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6화 (26/538)

26. 챕터6. 출정하다 (5)

“그렇게 하거라. 약속은 지켜야지. 암.”

그리 말을 하고선 박실과 박초를 불러, 약속을 이행하라 시켰다.

이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바로 옆에서 못본 척 편곤에 묻은 피를 쓱쓱 닦는 연오랑을 보며 동의하고 말았다.

그럴 일을 없겠지만, 말을 잘 못했다가는 뚝배기가 깨질 것 같다는 위협을 느껴서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 그럴걸?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내 곧 무관들 사이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원래 질 거 같은 싸움은 조용하고, 이길 거 같은 싸움은 개나소나 한몫 챙기려고 시끄러워지는 법.

이들 또한 손쉬운 대승을 맛보고 나니, 적극적으로 공을 세우고 싶어졌나 보다. 다만 더 과잉되기 전에, 연오랑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이끌어야 할 텐데, 저보다 품계가 높은 어른을 어찌 주사主使하겠습니까. 사정을 헤아려주시지요. 훈내곶에 진채를 세워 적의 본대를 막는 일이 더 급한 일이니, 적재에 맞게 용인하시지요.”

연오랑보다 높은 놈들은 부리기 힘드니까, 직급 낮은 사람만 붙여달라는 뜻.

“음...”

“하긴.”

사령관들이 동의하자, 장군급 인물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유습,박실,박초 입장에선 연오랑의 공도 자신의 공. 하급무관의 공도 자신의 공. 고급무관의 공도 자신의 공이다. 그런데 뭐 하러 귀찮게 분란을 일으킬까.

하여 계급상 연오랑 위로는 훈내곶으로 가고, 밑으로만 특전대에 붙었다.

그렇게 잘라냈는데도 무관만 백명에 정군은 무려 구백이나 됐다. 손쉬운 승리에 눈이 뒤집힌 고위무관들이 아낌없이 부하무관을 밀어 넣은 것이다.

다만 이들 실력을 믿을 수가 있나. 테스트를 하고 싶지만 방도가 없으니 엄포와 협박을 늘어놓는 수밖에.

명을 어기면 목을 처버릴 것이고, 따라오지 못하면 그냥 버리고 간다고 했는데도 끝까지 따라오겠다는 이들만 챙겼다.

더불어 왜선을 끌고 갈 기선군 오백을 따로 추렸다. 이 친구들은 다음번 마을을 박살내고 난 후. 전리품을 추려서 니로군으로 돌아오게 될 거다.

마지막으로 처리한 일은 뒤처리 과정을 마무리하는 것.

박홍신은 니로군에 남아, 연오랑이 보내는 포로 및 전리품 정리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좌군 본대는 포로를 전부 끌고 훈내곶으로 향했고, 박홍신과 그의 부하들은 집안의 밥그릇, 젓가락까지 탈탈 털어 왜구함선에 실었다.

연오랑이 하나라도 빠트리면 뚝배기를 깨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은 터라, 그보다 계급 높은 무관은 몰라도 병사들은 감히 전리품을 챙길 생각조차 못했다.

방금 전에 왜구들 머리통이 깨진 걸 보지 않았나.

병졸들은 연오랑. 그 미친놈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뚝배기를 깨버릴 인간이라고 믿었다.

항왜를 길잡이 삼아, 연오랑은 거침없이 북진했다.

니로군에서 징발해 온 말은 백여필. 녀석들의 등에 이런저런 장구류를 올려놓고 끌고 갔다.

제주도 조랑말과 비슷한 크기의 녀석인데 산을 잘 탄다고 해서 냉큼 데려왔다. 대마도의 재래종이라나? 생각보다 힘도 세고 온순해서, 대마도에서는 여인이나 아이들도 부담 없이 짐을 옮기는 데 쓴다고 했다.

싹싹 다 긁어서 하동으로 가져가기로 마음먹은 건 물론이다.

얘들을 왜 끌고 가냐고? 다 생각이 있다.

다음 목표는 삼근(미네)이다. 니로군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1시진거리에 있는 마을. 대마도의 중심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 잠깐이나마 중심지였던 곳이다. 그만큼 뭐가 많을 거다.

다만 고민된다. 분명 니로군에서 도망간 마을주민은 가장 가까운 삼근으로 도망쳤을 거다.

그러면 삼근을 다스리는 가신은 어떻게 움직일까? 구원을 올까? 아니면 지킬까? 그도 아니면 대마도주에게 갈까?

