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챕터6. 출정하다 (2)
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은 정말로 어지럽다. 농담이 아니라, 배를 좀 타다보면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아서 방향을 잡기조차 힘들다.
게다가 어지럽게 파이고 튀어나온 형태라서, 어디에 어떤 포구가 숨겨져 있는지, 왜구가 어디 쏙! 하고 숨어 있는지도 찾기 힘들다.
이럴 바에 차라리 거지같은 육지에서 싸우는 게 낫다. 대마도가 온통 산이라곤 하지만 조선의 산도 만만치 않으니까.
“크흠. 준비하게.”
박홍신은 자기가 졌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알았으니까 이제 닥치고 준비해라.’라는 뜻이리라.
“옙! 내려가자. 갑판 좀 열어달라고 하고.”
“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관들은 우르르 내려갔다.
수졸 몇이 낑낑 거리며, 천장을 가리고 있던 갑판을 떼어내 받침대를 만들었다.
뭔 받침대냐고? 말이 바로 밟고 올라갈 수 있는 받침대다.
밧줄로 튼튼히 고정하고, 누워서 쉬고 있던 말들도 모두 일으켜 햇빛을 받게 했다. 여기저기 주물러주면서 몸도 풀어주고.
다들 푸르릉 콧김을 뿜어내며 흥분하긴 했는데, 그래도 기수들이 옆에 찰싹 붙어서 쓰다듬어주니 애써 버티는 모습이다.
“윤현. 연전위.”
“예. 어르신.”
“무장을 준비해라. 어셈블리 아머.”
“넵!”
시대초월적인 영어를 듣거나 말거나, 둘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준비했다.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리는 물건. 바로 건틀릿이다.
“오...?”
“그건 뭡니까?”
사실 장갑이라는 게 그리 신기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게 쇠로 만들어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아. 이것은 연오랑 강철장갑이라는 것이다.”
‘또 연오랑이냐!’
‘뭐만 하면 다 연오랑이냐!’
속으로는 ‘제발 자기자랑 좀 그만해라.’라고 소리쳤지만, 눈은 계속 반짝거렸다. 딱 봐도 무지하게 비싸 보이는 물건 아닌가.
“니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거 다 팔아도 못 사. 욕심내지 마라.”
연오랑은 탐욕스런 눈빛을 숨기지 않는 이들을 가차 없이 떨쳐냈다.
‘아니. 아저씨도 그럴 거요?’
박홍신마저도 눈이 돌아간 모양.
갑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 데, 옆에 와서 대체 그건 뭐냐고 계속 캐물었다. 물론 그 속내는 그거 혹시 자기도 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지만.
한마디로 딱 잘라 낸다.
“장군님. 이거 파는 겁니다. 관심 있으면 사서 끼시죠. 집안 기둥뿌리 하나 정도는 뽑힐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게다가 활 쏘는 것도 힘듭니다.”
“허허.”
‘우리 사이에 이러기인가!’ 하고 바라보지만, 연오랑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강철장갑을 내려놓고, 풀어 헤쳤던 갑옷을 꽉 조여매고, 기병군화에는 각반까지 장착완료. 그리고 마지막 대미. 박홍신이 기겁할 짓을 저질렀다.
“헙! 어... 어!?”
뭐랄까. 말은 하긴 해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잊은 모습? 너무나 전형적인 표정이라서 이젠 익숙하다 못해 지겹다.
연오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투를 풀어버리고서, 이상하게 생긴 천으로 머리를 꽉 덮었다.
상식파괴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자, 박홍신과 수졸들은 “어? 어...? 그거 그러면 안 되는데?”하는 눈빛을 뿌려댔다.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니다. 연오랑만 그럴까? 윤현과 연전위는 재빠르게 따라했고, 무관들은 죽는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상투를 풀어 헤졌다.
풀어헤친 머리에 뒤집어 쓴 건 보자기. 정확히 말하면 머리에 쓰는 골무 같다. 목 뒤로 내려오는 목끈을 앞으로 당겨 메고, 귀 옆으로 떨어지는 턱끈을 조였다.
목을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딱 맞춰 묶는 게, 어째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아니...”
무슨 질문을 할지 뻔히 아는 터라, 박홍신이 입을 열기 전에 연오랑이 먼저 무관을 지적하며 물었다.
“너. 왜 그러고 있냐?”
