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9화 (29/538)

29. 챕터7. 포위하다 (1)

원래 역사에선 조선군이 훈내곶을 점령하고 하현을 공략하자, 대마도주는 상현의 병력을 모아 니로군에서 결집한다.

육로가 막혔으니 상현을 공략할 수 있는 요지인 니로군을 사수하기로 한 거다. 그리고 여기서 박실이 패전한 거고.

하지만 지금은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당한 터라, 사태를 알고 난 후 대마도주는 어쩔 수 없이 좌하(사카)의 산성에 처박힐 수밖에 없는 상황.

이 판국이면, 계획을 수정해서 전군을 몰아쳐 산성을 공략할 법도 한데, 원정군 사령부의 생각은 달랐다.

역시 졸보기질은 쉽게 버릴 수 없는 모양이다.

원정군 사령부는 “이 정도면 엄청난 승전 아닌가? 그러니 항복을 받고 끝내자. 이제 곧 태풍이 올 시기가 됐다.”라고 생각하고서 항복서신만 계속 보냈다.

그런데 연오랑이 문제다.

한쪽은 항복서신을 보내면서 죽치고 앉아 있는데, 한쪽은 항복하든 말든 다 죽이겠다는 식으로 모든 걸 불태우고 있다.

북쪽 마을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좌하로 몰려갔을 테니, 연오랑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았을 거다. 아마도 대마도주는 원정군 본대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했겠지.

대체 지금 항복을 하라는 건가? 아니면 항복하지 말고 옥쇄하라는 건가? 혹은 북쪽이 불타는 걸 보면, ‘이 항복서신이 간계는 아닐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연오랑과 원정군 사령부의 불협화음은 본의 아니게 정말로 간계가 되고 말았다.

조선군의 압도적인 군세와 밑도 끝도 없는 기습공격에 대마도주는 저항할 의지를 잃고 열도본토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런데 조선군이 훈내곶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협상을 거네?

이는 대마도주가 봤을 때, 딱 조선군에 맞는 행동이다. 손봐줄 만큼 봐줬으니까 이제 숙이고 들어오면 봐준다는 거지.

그래서 도망치는 대신 협상을 시작했다.

지금껏 조선에게 해왔던 것처럼 질질 끌면서 “예예. 형님.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 안 그러겠습니다.”

이러면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은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앞으로 세경선은 줄이겠다.”라고 하겠지? 불을 보듯 뻔한 수순이다.

하지만 대마도주는 연오랑의 존재를 몰랐다.

그가 이렇게 밍기적거리고 있는 사이, 상현을 다 불태워버리고 좌하까지 진격할 줄 누가 알았겠냐. 같은 편인 조선군조차 몰랐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도망갈 타이밍을 놓쳐버린 거지.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하던 짓을 계속했다.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거지.

그 첫 번째 타겟은 다름 아닌 엔통사(엔쓰지). 이곳은 대마도주 가문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 대마도의 통치관청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조선으로 치면 궁궐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인기척 하나 보이지 않는다. 대마도주는 이미 산성으로 도주한지 오래니까.

다만 산성은 좌하의 백성들을 모두 품기에는 너무 좁은 곳이라서, 무사들만 챙겨서 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럼 마을주민들은 어쩌냐고? 뭘 어째. 그냥 버리고 튄 거지.

아마 주민들 중 꽤나 많은 수가 대마도 내지의 산속으로 도망갔을 거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불타는 북쪽을 보면서, 절망의 한탄을 내뱉고 있겠지.

하여 특전대는 아무런 방해 없이 엔통사를 점령하고, 약탈을 시작했다.

특히나 저 불상. 21세기에 인터넷으로만 접했던 본존불인 금동약사불좌상은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물건으로 어째서 여기로 왔는지 연원을 알 수 없는 물건. 21세기에도 유명한 물건을 이렇게 실물로 보게 됐다.

감상? 별거 있나. 그냥 불상이지 뭐.

이미 불상은 조선에서도 꽤나 많이 봐서 별로 감흥도 없다. 다만 대마도주가 아끼는 물건이니 뜯어가야지. 이럴 줄 알고, 대마도의 온갖 절과 신사에서 보물급 유물을 싹 털어오지 않았나.

그 외에 조선사신단이나 고려가 남기고간 물건들, 대마도의 행정서류등등. 말 그대로 탈탈 털어서 수레에 대충 실었다.

그 다음 수순은 그간 했던 일의 반복이다.

