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5화 (25/538)

25. 챕터6. 출정하다 (4)

“같잖은 놈들. 등차랑 어딨냐!”

연오랑은 열심히 익힌 왜어를 마구 소리치며, 다다미방을 말발굽으로 마구 헤집고 다녔다.

쾅쾅! 말을 탄 상태로 편곤으로 문을 다 때려 부수며 저택 안을 휘저었지만, 어째 다 죽거나 도망간 모양?

하지만,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오자. 처음에 죽은 놈과 두 번째로 죽은 놈 옆에 식솔들이 모여 있었다.

몇몇 되지도 않는데, 옷차림을 보아하니... 저택 주인의 혈족인 모양이다.

“등차랑 어딨냐?”

싸늘한 말에 눈물범벅이 된 여인네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터져 죽은 놈을 바라봤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뭐야. 처음에 죽었어? 대마도주의 가신이면 칼질 좀 하는 거 아니었냐?”

그가 왜어로 중얼거리자, 여인네 품속에 있던 꼬마가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울먹거려서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죽인다니 뭐니 하는 거 같다.

‘이런 수준 낮은 격장지계에도 속으면 어떡하니.’

역시 얘들은 등차랑의 가족이 맞는 모양이다.

“영화에서 보면 말이야. 꼭 이런 상황이 나오더라고. 근데 보통은 베드엔딩이지. 착한 주인공이 인정을 베풀어줬는데도, 은혜를 잊어버리고 복수하더라고.”

시대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데, 알아들을 리가 있나. 왜어로 말하고 있어도 뭔 뜻인지도 모르리라.

“그런 면에서 난 착한 놈이 아니고, 후환을 남겨두는 인정 많은 사람도 아니란 말이지?”

연오랑은 이들을 보는 순간 이미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21세기 현대인은 이미 없다. 15세기조선인이 된지 너무 오래됐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 너희 같은 가신이나 무사가 남아 있으면, 포로가 된 마을주민이 반항한단 말이지. 너희가 구심점이 된다는 거야. 아. 말이 너무 많았다. 영화에서 보면 꼭 이렇게 중얼중얼 거리다가, 방심해서 골로 가더라고.”

연오랑은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선, 사정없이 편곤을 휘둘렀다.

퍼퍼퍽! 망설임도 없이 등차랑 일족을 한날한시에 보내줬다.

니로군을 통치하는 등차랑의 저택을 박살낸 후. 연오랑과 무관은 저택 근처의 큰 가옥을 골라 박살냈다.

왜국이나 조선이나 마찬가지다.

뭔가 끗발 있는 이들은 부자가 맞는 모양? 골라서 찾아간 곳은 무사나 상인 사는 집이었고, 죄다 뚝배기를 날려줬다.

이들이 니로군의 머리를 박살내고 있을 때. 특전대원들 또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오랑의 뒤를 이어 곧장 상륙한 특전대원은 마을주민은 무시하고 일단 달렸다. 이미 상륙하기 전에, 더 정확히는 거제도에서 출정하기 전부터 해야 할 일을 들었다.

마을주민을 처리하는 건 본대가 하는 일이다. 특전대는 마을 주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최대한 빠르게 길목을 차단하는 일.

이미 도망간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수를 최대한 줄인다.

그게 최우선 목표였고, 3분대로 쪼개진 이들은 지문(항왜길잡이)를 따라 냅다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훈련한 걸 잊지 않는다.

“어아아아!”

“죽어라!”

건물을 돌아 나와 어설픈 담벼락을 따라 달리고 있자, 저 옆에서 왜구들이 달려왔고.

“왼쪽! 준비!”

차착! 알아서 몸이 반응해 창수들은 창을 들고 전열을 만들었고, “쏴!” 발맞춰서 달리던 궁수는 순식간에 몸을 돌려 자세를 잡고 화살을 날렸다.

퍼퍼퍼퍽! 갑옷도 없는 왜구가 화살비를 뭔 수로 피할까.

십여명의 왜구는 단발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죄다 쓰러졌다.

“이동!”

훈련 성과에 따라 조장이 된 이가 소리치자, 이들은 확인사살조차 하지 않고 다시 달렸다.

왜구들 몇 죽이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길목을 막고 주민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게 우선.