“말을 탈 때, 훨씬 편해서 그렇습니다.”
“...”
연오랑은 “됐죠?”하는 표정으로 박홍신을 바라봤다.
사실 무관들이 하고 싶어서 했겠냐. 의문의 시작은 단순했다.
“아니. 윤현은 우리보다 말을 훨씬 오래타고 거칠게 타는데, 왜 얼굴이 멀쩡하지?” 하여 물어본 결과?
짜잔. 상투를 풀고 이상한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결국 다들 처맞고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하게 됐다.
이걸 만든 건 당연히 연오랑.
21세기의 그가 상투에 익숙해졌을까? 전혀 아니올시다.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샴푸도, 비누도 없어서 미칠 지경인데, 상투까지 하려니까 짜증대폭발이다.
안하면 안 되냐고? 그게 되겠냐. 상투 없이 다니면 쌍놈 취급을 받는데?
21세기 사람이자 조선의 소드마스터로서, 자존심과 자존감, 우월감, 오만함이 하늘을 뚫고 우주까지 찌르는 연오랑이다.
그런 그가 조선 사람에게 쌍놈 취급을 받는다고? 그날로 조선 최흉, 최악의 살인마가 탄생할 거다.
하여 아침마다 매일 시발시발 욕을 입에 달면서 상투를 틀었다.
문제는 또 생긴다.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 상투가 무지하게 신경 쓰였다. 정수리에 오뚝이가 매달려서 대롱대롱 흔들리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아무리 꽉 조여매고 별 지랄을 다해도, 결국 타다보면 머리칼이 마구 흘러내려 땀범벅이 된 얼굴에 달라붙었다. 미칠 지경이다. 진짜.
그래서 “대체 상투를 틀고 어떻게 싸운 거지?”하고 몇 번 구경했더니... 에라이. 쓸모없는 놈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참더라. 아니면 체면 차린다고 격하게 안 움직이고 있다.
정말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양반 십선비들이다.
하여 연신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낸 게, 중세기사들이 사슬투구 안에 쓰던 패딩 코이프다. 거기에 방탄헬멧의 턱끈구조, 동양의 두건을 합쳐서 만든 게 바로 이 작품.
이름은 연오랑 마상건馬上巾이라 명명했다.
솔직히 말하면, 사실 상투가 짜증나서 반발심에 만든 측면도 있다.
“다들 잘 때 상투 풀잖아요. 아닙니까? 상투를 잘라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떻습니까? 사는 게 우선이지, 상투가 우선입니까? 죽으면 효도도 못합니다.”
“크흠...”
궤변 같은데, 듣다보니 또 말은 된다.
박홍신은 따끔하게 뭐라 해야겠는데, 말문이 턱턱 막혀서 결국 헛기침만 하고 말았다.
“그런가?” “아닌 거 같은데...?” “말은 되잖아?” 수병들이 소곤소곤 나누는 소리에, 그저 이마를 감싸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연오랑과 함께 있으면 정말... 세상의 근본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다. 이 자식은 진짜 양반이 맞나 싶다. 사대부 체면을 다 까먹는다.
잠깐의 소동 아닌 소동이 지나가자, 드디어 긴장감이 몰려온다.
저기. 이제 서로가 눈에 보이는 자리까지 다가왔다.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와 개미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
원정군 사령부가 내린 결론은 뭐냐고? 반반무많이다.
먼 바다에서부터 삼군으로 나눠서 움직이는 건 불가다. 지금의 숙련도로는 동시타격이 불가능했다.
그럴 만도 하다. 전화가 있나 뭐가 있나. 쾌속선을 뿌리고 어쩌고 해도, 결국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이 나왔다.
땅 위라면 뭐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여긴 바다 아닌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계속 위치가 바뀌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여 쌈싸먹기 공격을 포기하고, 아소만으로 들어가서 주요거점도시 3곳을 각자 타격하는 걸로 바꿨다.
연오랑이 의도한 대로. 삼군이 최소한 다른 군과 비교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피터지게 싸워야 하는 거다. 다행히 원래 역사에서처럼 제비뽑기 같은 이상한 짓은 안 하게 됐다.
두지포는 우군이 치고, 그러는 동안 중군은 훈내곶으로 곧장 진격. 좌군은 니로군으로 곧장 진격하는 걸로 바꿨다.