특전대원은 포위하고 몰아쳤고, 칼을 들고 설치는 이는 사정없이 화살비를 먹여줬다.

그렇게 포로를 몰아넣고 나선, 약탈을 시작. 또 다시 왜선에 약탈품을 가득 실어 마지막으로 남은 기선군을 떠나보냈다.

드디어 오백에 가깝던 기선군이 모두 떠났다.

지금까지 약탈한 왜선은 대충 세어도 200척을 가뿐히 넘지 않을까? 그것도 10명 정도 타는 작은 거 말고, 최소한 4,50명은 타는 중형선으로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왜선을 떠나보내고 나서, 대마도주에게 화끈한 환영인사를 선사했다. 또 불장난이다.

포로로 잡힌 왜인을 버젓이 앞에 두고서 절망을 선물한다. 좌하의 부둣가부터 시작해서 수백,수천호의 가옥을 싹 다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

“어이쿠.”

“내 집...”

왜인들의 우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지만, 특전대원들은 누구 하나 흐트러진 이가 없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봤고, 이런 비슷한 꼴을 너무 많이 봤다.

처음에는 ‘왜구 새끼들 다 처죽여야지.’라고 분노에 차 있다가, 조금 지나고 나니 ‘그래도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래도 되나?’하고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가, 계속 이어지는 전투와 약탈에 ‘아. 똑같구만 똑같아. 지겹다. 이젠.’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무덤덤해졌다.

그러니 눈 하나 깜짝할 리가 있나.

지옥불처럼 타오르는 마을의 불길을 뒤로 하고, 무덤덤하게 서서 포위하고 있는 특전대원들.

왜인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귀나찰과도 다를 바 없었다. 당연히 잔뜩 겁먹고 그저 악귀나찰의 주인처럼 보이는 이만 바라볼 뿐이다.

연오랑은 불길을 뒷배경으로 삼아 입을 열었다.

이미 수도 없이 반복한 이야기 아닌가. 솔직히 그도 이제 슬슬 지겨워졌다.

“지금부터 너희가 선택할 길은 세 가지 중 하나다.”

“...?”

“하나. 우린 너흴 훈내곶으로 보낼 거다. 조선군을 따라 얌전히 가면 된다. 그러면 모두 살 수 있다.”

“...?”

“둘. 가는 길에 몰래 산으로 도망가는 방법이 있다. 우린 붙잡지 않겠다. 보이지 않나?”

연오랑은 불타는 마을 말고, 저 멀리 보이는 검은 연기를 가리켰다.

“상현은 모두 불타고 있다. 갈 테면 가라. 얼마나 도망칠 수 있는지 보마. 불에 타 죽든, 아니면 내 손에 죽든, 둘 중 하나일 거다.”

“...!”

“셋. 너희들의 주인. 대마도주 종정성에게 가라. 보나마나 저 산성에 처박혀 있겠지? 가서 구해달라고 해라.”

연오랑은 도시 저편. 엔통사 뒤편에 위치한 산을 가리켰다.

왜국의 산성은 상대하기 무척 까다롭다.

지들이 두더지도 아니고, 산을 정상에서부터 깎고 또 깎아서 흡사 계단식으로 성을 만들어 놨다.

목책이든 돌성이든 상관없다. 그냥 지형 그 자체가 성벽이다.

올라가는 길은 좁고 험난하고, 올라서 평지에 발을 디딘다한들 끝이 아니다.

산을 깎아 만든 첫 번째 주둔지에는 무사들이 사는 작은마을. 아니다.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집 무더기가 있는데, 여길 정복하면 겨우 첫 번째 방벽을 점령한 거다.

대마도주가 있을 저 꼭대기까지 가려면, 이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계단을 오르듯 주둔지 방벽을 하나씩 점령해야 된다.

그게 대체 뭔 바보짓인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 따로 없다.

문제는 저런 산성이 만능은 아니라는 점. 저 좁은 성에 무사들이 가득할 텐데, 군량과 보급품이 얼마나 있겠는가.

안 그래도 급하게 도망가느라 얼마 챙기지도 못했을 텐데, 과연 도망친 백성을 받아줄까?

물론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뭐가 됐던 연오랑이 손해 볼 일은 없다.

“가라.”

하여 연오랑이 장도로 산성을 가리키자, 척척. 특전대원은 길을 비켜줬다.

누가 봐도 “빨리 저 성으로 달려가라.”라고 말하는 듯 했다.

산성으로 가고 싶은 이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모이자, 연오랑은 불길을 키우기 위해 장작더미를 하나 더 집어넣었다.

