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챕터6. 출정하다 (3)
“기승騎乘!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내 뒤만 바짝 쫓아와라. 활은 필요 없다. 뚝배기 학살자만 들어라!”
“옙!”
말 위에 올라탄 연오랑의 말에, 무관들 모두가 편관을 옆구리에 끼고 소리쳤다.
손님이 저렇게 전의를 끌어올리는데, 집주인이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지.
“노를 더 힘껏 저어라!”
괜히 흥분해 보이는 박홍신의 명에, 수졸들은 더욱더 힘껏 노를 젓기 시작했다.
포구에 가까이 올수록 천천히 조심스럽게 붙는 게 정석. 헌데 어째 더 빨리 오는 것처럼 보여 왜구가 당황하는 것 같았다. 포구가 갑자기 부산스러워지더니, 놈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으니까.
이제 서로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몇몇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맹선과 왜선이 비슷하게 생겼어도, 맹선이 조금 더 크고 둔탁하니까. 배의 형태가 확실히 분간되자, 자기들 배가 아닌 걸 이제야 알아차렸나 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쿠쾅! 연오랑을 태운 배는 나무로 만들어진 선착장 옆구리에, 정확하게 자신의 옆구리를 붙이며 격하게 멈춰 섰다.
“돌격!”
“하!”
“이럇!”
푸히힝! 거친 충격과 함께 전마는 콧김을 힘차게 내뿜었고, 옆구리를 쑤시는 느낌에 앞발을 들기 무섭게 나무선착장으로 튀어나갔다.
두두두. 선착장은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 흔들렸고, 연오랑의 뒤를 따라 일렬로 무관들이 꼬리를 물었다.
“아악!”
“괴... 괴물이다!”
“조선군이다!”
괴물? 하긴 왜구가 언제 이렇게 큰 말을 봤겠냐.
왜어로 마구 소리치며 도망가는 마을사람들은 그냥 버려두고, 실개천 같은 강을 따라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머지는 뒤따라오는 특전대가 알아서 처리할 터, 지금은 중심으로 가는 게 우선이다.
“히앗!”
괴음과 함께 속옷만 입고 있던 왜구 하나가 소리치며 달려온다. 뭔 깡으로 맨손으로 기마한테 덤비는 걸까?
‘뭐야. 이 새끼는?’
연오랑은 땅에 떨어진 돌멩이를 치듯 편곤을 휘둘렀다.
휘익! 땅에 부딪치듯 날아가던 편곤은 순식간에 반원을 그리며 날아올랐고, 퍽! 왜구는 일격에 아래턱이 박살나 피분수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역시 뚝배기 학살자답다. 진짜 한방이다.
“하! 막아라!”
“저쪽이다!”
바지춤을 추스르며 오는 놈들, 퍼질러 자다가 나왔는지 봉두난발인 놈들, 신발도 없이 맨발에 달리는 놈들. 그야말로 거지떼 그 자체다.
아직 촌마게가 유행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죄다 제멋대로인 머리칼을 하고 있다.
휘릭!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놈을 전마의 가슴으로 들이받고, 쓰러지는 놈에게 가볍게 꿀밤을 한방. 퍽! 머리가 깨지며, 뇌수가 사방으로 튄다.
휘릭! 옆에서 창인지 작살인지 모를 뭔가를 들고 달려드는 왜구. 놈에게 편곤을 쓱 휘둘러 놈의 창을 거세게 후려쳤다.
“어어...”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나간 창은 옆에서 뛰어오던 왜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횡으로 스치고 지나갔던 편곤이 어느새 한 바퀴 돌아 쓰러진 왜구의 뒤통수에 작렬.
퍽! 머리통이 깨지는 동시에, 턱이 땅에 처박히며 이빨이 다 튀어나왔다.
휘릭! 내리쳤던 편곤은 이번엔 승천. 쓰러졌다가 일어서는 옆 왜구의 턱을 깨자, 왜구는 그대로 허리가 휘며 뒤로 쓰러졌다.
“핫! 뭐야 이게. 두더지 게임이냐?”
연오랑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하면서, 쥐불놀이하듯 편곤을 빙빙 돌리며 왜구를 짓밟았다.
그야말로 순식간.
붕붕붕. 바람소리가 세 번 나더니 첫 번째 무리가 쓰러졌고, 휙휙휙. 다시금 바람소리가 세 번 나더니 속옷만 입고 있던 두 번째 무리가 쓰러졌다. 퍽퍽퍽. 묵직한 소음이 세 번 나더니, 칼을 들고 있던 왜구 셋이 눈구덩이가 깨져 눈알이 비산했다.