“니로군으로 오느냐, 아니면 좌하로 가느냐 인데...”

그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지도를 보며 고민하자, 모여든 무관들도 고민에 빠졌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삼근에서 좌하와 니로군으로 갈라지는 길목이 있냐?”

“음...”

이제는 조선식으로 상투까지 튼 항왜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이자도 니로군을 박살낸 연오랑을 보지 않았나. 눈도 못 마주치는 걸로 봐선 살짝 겁먹은 모습이다.

“적병을 못 찾는다고 안 죽인다. 못 찾으면 삼근을 초토화시키면 그만이다.”

“예. 장군...”

항왜는 연오랑의 직책을 몰라서,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고선 결국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길이 이곳이 제일 좋고, 이쪽으로 내려오면 중간에 꺾어서 좌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이 위쪽 길은 돌아가는 길이라서, 좌하로 가더라도 아래쪽 길보다 시간이 지체될 겁니다. 게다가 내려오는 길에 길전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병력을 더 모으기도 쉬울 겁니다.”

“흐음.”

연오랑은 어설픈 지도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들이 걸어온 길과 눈앞을 계속 가로막는 산과 오솔길을 살폈다.

대마도가 거지같은 땅이라고 했지? 길도 마찬가지다. 21세기에도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큰길조차 좁은 2차로다. 큰길이 아니면? 승용차가 겨우 지나갈 더 좁은 1차로지.

15세기인 지금은? 3열 혹은 4열로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그 양옆으로는 비탈이 있거나, 얕은 두덩이 있거나, 절벽이나 다름없는 강 또는 바다가 있거나.

뭐. 이런 거지같은 동네가 있냐.

“윤현.”

“옙! 어르신.”

“돌격대에 발이 빠른 이들을 골라 붙여 척후를 보낸다. 3인1조 알지? 거기에 돌격대원을 붙여라. 우린 구보속도로 길을 따라 전진할 테니, 속도를 맞춰 2리 앞에서 살펴라. 척후조는 4조를 보낸다.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명적을 쏘고, 적을 먼저 발견하면 즉시 와서 알리도록.”

“옙!”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뻔히 예상했는데 준비를 안했을까. 이미 이럴 때 써먹으려고 척후와 돌격대도 뽑아 놨다.

“...!”

“...?!”

나중에 합류한 무관과 기선군을 지휘하는 무관이 은근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연오랑이 원정군 사령부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 않나. 그래서 그런지, 연오랑이 싸움만 잘하는 애송이로 알았나보다.

‘이 놈들아. 내가 니들보다 산에서 더 많이 굴렀을걸.’

연오랑은 가볍게 미소를 삼키고선, 잔뜩 움츠려 있는 항왜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안내해라. 네가 말한 곳으로 가야겠다. 일이 잘되면 너도 전리품 받는 거 알지?”

“흐흐. 옙!”

항왜는 벌써부터 기분이 좋은지, 빠진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출발한다! 속도는 구보로!”

“옛!”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멈춰 섰던 대열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느긋하게 걷는 행군에서 벗어나 점점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대략 삼십분쯤 뛰다가 십분정도 걷고, 다시 또 뛰기를 반복.

니로군에서 삼근까지의 거리는 대충 10키로?정도 밖에 안 되는 터라 금세 미리 알려줬던 지점에 도착했다.

길잡이가 말해준대로 역시 북서쪽에서 내려오던 길이 남쪽과 동쪽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대충 200미터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다.

“음...”

“어찌할까요?”

“모여라.”

특전대 무관들은 재깍 모여들었고, 어쩔 줄 몰라서 머뭇거리는 합류무관들을 재촉했다.

‘뭐해 이 자식들아.’ ‘뒤지고 싶냐?’ ‘빨리 안 와?’ ‘다 같이 죽는 꼴 보고 싶냐?’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불렀다.

“부르면 바로바로 와라. 뒤지기 싫으면.”

“...”

“대답해라. 조용하게”

“옙!”

아니나 다를까 연오랑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은 아직 처맞질 않아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나보다.

그는 합류한 무관에게 뭐라고 하는 대신, 특전대 무관들을 노려봤다. “교육 똑바로 시켜.”라고 소리 없는 명령을 내렸고, 다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여명의 지휘무관이 머리를 맞대고 모이자, 땅바닥에 대충 지도를 그리며 설명했다.

