐? 원래 역사처럼 지나갈 거냐? 아니면 화끈하게 붙어볼 거냐?’
그는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내기하면서, 출전의 날만 기다렸다.
이틀 후. 원래 역사의 출정일에 맞춰, 원정군이 출정했다.
그리고 고작 하루 만에 대마도가 눈에 아른 거린다.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정오쯤에 도착했다.
하. 이렇게 가까운 땅을 오는데, 10년이나 걸릴 줄이야. 감개무량하다.
연오랑은 바다가 익숙하지 않은 전마의 목덜미를 애써 쓰다듬어주며 진정시켰다.
창문 아닌 창문을 따라 따가운 햇살이 스며들어온다.
땀냄새, 바다냄새, 나무 썩은냄새, 기름냄새, 철냄새, 등등 온갖 냄새가 다 밀려오지만, 구토는커녕 기대감만이 충만해 상쾌할 지경.
혼자 히죽히죽 웃는 연오랑을 보며, 곁에 있던 무관들 모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장군님. 밖에 나가서 구경해도 됩니까?”
“허... 그러시게.”
활기찬 연오랑의 물음에 박홍신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니들도 다 나와. 인마. 어디 대장님이 나가시는 데.”
“예.”
“알겠습니다.”
연오랑의 한마디에, 무관들은 박홍신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따라나섰다.
“허허. 거참.”
박홍신은 그 짧은 시간에, 무관을 완전히 휘어잡은 연오랑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연오랑을 보며 박홍신이 내린 판단은 “모르겠다.”였다.
정녕 봐도봐도 알 수 없는 젊은이. 아니 아이다. 어찌 저 나이에 저런 무용과 저런 담대함과 저런 권위와 저런 통찰이 있을까.
물론 이상한 소리와 이상한 짓을 할 때마다 기겁하곤 했지만.
연오랑이 21세기에서 왔다는 걸 꿈에도 모르니, 생각할수록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후. 좋구만. 이거.”
연오랑은 삐걱 거리는 갑판을 밟고 올라 편하게 누웠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지만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건 맹선이라 누각조차 없어서, 고개를 돌리면 출렁거리는 파도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너희도 누워. 햇빛 가리지 말고. 진정한 칼잡이는 쉴 때, 죽은 듯이 푹 쉬어야 하는 거다.”
“예.”
“넵!”
다들 일광욕을 하듯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조선의 대표선박하면 판옥선 아닌가. 하지만 판옥선이 나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연오랑이 타고 있는 배는 맹선이라고 해서, 고려 때부터 쭉 쓰던 물건이다.
이 시기에는 조선, 중국, 일본 모두 온갖 종류의 배를 만들었는데, 사실 죄다 생긴 건 거기서 거기다.
다만 구분되는 특징? 왜선은 선수를 뾰족하게 깎고 침저선이라서 속도가 빠르다. 대신 내구도가 부족.
게다가 오로지 속도를 중시한, 10명 남짓 타는 작은 배도 무수히 많다.
사서에 보면 수백척씩 몰려왔다고 그러잖나. 그거 오해하면 안되는 게, 백명이 타도 한척이고 열명이 타도 한척으로 계산했다.
맹선은 선수를 넓적하게 하고 평저선이라서 속도가 느리다. 대신 내구도가 높다.
한반도의 지랄 맞은 해안선 때문이기도 하고, 나무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튼 한반도 배는 예전부터 이랬다.
중국? 거긴 땅이 넓어서 이런저런 배가 다 쓰였다.
아무튼 이 맹선은 본래 태생이 조운선이다. 이 말이지. 그런데 이 시대에는 조운선과 군선의 구별이 딱히 없다. 그냥 병사가 타면 군선, 쌀이 타면 조운선이다.
이렇다 보니 군함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수송선 느낌이 더 강했다.
크기별로 대,중,소로 나눴는데, 생긴 건 죄다 제각각이다.
여말선초가 얼마나 개판이었냐. 나라에서 기준 같은 건 잡아주지 못하고, 그냥 다들 비슷하게 따라 만들었다.
크기? 너비는 5~8미터 길이는 15~30미터 사이? 그래도 대맹선에는 무려 80명 정도 들어간다.
저 작은 배에, 짐짝처럼 꾸역꾸역 들어가는 걸 보며 기겁했다.
연오랑이 탄 배는 중맹선으로 50명 정도 타는데, 말을 태우고 가는 터라 연오랑과 무관, 배를 조종할 수군들 몇 명만 타고 있었다.
근데 이게 해류를 잘 만나서 그런가? 아니면 바람을 잘 만나서 그런가? 생각보다 잘 나간다.
평저선이라고 해서 무조건 연안에서만 써야한다고 생각했는데, 대한해협 정도는 가뿐히 건너는 거 같다.
게다가 ‘저렇게 작은 배 타고 다니다가 뒤집히는 거 아냐?’ 하고 걱정했는데. 웬 일.
생각보다 흔들림이 적었고, 계속 반복되다보니 은근 재밌다. 물론 배를 안 타본 무관들은 기겁했지만.
박홍신? 그 양반은 어째 연오랑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함을 놔두고 여기에 함께 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봤는데, 뭐 그냥 전형적인 조선 사람이다. 아닌가? 연오랑이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보고도 별말 안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깨어 있는 건가?
아마도 운석핵꿀밤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 일로 인해 조선 사대부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으니까.
아무튼 호감이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약을 치며 달라붙었다.
10년대계가 완성됐으니, 이제 10년대계 페이즈2를 위해서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이럴 때 아니면 고수뱃사람한테 또 언제 배우겠나. 겸사겸사다.
박홍신은 사서에 적힌 대로 수전과 물길에 밝아서, 그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해줬다.
연오랑? 훌륭한 학생이 되어서 세필을 들고 열심히 받아 적었고.
어쩌면 박홍신은 그 모습이 기특해서, 더 열심히 가르쳐 준 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연오랑이 기선군이 될 거라고 오해하는 걸지도?
그렇게 하루 동안 배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 대마도의 코앞까지 왔단 말씀.
아소만 입구를 지나왔으니, 슬슬 준비할 시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자식들 또 이상한 짓 하나?”하고 감시하듯 박홍신이 은근슬쩍 올라왔다. 시간 됐는데 안 내려와서 궁금했나 보다.
그런 그를 보며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약 올렸다.
‘이 양반. 반응 좀 볼까?’
“장군님.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허허...”
손으로 좁은 만 양쪽을 가리키자, 박홍신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왜냐고? 그가 가리키는 곳엔, 바다 바로 옆에 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으니까.
대마도는 진짜 거지같은 섬이다.
왜 맨날 “우린 농사지을 땅이 없어요!”라고 빌빌거리는지, 보는 즉시 알아차렸다.
선봉대는 좁은 만을 따라 계속 전진 중인데, 아무리 봐도 상륙할 곳이 안 보인다.
일반적인 섬이면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부분은 모래도 좀 있고, 평평한 곳도 있고, 완만한 곳도 있고, 그러는 게 보통 아닌가?
하지만 대마도는 반대다. 산의 허리까지 바다가 차오른 형세라서, 오히려 봉우리 능선만 바닷물 위로 튀어나온 모습이다.
이런데 전군을 몰아서 한 포구를 치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냐. 그게? 앞에서 뭔 일이라도 나면, 가운데와 후미는 오도 가도 못 하고 갇히게 될 거다.
결국 전군이 공격하든, 삼군 중 일군이 가서 공격하든, 뭐가 됐든 싸울 수 있는 병력은 거기서 거기라는 거다.
우격다짐으로 버티면서 해전을 한다고? 에라이. 말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