뭉그적뭉그적 거렸다가는 분명 연오랑에게 두들겨 맞을 거다. 훈련 때도 그렇게 살벌하게 후려 팼는데, 실전에서 실수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싫다.

그렇게 길목을 막은 이들은 배운 대로 움직였다. 좁은 산길을 가로막고 비탈에 아랑곳 하지 않고 넓게 퍼졌다.

3인1조로 하나가 되어, 거리를 두고 퍼져 포위망을 만들었다.

이들이 연오랑에게 배운 왜어는 단 두개. “항복해라.” “멈춰라.”

연오랑은 이 말을 듣고도 움직이는 자는 무조건 사살하라고 했다.

그리고 특전대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애초에 이들은, 오기 싫은데 억지로 원정군에 끌려온 게 아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왜구에게 한이 맺혀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복수의 기회와 복수할 능력을 준 연오랑을 신뢰하고 공경했다.

그리하여 한 점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수행했다.

산을 넘고, 길을 넘어 도주하려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쓰러뜨렸다.

싸움은 이내 곧 끝났다.

연오랑 일행이 머리를 후려쳤는데, 몇몇 남아 있는 왜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선발대가 내리기 무섭게 곧장 본대가 들이쳤고, 본대는 계획대로 움직였다. 원래 역사에선 왜구를 죽이고, 포로로 잡고, 가옥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삼군은 동시에 3군데를 치고 있다. 비록 시간차가 있어서 전투가 끝난 곳도, 이제 막 시작하는 곳도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사실을 최대한 늦게 알리는 게 중요한 일.

하여 마을주민은 사정없이 포로로 잡았지만, 가옥을 불태우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 좁은 대마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면 못 알아 볼 리가 없으니까.

“어...”

“아악!”

“어이쿠!”

연오랑 일행이 죽은 등차랑의 목, 그리고 등차랑의 아비의 목을 들고 등장! 사방에서 연거푸 감탄과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살아남은 하인이 알려줬는데, 그에게 화살을 쏜 인간이 등차랑의 아버지란다. 아마 등차랑이 단박에 죽어서 당황했었나 보다.

피와 뇌수가 묻은 편곤을 휙휙 돌리며 나아가자, 포로로 잡힌 주민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역시 무력시위는 먹혀든다. 지금은 공포로 짓누르는 게 최고다. 당근을 주는 건, 주민들이 더 이상 뒤가 없다고 생각할 때 줘야 효과만점이지.

“허...?”

“저거 설마!?”

“역시 미친놈이라는 소문이 진짜 였나봐.”

피 묻은 전마를 타고 늠름하게 나아가자, 포로를 챙기고 있던 정군들이 웅성거렸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표정은 환하게 웃고, 움직임은 자신만만해졌다.

거봐. 나약한 조선군도 피맛을 한번 보기 시작하면 된다니까?

임진왜란 때 봐라. 처음에는 속절없이 얻어맞았지만, 가면 갈수록 싸움질에 익숙해져서 후반기에는 근접전을 붙어도 안 밀렸다고.

아무튼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탓인지, 정군들의 표정도 매우 밝았다. 지들이 생각해도 대승이니까.

엉덩이 무거운 지휘관이 있는 곳에 다다라, 연오랑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장군, 영감, 대감 어른.”

귀찮아서 직급은 생략. 딴 생각 못하게 곧장 본론으로 직행한다.

그들이 바라던 걸 성큼 건네줬다.

자. 받아라. 등차랑의 목이다.

“오...!”

“정말 해냈군!”

솔직히 한 것도 없으면서 기쁘긴 정말 기쁜 모양? 박실은 누구보다 빨리 와서 그를 반겼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쟤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엄청 하던 양반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이 인간아. 네가 여기서 삽질을 한 건 알고나 있냐?’

연오랑은 속마음을 숨기며 웃고 말았다.

유습은 “과연 연씨 어르신의 손자구만!”이러면서 덩달아 웃고 있었고.

역시 자기 목이 달린 문제라서 그럴까? 원래 역사에서와 달리, 상륙도 전부 함께하고, 군졸을 다그치며 왜구를 때려잡았나보다.

“전장 정리는 되셨습니까? 인원파악은...?”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묻는 것 같아보여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하하! 대승일세. 대승!”

