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챕터6. 출정하다 (7)
연오랑이 그리 결정을 내렸을 때.
마을주민들은 잔뜩 겁먹고선 서로의 팔뚝이 찰싹 붙을 정도로 빽빽하게 밀집했고, 특전대는 여차하면 창으로 쑤시겠다는 듯이 점점 조여갔다.
더 이상 모두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잔뜩 달라붙은 상황이 되자, 다들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굴려댔다.
억울함과 분노, 원망과 절망이 모두 섞인 사람들의 눈은 곧 한곳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오롯이 받고 있던 연오랑.
그가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바라보며 잠자코 있자, 웅성거림도 이내 사그라들었다. 싸늘한 침묵에 짓눌러 모두의 입을 닫히자, 드디어 연오랑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너희가 선택할 길은 세 가지 중 하나다.”
뜬금없이 유창한 왜어 때문일까? 모두는 연오랑의 펼쳐진 손가락 3개에 시선이 집중됐다.
지금 이게 뭔 짓거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생사여탈권이 연오랑에게 있는 걸 직감했나 보다.
“하나. 우린 너흴 니로군으로 보낼 거다. 조선군을 따라 얌전히 가면 된다. 그러면 모두 살 수 있다.”
“...?”
“둘. 가는 길에 몰래 산으로 도망가는 방법이 있다. 상관하지 않는다. 이 좁은 대마도에서, 식량도 없이 얼마나 도망 다닐 수 있을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난 도망친 놈들을 끝까지 사냥해 피를 마실 거다.”
“...!”
섬뜩한 말에 다들 몸을 떨었다. 돌려 말했지만, 자신들을 짐승처럼 대하겠다는 뜻이니까.
“셋. 가는 길에 다른 마을로 도망가는 방법이 있다. 이 또한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은 이곳 삼근이지만, 인전, 상현정, 비전승, 좌하! 난 남김없이 불태우고 약탈하고 지울 것이다. 빠져나갈 곳 없는 이 섬에서, 과연 너희가 어디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으면 가라. 어차피 나를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
주민들은 잔뜩 겁먹어서 입을 꽉 다물었고, 눈빛은 어쩔 줄 몰라 마구 흔들렸다.
지금 하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과연 목숨을 걸고 그걸 확인해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알았냐? 살고 싶으면 조용히 따라가고, 도망칠 테면 도망쳐라. 혹시 아냐? 숨어서 살 수 있을지? 하지만 잡히면 지금처럼 말로만 끝내지 않을 거다.”
연오랑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장도를 빼들어 원정칙의 목을 가리켰다.
“게다가 이 거지같은 땅에서 뭐 하러 고생하면서 살지? 차라리 땅도 좋고 많은 조선으로 가서 사는 게 낫지 않아? 조선이 여기보다 살기 좋은 건 너희도 잘 알잖아? 지금 항복하면 너희 모두 조선 땅에서 살 수 있다.”
끝으로 피식 웃으며 사기를 쳐본다. 과연 조선이 여기보다 살기 좋을까?
물론 왜보다 조선이 세금이 더 적은 건, 이들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를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
당연히 넘어올 리 없겠지만, 그래도 도망치기 전에 한번은 더 고민하게 만들지 않을까?
“정리해라!”
“옙!”
“이리와랏!”
“빨리!”
특전대원들은 거칠게 마을주민을 한곳으로 몰아 검사했고, 다른 병사들은 다시금 약탈에 들어갔다.
집집마다 있던 대마도말은 다시금 짐말과 기병으로 변신.
식량은 전부 짐말에 옮겨 싣거나 따로 챙기고, 나머지 물건들은 포구에 잔뜩 정박해 있는 선박에 옮기기 시작했다.
기선군을 괜히 데려왔겠나. 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데려온 거지.
길전에서 챙긴 전리품 및 이곳에서 뜯어낼 수 있는 모든 걸 다 뜯어서 왜선에 옮겨 싣고, 기선군은 왜선을 몰고 두지포로 향할 예정이다. 왜냐고? 두지포에 전리품을 모두 모아놓을 계획이니까.
포로는 니로군에서 기다리고 있을 박홍신이 알아서 훈내곶으로 끌고 갈 거다. 만약 왜구의 지원군이 니로군을 공격하면? 도망가야지. 어쩌겠나. 이미 계획은 짜여 있으니 박홍신이 알아서 대응할 거다.
