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챕터6. 출정하다 (6)
합류한 병졸들은 특전대만큼 익숙하진 않지만, 그들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 자신들이 매복하고 있고, 걸리면 산통깨진다는 걸 안다.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인데, 누가 경망스럽게 행동할까. 오히려 소리를 안내려고 잔뜩 긴장해서 몸이 둔해질 정도다.
이윽고 정신없이 달려오는 왜구들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급하게 오는 기색이 역력하다. 저러하다 막상 싸워야 할 때 못 싸우면 어떻게 하려고 저럴까?
그러거나 말거나 왜구들은 계속 달려왔고, 그들은 저 멀리 동쪽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병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형태가 보이니 지례 겁을 먹은 거다.
“저러고 그냥 있으면 포위당해서 죽을 텐데? 쟤들은 척후도 안 뿌리고, 그렇다고 돌격도 안하고, 뭐하는 거냐?”
“...”
연오랑이 왜구를 보며 비웃자, 무관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식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지들도 똑같았으면서 얕보고 있다.
“뭐가 웃겨 인마. 니들도 똑같아. 길이 좁으니까 편곤 대신 기창을 준비해라. 돌진하지 말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화살만 먹여줘.”
“옙!”
연오랑은 가장 앞에 서서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어차피 거리는 200보가 넘는다. 활을 쏴봐야 제대로 날아오기라도 하겠냐. 저쪽은 우리가 아군인지 적인지도 모를 텐데.
삼거리 교차점을 향해 계속 나아가자,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형태를 완전히 알아볼 거리에 이르자, 연오랑 일행이 적인 걸 깨달은 것이다.
선두에 선 이가 칼을 뽑아들고 뭐라뭐라 막 소리치면서 준비를 하려는 찰나. 삐익! 그들 뒤에서 명적과 함께 불화살이 치솟았다.
“와아아!”
“쏴라!”
“모조리 죽여라!”
어째 연오랑이 나설 일도 없어 보인다.
특전대는 배운 대로 자리를 잡고 서서 밑에 있는 왜구에게 화살을 날려댔다.
머릿수가 네배? 다섯배? 가깝게 차이난다. 왜구는 행군하느라 길게 늘어져 있고, 조선군도 똑같이 열을 맞춰서 늘어서서 언덕 위에서 화살을 쏴댄다.
아무리 조선군이 근접전이 약해도, 이런 상황에서 왜구가 뭔 수로 버텨내겠나. 그저 자기들끼리 이리갔다가, 저리갔다가 혼란만 가중됐다.
게다가 초반에 쏟아진 화살은 모조리 왜구기병에게 적중한 바. 수십, 수백발의 화살이 일제히 쏟아졌으니 쓰러진 말과 시체가 선두를 막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시체로 쌓아올린 벽인 셈이다.
“할 게 없네?”
“...”
연오랑이 아쉬운 듯 혀를 차자, 다들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이미 머리를 잃은 왜구 무리는 남쪽과 동쪽. 그리고 비탈진 사면을 마구 올라타 도망가려 했지만, 이미 삼거리는 꽁꽁 싸매서 포위된 상태.
“가자!”
“하앗!”
“이랴!”
연오랑이 치고 나가자 무관들 모두 뒤를 따라나섰고, 기병이 돌격해오자 왜구는 아니나 다를까 더욱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맨날 노만 젓던 기선군도 오랜만에 손맛도 좀 보고, 합류한 병졸들 또한 자신만만하게 활을 쏴댔다.
맞으면 어떻고, 안 맞으면 어떠냐. 어차피 고기반 물반이다.
그렇게 포위만 갖추고 계속 화살만 쏟아내자, 기창에 피를 묻히기도 전에 다 쓰러져버린 게 아닌가.
바보 같은 놈이 아니면 다친 이도 없을 거다.
아마 원래 역사에서 박실도 이와 비슷하게 매복을 당해 패퇴하지 않았을까?
이런 비슷한 매복을 당했고, 그래서 산비탈을 올라가서 자리를 잡으려다가, 또 그 위에 매복하고 있던 적에게 공격당해 속절없이 무너졌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이 거지같은 대마도에서 매복을 한다면, 뻔히 이런 식이 되지 않을까?
연오랑은 보다 척후를 열심히 뿌려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대승입니다. 특전대장님!”