“...?”
“에에...?”
연오랑의 앞을 막으러 뛰어오던 왜구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
눈으로 보기는 봤는데 머릿속에 읽혀지지 않는다. 봤는데 기억이 없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라는 표정으로 그저 연오랑의 돌격을 보고만 있었다.
“허...!?”
“이게...?”
오히려 이해한 건 연오랑의 뒤를 따라오던 무관들.
무관들은 연오랑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살벌할 줄은 몰랐다.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다.
동시에 연오랑이 편곤을 보고 왜 자꾸 뚝배기 학살자라고 불러댔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깨달았다.
깨달았으면 실천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무기를 든 놈은 모조리 죽여라!”
“하압!”
“이이얍!”
멈춰 섰던 왜구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는 연오랑의 뒤로, 무관들의 편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가 말한 그대로다. 힘 줘서 칠 것도 없다. 그저 땅에 박힌 돌멩이 빼듯. 머리를 흔드는 벼이삭을 베듯. 휙휙! 팔을 돌려 편곤을 휘두를 때마다, 뚝배기 학살자는 자신의 이름을 붉게 새겨냈다.
무관들은 정신줄을 놓고 있던 십여명 왜구의 뚝배기를 깨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 시대의 일본은 아직 전국시대처럼 싸움에 미치지 않았다.
남북조시대가 열려 싸우긴 했다지만, 그건 왜국본토에서나 벌어진 일이다.
왜구가 급증해서 대마도로 몰려온 이유가 뭔가. 이곳은 그 싸움에서 비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벌써 몇 십년전 일이고.
물론 대마도 내에서도 지들끼리 권력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래봐야 사람도 몇 명 안 되는데, 얼마나 거창하게 싸웠겠는가.
사무라이들 수십명, 왜구들 수백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싸우는 정도지.
21세기 사람들이 아는 일본군의 모습이 된 건 전국시대 이후다. 그리고 백년 넘게 진행된 전국시대가 시작하려면 앞으로 오십년은 더 남았다.
그 말은? 공성하기 더럽게 까다로운 일본성이 아직 없다는 뜻.
그럼에도 산성은 존재했는데, 평상시에는 무사들이 평지 저택에서 머물다가 위급상황이 되면 산성으로 도망갔다. 그러니 이 자식들이 도망가면 말짱 꽝 아닌가.
하여 그는 마을에서 가장 중심이자, 가장 큰 저택이 있는 곳으로 냅다 달리는 중이다.
지문에게 니로군을 다스리는 가신의 저택이 어딘지 미리 들었단 말씀! 목표는 그자를 잡는 거다.
나머지는 특전대와 좌군 본대에게 맡긴다.
그나저나... 하도 왜구, 왜구 그래서 조선군에 비교해서 뭔가 다른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거야 원... 무관 수준도 못되지 않나.
‘아닌가? 내가 조선무관을 너무 무시했나?’
사실 이게 정답이다. 연오랑의 기준이 소드마스터라서 그렇지,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초기 무관은 약한 수준이 아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친절하게 비교 대상이 등장했다.
마을주민이나 외지인 왜구가 아니라, 니로군을 다스리는 가신의 무사가 등장한 것.
“오오! 드디어 사무라이 등장? 내가 게임 속에서 니들 때려잡은 게 수만명은 될 걸? 흐흐”
연오랑은 게임과 영화 속에서나 보던 무사를 보며 씽긋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만났다. 그 유명한 사무라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칼질 한번 볼까나?
“...!”
하지만 그건 그의 감상이고, 황급히 갑옷을 챙겨 입고 나온 무사는 기겁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얼굴이지만, 그게 더 괴기스러울 따름.
덩치 큰 말에 탄 거인을 보며 겁을 집어먹은 듯, 자신 있게 달려와선 덤벼들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매의 눈으로 무사를 살폈다.
조선이나 중국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갑옷. 철편을 얇고 빼곡하게 이어붙인 형태다. 이른바 동환胴丸이라 불리는 물건. 그리고 일본갑옷의 트레이드마크. 투구 앞부분에는 역시나 높게 세운 투구장식을 붙여 놨다.
“뭔 병신 짓이냐 그게. 등신 같은 놈. 그런 걸 쓰고 싸우겠다고? 그게 무슨 아이템이라도 되냐?”
무사는 조선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뒤지면 못 알아듣는다.
쾅! 사각으로 비스듬하게 날아온 편곤의 자편이, 무사의 관자놀이를 후려쳤으니까.