“이곳엔 말이 꽤 있더군. 기병 여섯을 뽑아 니로군으로 데려가라. 혹시 모르니 거리를 두고 인도해라. 도망쳐도 붙잡지 말고, 만약 너흴 공격하면 싸우지 말고 바로 도망쳐라. 니로군에 도착하면 좌군병사와 마주치지 말고 바로 복귀해라. 쓸데없이 꼬리를 달긴 싫으니까.”
“헌데...”
명을 들은 무관은 조심스럽게 연오랑을 바라봤다. 아까 했던 말이 엄포인지, 진짜인지 몰라서다.
“내가 장난 하는 줄 아냐? 난 대마도를 전부 불태워버릴 거다. 저들이 도망치면 나중에 죽이면 그만이다.”
“흡...!”
“... 예. 특전대장님.”
살기 어린 말에 무관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삼근을 약탈한 후, 특전대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다음 목표는 상현정(사고). 가는 길에 분명 마을이 있을 테니,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버릴 거다.
특전대가 가는 길은 실전인 동시에 훈련이었다.
작은 마을을 만나도 항상 포위작전을 하며 합을 맞추고, 뻔히 아무것도 없는 걸 알면서도 척후를 뿌리며 경계했다.
연오랑과 특전대는 대마도 서쪽, 북쪽해안가를 따라 계속 이동하면서, 무수히 많은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고, 왜구를 죽이고, 포로를 잡아 니로군으로 보냈다.
싸움은 항상 같았다. 애초에 다를 것도 없다.
특전대 병력수가 어지간한 마을주민보다 많은데, 무슨 기기묘묘한 계책과 전략이 필요할까.
그저 포위하고, 연오랑을 필두로 한 무관의 기병돌격. 그 후 섬멸의 반복이다.
마을을 약탈하면 할수록 점점 기병은 늘어갔고, 기선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도 많이 털어서 이젠 소형 왜선은 그냥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고, 큰 것만 챙겨서 가져갈 정도다.
다만 특전대원는 크고 작은 승리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아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이 정확히 뭔 짓을 하고,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거다.
이 시대의 전쟁 사이클은 오랜 행군. 오랜 대기. 짧은 혹은 긴 전투. 그 후 다시 대기. 행군. 대기가 보통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짧은 행군. 전투. 짧은 행군. 전투다. 안 그래도 짧은 싸이클이 더욱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즉. 날짜로는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실전경험을 고농축으로 짜내서 억지로 입에 처넣는 꼴이다.
이 짓을 매일같이 반복하니 전투는 전투가 아니고, 산악기동은 산악기동이 아니었다.
그저 그냥 반복되는 일상일 뿐.
처음에는 원숭이마냥 괴성을 지르며 칼을 들고 달려드는 왜구가 무서웠지만, 지금은? 이젠 다들 익숙해졌다.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하다.
어차피 저렇게 달려오다가 화살에 맞아 죽을 거고, 그러고도 산다면 창벽에 막힐 거고, 또 그러고도 산다면 옆에서 순식간에 치고 나온 별동대의 칼에 쓰러질 거고, 만약 그럼에도 살아서 도망치면? 어느새 후방에서 달려온 기병대에게 뒤통수가 깨지고 만다.
‘어쩜 저렇게 한결 같을까?’하고 고민해보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대체 이 압도적인 머릿수에 뭐로 대응해야 할까? 그것도 도망칠 곳도 없는 이 섬. 대마도에서?
영광스럽게 돌격해 죽든가, 아니면 칼을 버리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계속 구르다보니 숙영도, 행군도, 약탈도, 약탈품으로 보급하는 것도, 모든 게 그저 일상이 되어 무서울 정도로 손에 익어갔다.
이들이 정말 고향에선 농사짓고, 각종 부역하고, 붓을 들고 글을 쓰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미디블워 게임 속 “노련한 훈련관”의 특성은 부대경험치200%추가획득이다.
원래 얻는 경험치 100에 추가로 200을 더 획득하는 식.
다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니, 정확히 3배씩 경험치와 숙련도가 올라간다고 할 수는 없다. 개인차에 따라서 누군가는 떨어질 것이고, 누군가는 더 많이 숙달되겠지.
게다가 현실에선 훈련과 실전이 엄연히 다른 법. 한 번의 실전경험이 열 번의 훈련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러니 특전대원의 실력과 능숙함은 이상할 정도로 쑥쑥 늘었다. 비교할 대상이 없고 다들 엇비슷하게 쑥쑥 늘어가니, 이상함을 못 느꼈을 뿐이다.