“당연한 거 아냐? 우리가 머릿수도 더 많아, 지형도 좋아, 빠져나갈 구멍도 없어. 이런데도 지면 그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연오랑이 ‘당연한 일인데, 이게 뭔 대수냐?’라는 표정을 짓자, 무관은 머쓱해져서 실실 웃었다.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것도 지형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지, 지금처럼 완전히 꽉 옭아맸는데, 뭔 수로 버틸까.
“정리해라. 알지? 갑옷, 무기, 옷, 하여튼 다 챙기고. 홀딱 벗긴 시체는 대충 길 옆으로 버려라. 인원보고 하고.”
“옙!”
이미 니로군에서 한번 해본 작업이라서 그런지, 병졸들은 재빠르게 손을 놀려댔다.
황급히 출격한 왜구가 뭐 얼마나 가지고 있겠냐만, 속옷만 빼고 다 털어서 뭐든 챙겼다.
“특전대장님. 이놈이 두목인 것 같습니다.”
특전대원 몇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들을 가져와 대령했다. 이놈도 장식을 큼지막하게 달아 놓은 투구를 쓰고 있다.
헛구역질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잔혹하고 역겨운 모습이지만, 이미 익숙하지 않나.
연오랑은 아무 감흥도 없이 그저 항왜를 바라봤다.
“맞냐?”
“예. 원정칙이 맞습니다. 나머지는 원정칙의 수하 같습니다.”
“따로 챙겨라.”
“옙!”
원정칙은 삼근을 다스리던 고위무사. 이거면 삼근도 가볍게 점령할 수 있을 것 같다.
수급은 선물로 줘야하니, 왜구 옷을 대충 벗겨서 잘 포장했다.
왜구들의 무기, 갑옷, 식량등은 데려온 짐말에 모조리 실었고, 신음을 흘리며 죽기를 기다리던 왜구들은 확인사살을 해서 확실히 끝을 내줬다.
“끝났습니다. 적병 267명사살. 아군사상자 없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 합류한 무관은 자랑스럽게 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당연한 일을 왜 자꾸 대단하다고 그럴까. 연오랑은 앞으로 계속 승리하면 무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가자.”
“옙!”
시원한 승리를 해서 일까? 특전대와 합류한 이들. 심지어 기선군들도 환하게 웃으며 함성을 내질렀다.
삼근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길전.
그곳은 이미 왜구가 지나간 듯,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까지도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황급히 어디론가 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다 쓸어버릴 건데.
병졸들은 거지부랑아로 빙의한 듯, 다시 한 번 빈집을 털어댔다. 넝마나 다름없는 다다미까지 싹 털어서 짐말에 옮겨 실었다.
논밭의 작물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챙기고, 아직 덜 여문 건 모두 베어서 흩뿌렸다.
과연 저걸 주워 먹을 수나 있을까? 여긴 이제 죽은 마을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왔을 때는 완전히 불태워버리리라.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생각을 연오랑은 홀로 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반시진쯤 행군한 뒤에 도착한 삼근.
산 능선을 따라 숨어서 슬쩍 살펴보니, 니로군만큼이나 큰 포구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한때는 대마도의 중심지였다는 게 말이 된다.
한쪽에는 강이 흘러 바다와 입을 맞추고 있고, 크고 작은 집과 영화속에서나 봤던 일본식 저택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래도 시대가 달라서일까? 뭔가 조잡한 거 같기도 하고, 기억이 왜곡되어 원래 저런 거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중요한 건, 제대로 털어먹을 수 있다는 거다.
“포위한다.”
연오랑은 다시금 무관들을 모아 간단히 설명해줬다.
이미 한바탕 손발을 맞춘 특전대와 합류병이다. 이들은 서로 대충 가늠을 했으니, 이제 하나로 섞어서 새로운 특전대로 만들어갈 시간.
하여 3인1조를 5개로 묶어 하나의 소대로 만들고, 소대마다 특전대와 합류병의 비율을 대충 1:3으로 맞췄다.
이러면 하동출신이 특전대의 선생이자 조교가 됐던 것처럼, 특전대원이 합류병의 조교가 될 거다.
지금 이 포위망 완성작전을 그걸 위한 첫 시작점이다.
“무슨 말인지 알았냐? 무관들은 각자 소대를 맡을 건데, 다른 소대보다 뒤처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지금은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다.”
연오랑은 살벌한 말을 내뱉었고, 특전대 무관은 사색이 되어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합류병 무관들은 왜 저러나 싶을 거고.