그 후. 우군은 아소만 남쪽을 훑으면서 계지까지 육로로 진격. 중군은 훈내곶에 상륙 후 바로 아래에 있는 계지를 파괴.
그렇게 우군과 중군은 계지에서 합류해 요라까지 진군.
좌군은 니로군을 파괴한 후, 다시 배를 타고 훈내곶으로 이동해 진채를 세우고 수비하기로 했다.
연오랑의 초토화 작전과 원래 역사의 작전. 그 중간쯤 되나?
그렇게 중군과 우군이 요라까지 폭파시키고 나면? 그땐 다시 훈내곶으로 회군해 좌군과 합류해서 상황을 보기로 했다.
아소만을 다시 빠져나와서 해안도시를 공격하든지, 아니면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든지 말이다.
아쉬운 건 역시 대마도주가 있을 게 유력한 좌하를 직접 공격하기 힘들다는 점.
훈내곶에서 좌하까지의 거리보다, 요라까지의 거리가 더 가깝고 길도 좋아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차선책으로 “우리도 왜구가 하는 것처럼 훈내곶에 배를 올리고 건너가자!” 라는 계획도 짜봤는데, 그건 도착해서 강의 상황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즉. 원래 역사에선 기습적으로 퍽! 한방 치고 “이제 항복해라!”하는 거면, 지금은 퍽퍽퍽퍽! 네 방을 갈겨주고 “이제 항복해라!”하는 거다.
그래서 연오랑은? 중군이 아닌 좌군 선봉대에 속해서, 니로군 포구를 향해 위풍당당하게 가는 중이다.
중맹선 10척에 가득 찬 특전대와 그 뒤를 따르는 좌군의 수십척의 배.
아소만 안에 들어온 탓에 속도는 더욱 줄었고, 격군과 약한 바람을 타고 배는 느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계획이 바뀌었는데, 연오랑이 왜 또 선봉대에 소속되어 있냐고? 반반무많이 계획을 들은 연오랑은 다시금 딜을 걸었다.
“좋습니다. 만약 제가 니로군에서 공을 세우면, 저에게 상현을 공략할 권한을 주십시오.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다들 “에휴. 또 지랄이네. 끈질기네.” 하는 표정으로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좌군은 니로군 파괴 후 훈내곶에서 진채를 만들고 대기해야 하니, 병력 일부를 빼도 괜찮다고 판단한 거다. 또한 대마도주가 좌하에서 지원군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런데 특전대로 인해 상현이 어지러워지면? 대마도주는 얼마 없는 병력을 또 쪼개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건, 공을 세운 다음의 일이지만... 연오랑은 천하태평이다.
“후흡.”
심호흡을 하고 말 위에 올라탄다.
긴장감? 두려움? 떨림? 전혀 없지.
왜구가 아무리 무서워봐야 호랑이보다 무서울까. 오히려 고양감과 흥분이 몸을 지배한다.
쿵쿵거리는 심장에서 뿜어 나오는 피가 미친 듯이 돌며 온몸을 뜨겁게 달궜다. 이제 곧 칼. 아니 뚝배기 학살자를 휘두를 생각에 벌써 즐거워진다.
사람 죽고 죽이는 거? 말하지 않았나. 그런 건 이미 옛날에 극복했다. 애초에 별로 신경도 안 썼고.
꼬꼬마 시절에도 도적놈들을 쫓아서 지리산 반대편까지 추적해서 사냥했는데, 이제 와서 피를 보는 게 두려울까.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다.
연오랑. 진짜 중세조선인 다 됐다.
“흠...”
그는 갑판 위로 슬쩍 얼굴만 내밀고서 포구를 살폈다.
왜구의 집결지는 비록 두지포지만, 모든 배가 다 그곳으로 몰리는 건 아니다. 당연히 니로군 포구로도 돌아오기 마련.
원래 역사에선 두지포에 상륙할 때, 왜구들이 자신들의 동료가 요동에서 돌아온 줄 알고 술과 고기를 놓고 환영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과연 여기는 어떨까?’하고 지켜보니... 어째 원래 역사랑 비슷해 보이네? 마을사람들이 다 나와서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포구 근처에서 웬 가마솥을 끓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 만에 들어섰을 때부터 준비한 듯? 연기가 풀풀 간지럽게 피어나오고 있다. 배가 오는 걸 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부르러 가는 놈도 보였고.
이놈들은 정말. 조선이 쳐들어 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