기다렸다는 듯이, 상륙작전을 맡았던 박홍신이 함박 웃으며 알려줬다. 이 아저씨는 또 어디서 배웠는지, 그에게 엄지척 따봉을 연신 날리며 자랑하는 게 아닌가.

무려 왜구 213명 사살. 포로가 무려 1641명. 나포선박이 73척. 구출한 포로는 조선인11명, 중국인23명이다.

특전대와 연오랑이 선봉에 서서 머리를 무너뜨리니, 원래 역사와 달리 마을주민이 산으로 도망을 못간 것이다.

아군 사상자? 한 십여명 정도? 근데 왜구와 싸우다 다친 게 아니다. 상륙을 빨리하라고 독촉받자, 지들끼리 물에 빠지고 넘어져서 다쳤단다.

‘역시 예상대로군.’

연오랑 또한 숨기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기대했던 대로 원래 역사의 기록을 한방에 깨버렸다. 니로군이 이런데, 두지포와 계지, 요라까지 친다면? 아마 조선역사에 다시없을 승전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이내 끝. 중요한 일이 남았다.

“어르신.”

“오. 그래.”

연오랑이 유습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장하다는 표정이다.

“약조하신대로 왜구함선과 전리품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등차랑 일족이나, 죽인 왜구는 알아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흠... 그게”

‘이 양반이 어디서.’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다르다고.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연오랑은 은근슬쩍 말을 흘기는 유습을, 슬쩍 가자미눈을 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바라봤다.

“전투는 이제 시작이지 않습니까? 특전대가 선봉대로서 활약했으니, 저를 주장으로 삼아 전과를 확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다른 무관들도 함께 공을 세워야지요.”

‘상현의 다른 마을도 공격할 건데, 거기에 껴서 공을 더 안 세울 거냐? 나 이렇게 잘 싸우는데, 안 보내 줄 거야? 조잔하게 굴지 말라고.’

연오랑은 속마음을 애써 숨기고 돌려 말했다.

조정에서 오래 구른 양반답게 그 속뜻을 알아차린 걸까?

유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공신이다. 벌써 머리칼이 하얗게 변한 노인이 되었지만, 옛 기억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이를 먹을수록 추억은 짙어지기 마련이니까.

사실 유습이 연씨와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연씨와 친분이 있는 대신은 단연코 없다.

연씨는 타인과의 관계에 무관심했고, 오로지 주어진 일만 재빨리 끝내고 항상 조용히 지냈다.

그렇다고 조정대신과 사이가 안 좋은 건 또 아니다. 뭐랄까... 그냥 친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데면데면한 관계랄까?

그 가풍은 연오진까지 이어졌고, 연오진 또한 선왕의 공신이 되어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조용히 낙향했다. 소란도, 분란도, 다툼도 없이 그냥 원래 없던 것 마냥 조용히 사라졌다.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인가. 그 시절 중년 유습은 “흠. 연씨는 여전하구만.”하고서 그냥 혀를 한번 차고 잊어버렸다.

게임 속 배경설정이 현실로 구현되면서 이렇게 된 거니, 유습이 그 까닭을 짐작이나 할까. 그저 “연씨는 참 욕심이 없구만.”하고 가볍게 넘겼을 뿐이다.

그랬던 연씨가 지금 다시 눈앞에 등장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객기를 부리는 줄 알았으나, 하는 짓을 보니 마냥 허풍은 아니었다.

하여 옛 연씨를 떠올리며 기회를 주자는 게, 그와 이종무. 다른 노장들의 의견이었다.

헌데 너무나도 정확하고,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여줬다.

한참을 잊고 있었던 옛 기억. 그가 막 관리가 되어 풍운의 꿈을 품고 있을 시절.

그 때 태조대왕 옆에서 칼을 휘두르던 연오랑의 할아버지. 연천후는 그야말로 투사鬪士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연천후조차 지금의 연오랑과 비교할 수 없다.

막연한 추측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엄연히 다른 법.

‘호랑이를 50마리나 잡았다고? 흐음. 글쎄?’라고 생각했던 유습은 말 그대로 충격을 먹었다. 이런 일기당천의 장수가 또 어디 있을까.

설령 계책이 미숙하더라도, 일신의 무용만으로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결국. 유습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연오랑과의 약속을 지켜도 손해 볼 건 없다고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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