툭툭툭. 밑이 시뻘건 커다란 보자기들.

“가지고 가라. 소록, 금, 상현정과 비전승에는 무사가 없더군. 종진의, 중앙태, 이대조랑과 사군보의 가족들이다. 가지고 가면 가신무사들이 너흴 받아줄 거다.”

무심하게 말하지만, 내용은 살기가 뚝뚝 흐른다.

맨 앞에 있던 왜인은 어쩔 줄을 몰라서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종진의는 소록을, 중앙태는 금을, 이대조랑은 상현정을, 사군보는 비전승을 다스리는 가신무사다.

그들의 가족이 다 죽었는데, 이걸 가서 알리라고? 나가 죽으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그래도 가족들 목을 가져왔는데, 설마 너희를 죽이기라도 할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죽을래?”

연오랑은 비웃듯 피식 웃었고, 주변에 있던 특전대원은 언제든 찌를 준비를 하듯 창대를 다시 잡았다.

지금 당장 죽을 건가, 조금이나마 살 가능성을 잡을 것인가. 선택은 당연히 후자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포로가 될 걸 후회하면서, 왜인은 어쩔 수 없이 수급더미를 나눠들었다.

백여명에 가까운 왜인들은 좁디좁은 산성의 입구를 향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정리하고 포로는 훈내곶으로 보내라. 전처럼 기병 6기만 딸려 보내고 귀환해라. 구출한 조선인과 중국인은 따로 보호해서 데려가고.”

“옙!”

“나머지는 숙영준비를 하고 대기한다. 손님을 기다려야지.”

대체 얼마나 굴리고, 얼마나 쥐어 잡았으면 이렇게 변했을까? 새로 합류한 무관들조차 한 점 의문도 하지 않고 곧장 명을 수행했다.

‘자. 대마도주야. 어쩔 거냐? 가신무사들과 그의 부하들은 나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을 낼 텐데... 성을 나올 거냐? 아니면 어떻게든 버틸 거냐?’

연오랑은 말의 목덜미에 척하니 턱을 괴고 앉아서, 저 앞에 있는 헐벗은 산성을 바라봤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문뜩 기대가 됐다.

연오랑의 이런 미친 짓에 대마도주는 물론이고, 원정군도 골치가 아팠다.

하현으로 내려간 중군과 우군은 무려 왜구 육백여명의 목을 베고, 사천이 넘는 포로를 붙잡고, 조선인, 중국인 210여명을 구출했다.

아소만 남쪽해안의 모든 마을을 불태웠고, 도시인 계지(마쓰시마)와 요라(이즈하라)마저 함락 후 전소시켰다. 불태운 가옥만 5천호가 넘을 거다.

이미 처음에 계획했던 작전계획의 몇 배에 달하는 성과다.

이만하면 조정에서도 꼼짝없이 칭찬할 수밖에 없는데... 어째 끝이 안 난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니로군을 통해 훈내곶으로 포로가 끝도 없이 몰려왔다.

병사들이 먹을 군량을 포로에게 다 먹여야 할 판국이다. 그나마 2만명이 두 달 동안 먹을 군량을 싣고 와서 천만다행인 상황.

게다가 포로가 오죽 많나? 대충 보아도 만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으니, 원정군 사령부는 혹시나 반란을 일으킬까 싶어서 잔뜩 긴장했다.

또한 원래 계획은 여기서 후다닥 해치우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거다.

태풍도 태풍이지만, 요동으로 떠난 왜구가 돌아올 테니, 그걸 방비해야 하지 않겠나.

헌데 대마도주는 항복을 안 하고 시간을 끌고 있고, 좌하로 진군하자니 포로를 너무 많이 받아버렸다.

병력을 거의 반으로 나눠야 할 상황이 되니 난감할 따름.

이런 상황에 처하자 장군들은 하나같이 유습을 성토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연오랑에게 독립작전권을 안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닌가.

하지만 유습이라고 예상했겠는가. 연오랑이 실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고 빠르게 움직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이 난감한 와중에 좌하로 보냈던 척후병이 황당한 소식을 전해왔다.

상현 전체가 불타올라 멀리서도 불길이 보였다고 했다.

그 불길이 얼마나 거대한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 하늘 저편에서 저편까지 전부 연기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그 뿐일까? 연오랑은 기어코 좌하까지 함락시키고, 아예 대놓고 도시를 불태워버리고는 산성을 포위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원정군 사령부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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