“너희는 양쪽 비탈로 올라가 매복한다. 기병은 나와 함께 동쪽 길로 가서 대기한다. 기선군은 이 자리에서 포위망을 만든다. 비탈길을 올라 매복한다.”

“예.”

“너너너너. 너희는 말을 이용해서 우리가 온 남쪽 길을 막아라. 기선군의 포위망을 너희가 마무리한다.”

연오랑이 손가락으로 집어내자, 특전대 무관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너너. 너흰 적이 특전대 매복지를 완전히 지나가면, 불화살과 효시를 날리고 퇴로를 막아라. 그러는 동안 기병은 동쪽 길로 천천히 진입해서 돌격할 준비를 하도록.”

“엡! 넵!”

“우리가 보이면 너희도 공격하고, 만약 적이 남쪽 길로 빠져나가면 기선군이 공격한다. 그 전까지 기선군은 움직이지 않고 대기한다. 특전대는 적을 무리해서 쫒아가지 말고, 기병이 남쪽으로 가는 적병의 뒤를 치면 그때 기선군에 합류해서 마무리한다.”

특전대를 지휘할 무관까지 정해주자, 각자 할 일이 끝났다.

“이제부터 1시진 동안 매복한다. 적병이 오지 않으면, 길전을 거쳐 삼근으로 간다.”

“옙!”

“가라.”

혹시나 잊어먹었나? 싶어서 수신호를 날리자, 무관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선 부하들을 이끌었다.

삼거리의 어디든 칠 수 있도록 비탈길을 따라 능성으로 진격. 각자 위치로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숨었다.

대마도는 산이 많은 거지, 그렇다고 산이 엄청 험하고 그런 건 아니다. 길 양쪽의 비탈길만 어떻게든 올라가면, 그 위부터는 흔히 볼 수 있는 산이다.

‘상황이 이러니 왜구도 산길을 타고 오진 않겠지.’

지금 뭔 상황인지도 정확히 모를 텐데, 그나마 편한 길을 놔두고 산을 타넘으며 이동하진 않을 거다.

이곳에 매복해 있을 거라고는 더욱더 상상 못할 거고. 왜? 특전대가 길을 막기 전에 도망쳤다면, 그 뒤에 니로군이 어떻게 정리됐는지 못 봤을 테니까. 병력이 얼마나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 가능성이 높아. 조선군이 왕창 몰려왔는데, 지 혼자 삼근에서 버티고 있어봤자 뭐해? 게다가 이렇게 육로로 올 줄은 더 모르겠지.’

조선군이 삼근을 공격할 거라면, 당연히 바다를 건너와 포구를 공격해야 마땅한 법. 아마 삼근을 다스리는 가신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혹시나 대마도주도 공격받는 줄 알고, 더욱 급하게 오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특전대원들은 연오랑이 알려 준대로, 나뭇가지를 꺾어 갑옷과 투구사이에 대충 끼워 넣어 위장했다.

합류한 병졸들은 “이상한 놈들. 또 이상한 짓 하네?”라며 보고 있다가, 잠시 소란스러움이 일면서 잽싸게 따라했다.

“이게 효과가 있어?” “몰라.” “그럼 왜 하는데?” “시키는 대로 해. 그냥. 뒤지기 싫으면.” 듣지 않아도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지 뻔하다.

분명 특전대원 누군가가 알려주자, 퍼지고 퍼져서 다들 따라하는 모양이다.

특전대원과 합류한 병졸들은 그렇게 양쪽 비탈 위에서 매복을 완료했고, 말을 타고 있는 연오랑과 무관들은 보다 떨어진 곳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들 슬슬 지겨워졌을 때쯤 되자, 왔다갔다를 반복하며 주변을 살피던 척후가 반가운 소식을 들고 왔다.

“대략 삼백정도 되는 왜구가 오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갑옷을 입고 있는 자도 있고, 기병은 대략 20기 정도 됐습니다.”

‘좋군!’

좋은 갑옷. 화려한 갑옷을 입었다는 건, 삼근을 다스리는 고위무사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이나 왜국이나 돈 있는 놈이 좋은 갑옷과 무구를 가질 수 있는 거지.

“수고했다. 너흰 남쪽 비탈에서 대기해라.”

“옙!”

“병사들을 깨워라.”

연오랑의 말에 무관들은 재깍 비탈 근처로 달려가 연신 수신호를 했다. 툭툭. 퍼질러 자진 않았지만, 느긋하게 누워서 쉬고 있던 이들이 부산스럽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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