“칼질에 자신 있는 무관은 돌격대에 합류한다. 더 정확히는 너희들만으로 돌격2대를 만든다. 훈련은 본래 돌격대원들과 함께 하면서 배워라.”
“...!”
“천인이니 양반이니 하는 소리를 했다가는 목이 떨어질 거다. 니들은 내가 니들 비위맞춰주는 사람으로 보여? 니들 목숨을 구해주는 건 보이지도 않는 양반신분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천한 놈들이야. 이 답답한 놈들아.”
연오랑은 슬쩍 또 발끈하려는 갑사출신의 무관을 노려봤다.
“살고 싶으면, 공을 세우고 싶으면, 왜구를 때려잡고 싶으면 닥치고 내말 따라. 반론하고 싶거든 다 끝나고 살아남고 나서 해라. 알겠냐?”
“예.”
“예. 특전대장님.”
엄포를 놓고서 다시 설명시작.
별거 없다. 이번엔 마을 밖에서부터 소대별로 거리를 두고 빙 둘러싸서 그냥 점점 앞으로 나가면서 마을 전체를 포위하는 거다.
이미 삼근에 있던 무사와 칼잡이는 지원군으로 오다가 다 죽었을 테니, 딱히 위험할 것도 없다.
그럼 연오랑은? 다를 거 있나. 니로군에서 했던 일의 반복이다.
“히랴!”
“무기를 든 자는 전부 죽여라!”
“저택에 있는 자는 모두 죽여라! 살려두지 마라!”
연오랑은 합류병 무관들과 함께 미친 듯이 마을 정중앙을 질주했다. 이 대마도산 말은 확실히 연오랑이 키운 말에 비해 작고 볼품없지만, 그래도 말은 말이다.
화살비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말 몇 마리와, 죽은 말에서 챙긴 안장과 마구를 장착한 짐말이 무관을 태우고 열심히 달려갔다.
연오랑의 꽁무니를 쫓아가느라 모양새가 영... 엉망이지만, 눈앞에 창칼이 노니는데 그걸 신경 쓰는 마을주민이 누가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조선군 기병이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저 울부짖으며 망연자실할 뿐이다.
퍽퍽! 왜구 칼잡이는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다.
겁도 없이 까부는 몇몇을 편곤으로 처죽이고 도착한 곳은 삼근의 부둣가.
혹시나 왜인들이 배를 타고 도망갈까 싶어서 이곳을 먼저 점령했고, 아니나 다를까 미친 듯이 노를 저으며 도망가려는 이들이 보인다.
“쏴라!”
무관들은 거침없이 화살비를 날려줬고, 주인을 잃은 배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파도에 밀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여간 보우마스터의 나라답게 활솜씨는 기똥차다.
쿵쿵! 포위를 마친 특전대는 일부러 소리 내며 천천히 조여들어왔다.
집에 숨어 있던 이들. 어찌할 바 몰라 주저앉은 이들, 소리치며 이리저리 뛰는 이들.
약탈과 습격을 당한 전형적인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며, 왜인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하긴. 저기 특전대 제일 앞줄에서 걷는 무관의 기창엔, 삼근의 주인이었던 원정칙과 무사들의 머리가 꽂혀 있다.
기세 좋게 떠났다가 목만 돌아왔으니 무슨 생각이 들까. 저걸 보고 졸도나 안하면 다행이다.
특전대는 천천히 집을 수색하며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냈고, 도망가는 이는 사정없이 등짝에 화살을 박아 넣어줬다.
이윽고 부둣가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 물고기를 모는 어부마냥 특전대원들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아갔다.
분명 도망간 사람도 있을 텐데... 얼핏 봐도 많다. 아무리 못해도 천명은 넘을 것 같다.
‘이거 너무 많나?’
연오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싸우는 거면 또 모를까. 이제 와서 죽이자니 병졸들의 상태가 걱정된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 아닌가. 아무리 지금이 15세기조선이라지만,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작정 칼로 찔러죽이라고 하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이유라도 있으면 모를까. 지금은 포로로 잡으려고 이렇게 포위해서 몰아온 거니까.
특히나 이제 막 한두번 승리해서 그저 신나는 놈들은 분명 정신에 문제가 생길 거다.
피맛을 즐기는 정신 나간 놈이 되든지, 아니면 피맛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끼던지... 뭐가 됐던 지금 보다 병력이 줄어들면 곤란하다.
‘어쩔 수 없네. 협박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