“그딴 걸 쓰고 있으니까 빨리 못 움직이지.”
피식. 비웃으며 몸을 돌리는 찰나.
‘온다!’
찌릿! 예민한 감각이 위험을 감지했다.
이미 수도 없이 경험한 느낌. 호랑이를 때려잡을 때 매번 느끼던 그 감각. “무예의 달인” 효과가 발동해, 옆에서 날아드는 화살이 느껴졌다.
화살로 잡으나, 함정으로 잡으나, 칼로 잡으나, 어차피 호랑이를 잡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힘들고 위험하게 칼이나 창으로 때려잡았을까? 바로 이 감각을 살과 뼈와 뇌에 새겨 넣기 위해서다.
그 개고생한 보람이 아낌없이 드러났다.
보이지도 않건만 곧장 그는 허리를 비틀어 화살을 피했고, 그와 동시에 뇌신으로 변신해서 번개를 뿌렸다.
“컥!”
말안장 옆에 빼곡하게 꽂아놨던 투창을 집어던져, 무사의 목을 한방에 뚫어버렸다.
“흥. 건방진 새끼. 감히 어디서 화살을 쏴?”
무사는 그가 화살을 피할 거라고 생각 못했는지,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봉변을 당했다.
“와아아!”
“죽여라!”
“감히! 어르신을!”
에라이. 아까 그놈이 차라리 낫다.
칼 들고 설치지 말고 멀리서 화살이나 쏠 것이지,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달려드는 걸까? 쉭쉭! 연오랑은 재차 번개를 두 방 뿌려, 달려오던 무사 둘의 뱃가죽에 구멍을 냈다.
1미터 정도 되는 짧은 투창. 명칭은 당연히 연오랑 사냥창이다.
활을 쓰는 게 투창보다 훨씬 낫겠지만, 강철장갑을 끼면 활을 쏘기가 힘들다.
동양에서는 활시위를 손가락으로 당기는 게 아니다. 그러면 한번 당길 때마다 엄지손가락이 찢어질걸? 이건 장갑을 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깍지라고 하는, 엄지에 끼는 반지처럼 생긴 물건이 낀다.
한쪽이 살짝 튀어나온 반지. 이 튀어나온 부분이 안쪽으로 향하게 해서 엄지에 끼고, 그 튀어나온 부분에 시위를 걸어 당기는 거다.
문제는 강철장갑을 낀 상태에서 깍지를 낄 수가 없다는 거다. 만약 낀다고 해도 깍지가 너무 커서, 다른 무기를 쥐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하여 이 사냥창을 만들어 투창대신 써먹기로 했다. 원거리에서 공격할 무기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앞을 무겁게 해서 파괴력을 높였고, 뾰족한 촉은 갈고리마냥 뒤로 벌어진 미늘이 달려있다. 억지로 뽑아내면 아마 살가죽이 다 뜯겨질걸?
저기 증거가 보이지 않나. 호랑이를 잡으려고 만든 물건을 사람이 맞았는데 멀쩡하겠나.
당연히 무사 둘은 맞자마자 나동그라졌다. 배에 박힌 걸 뽑지도 못하고 죽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나머지도 곧 저승으로 뒤따라간다.
순식간에 질주해온 전마가 무사 하나를 가슴팍으로 밀어냈고, 그 틈으로 파고들어 좌우로 번갈아가며 편곤을 내리쳤다.
퍽퍽! 정수리가 투구 째로 움푹 파여 키가 줄어들고. 퍽! 가까이 붙은 무사는 편곤을 역수로 잡고, 모편에 달린 뾰족한 망치머리로 얼굴에 구멍을 내줬다.
얼굴을 맞고 튕겨 나온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뒤로 눕혀 편곤을 크게 휘두르자, 퍽퍽! 뒤와 옆에서 달려들던 무사 또한 투구가 휙 돌아가며 목뼈도 함께 돌아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나름 무사라는 것들이 역시나 한칼. 아니. 한 뚝배기를 못 버틴다.
연오랑이 그렇게 몰려온 무사를 때려잡을 때.
뒤따라온 무관들은 둘로 나눠서 저택을 담벼락을 따라 돌며 무사와 잡인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당연히 윤현이 있었고, 다른 한조에는 연전위가 있었다.
연전위는 대마도 왜구에게 부모와 친구를 잃지 않았나. 하여 자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식한 피보라를 일으켰다.
그나저나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무관들의 인정을 받을 줄이야? 과연 전설장수답다.
작전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