그저 속으로 ‘내가 이렇게 활을 잘 쐈나?’ 혹은 ‘어째 요새 창이 착착 감기는데? 드디어 나도 고수가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무관들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무관은 양반과 돈 많은 양인만 가능하다. 애초에 시험과목자체가 기창騎槍과 기사騎射니까. 말이 없으면 시험조차 못 본다.
하여 일반 병졸보다 수준이 한참 높은데, 그들 또한 지금처럼 열심히 굴러본 적이 있을까?
소대장과 중대장을 맡은 지휘무관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21세기의 소대,중대전술을 배우고 있었고, 돌격대에 속한 무관들은 일신의 무력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
원래 돌격대는 무관과 비교해도 칼솜씨가 떨어지지 않은데, 이들은 양반이 개무시하는 천인이 대부분 아니냐? 자존심에 상처를 안 입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렇다고 속 좁게 원래 돌격대를 괴롭히고 무시한다?
연오랑은 차마 목을 처버릴 수는 없어서, 그냥 니로군으로 포로를 보낼 때에 솎아내서 같이 보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단결과 단합을 깨는 놈은 봐줄 수 없다.
하여 무관들도 쑥쑥 자랐다. 이들 또한 그걸 느끼지 못할 뿐.
그럼에도 연오랑은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따로 빼서, 불장난을 시작했다.
특전대는 대마도 서쪽, 북쪽을 모조리 박살내고, 지금은 무려 비전승(히타카츠)까지 박살냈다. 이제 남은 건 동남쪽에 위치한 좌하(사카)뿐.
아마도 대마도주가 저기에 있지 않을까?
이젠 시원하게 알려줘야 할 때가 됐다. 대마도의 상현이 모조리 초토화 됐다는 걸 말이다.
하여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추려서, 약탈을 끝마친 마을로 되돌아가 모조리 불사르라 시켰다. 아예 그냥 마을 근처의 숲까지 모조리 태워버리라 했다.
과연 유습을 비롯한 좌군지휘관들, 그리고 원정이 시작된 후 보지도 못한 중군,좌군지휘관들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저 어린 연오랑을 보며 ‘그래. 얼마나 재롱을 피우나 한번 보자.’는 식으로 군을 맡겼을 게 분명.
그들의 예상을 거침없이 박살내준다.
아마 사령부의 생각은 뻔할 거다. 두들겨 팰 만큼 팼으니까, 대마도주에게 항복을 권하겠지. 애초에 계획이 그러지 않았나.
저 엉덩이 무거운 굼벵이들은 분명히! 훈내곶에서 꼼짝도 안하고 항복만 계속 권하고 있을 거다.
그래서 연오랑은 일부러 연락병을 피해 다녔다. 흔적은 어쩔 수 없이 남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여기 있습니다!”라고 먼저 연락병을 보내진 않았다.
니로군으로 포로가 계속 오고 있으니, 박홍신은 ‘왜 이렇게 많이 보내지? 설마 아직도 계속 싸우고 있나?’ 하고 의구심을 갖고 있을 거다.
그런데 왜 피해 다니냐고? 실전훈련도 실전훈련이지만, “이제 항복서신이 오가고 있으니 대기해라.”라는 명령을 피하기 위해다.
이렇게 쉽게, 이렇게 가볍게 끝낼 수야 있나.
연오랑은 자신이 처음 주장한대로, 대마도를 전부 불태워버릴 생각인데 말이다.
그리하여 10일이 지난 지금. 현재.
상현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불태우고, 그러고도 모자라 산을 타넘으며 도망친 왜인을 사냥하고 포로로 잡아 보내면서 도착한 곳.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좌하(사카)에 특전대가 당도했다.
저 멀리 하늘이 전부 검게 변할 정도로 연기가 치솟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수십키로는 떨어져 있을 이곳에서 보일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큰 불길이 일어난 걸까?
이 자식들도 쌓인 게 많았는지 아니면 그저 불장난이 재밌었는지 모르지만, 따로 보낸 특전대가 일을 꽤나 잘해줬다.
연오랑이 이끄는 특전대가 좌하에 도착하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저 먼 북쪽과 서쪽, 그리고 오면서 지나친 동쪽해안까지.
모든 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매케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