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챕터7. 포위하다 (2)
“이게... 무슨!”
“허...!?”
중군의 최윤덕과 우군의 이순몽. 좌군의 박무양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연오랑과 나름 인연이 있는 인물들 아닌가. 다만 박홍신은 두지포에서 포로와 전리품을 건사하기도 바쁜 터라, 박홍신과 친분 있는 박무양이 자처해서 오게 됐다.
역시나 원래 역사를 워낙 많이 비틀다보니, 박무양 또한 죽지 않은 모양이다.
하여튼 이들 셋은 좌하로 가는 길에, 저 멀리 하늘이 불타고 있는 걸 보며 화들짝 놀랐고.
좁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왜인 포로를 만나 두 번 놀랐고. 그들을 인솔하던 무관의 이야기를 듣고 세 번 놀랐다.
연오랑이 무슨 미친 짓거리를 한 건지, 그제야 제대로 알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네 번째로 놀라 입을 쩍벌렸다.
그들이 열심히 깨부쉈던 왜구마을, 왜구포구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있어야할 마을이 없다. 이 대마도에서 가장 번성했을 도시가 사라졌다.
아직도 불길이 잡히지 않은 모양? 방화벽으로 만들어 놓은 무너진 건물 뒤쪽에선,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온 천지는 검은 잿더미와 검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산성 한쪽에선 연신 먼지구름과 함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싸움이 벌어진 건가?’하고 화들짝 놀라서 달려가 보니, 싸움은커녕 웃통을 벗고서 연신 삽과 곡괭이질을 하는 병사들만 잔뜩 이다.
대충 훑어봐도 온통 공사판 그 자체. 크게 보면 다섯 개의 무리로 찢어져 연신 몸을 놀리고 있는 게 보였다.
첫 번째 무리. 산성을 가운데에 두고 활의 사거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연신 땅을 파서 해자 비슷한 걸 만들고 있다. 대충 봐도 산성을 포위하는 형세다.
두 번째 무리. 강을 따라서 숙영지를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몇몇이 딱딱 각을 맞춰서 땅을 파며 배수로를 만들고 있다.
남은 이들은 얼기설기 달라붙어 단순무식한 사각형태의 건물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다. 건물이라기보다는 그냥 벽과 지붕만 대충 만드는 모습이다.
멀쩡해 보이는 목재와 군데군데 타다 남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좌하의 가옥을 때려 부셔서 자재로 쓰는 게 분명했다.
세 번째 무리. 대체 어디서 저렇게 많은 말馬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만, 백여필의 기병이 산성 주위를 돌면서 이따금씩 산성을 향해 활을 쏘는 게 보였다.
위력시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게 확실했다. 산성의 입구와 첫 번째 주둔지 목책에 박혀 있는 화살은 한 두개가 아니었으니까.
저들은 산성에서 왜구가 내려오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하는 걸 테다.
그 옆쪽에는 도망치다가 잡혔는지 아니면 간자로 와서 잡혔는지 모르겠다만, 홀딱 벗겨진 왜구가 나무장대에 목이 묶여 있는 게 보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스스로 목을 조르는 꼴이 될 거다.
네 번째 무리. 산성 맞은편의 산을 기어 올라가, 도끼와 톱으로 사정없이 나무를 베어내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수백의 병사들은 아예 민둥산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각오를 몸으로 보여줬다.
열심히 나무를 베어냈고, 그렇게 베어낸 나무는 수백여필의 작은 말로 끌어와 주둔지 막사의 재료로 쓰고 있다. 자잘한 나무들은 목책으로 만들고.
다섯 번째 무리. 그렇게 나무를 베어 사계청소를 하고나자, 또 다시 산을 파내며 긴 해자를 만들고 있다.
미친놈도 아니고... 뭔 해자를 산에다가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산성을 따라서 열심히 산비탈을 깎아내서, 평지까지 쭉 이어지는 구덩이를 파고 있다.
어찌됐건 결론은 하나다. 이건 누가 봐도 포위전이자, 지구전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이러니 셋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따라온 다른 무관들 또한 기겁할 수밖에.
원정군은 이제 후퇴를 생각 중인데, 이들은 후퇴 따위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으니까.
“허... 가세.”
“예. 대감 어른.”
장군들은 황급히 발을 놀려 연오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헌데 높으신 분들이 왔건만 어째 신경 쓰는 병졸이 하나 없다. 그저 힐끔 보고 마는 꼴이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무례를 따질 때가 아니다.
딱딱 각을 맞춰서 숙영지를 짓고 있는 탓일까? 이들은 헤매지도 곧장 연오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 지어지지도 않은 주둔지 정중앙에, 큼지막한 천막이 쳐 있었으니까.
대체 이런 천막은 또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이게 왜선의 돛으로 쓰던 물건인 걸, 떠올릴 수 있을까?
“자네...!”
“오셨습니까.”
최윤덕은 한소리 내뱉으려다가, 가볍게 목을 풀며 인사를 하는 연오랑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딱 봐도 엄청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고, 그의 앞에는 야지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수많은 서류가 올려 있었고.
이들은 대체 이게 뭔 상황인지 몰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척후에게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감축 드립니다. 대감.”
연오랑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다들 표정이 볼만했다. 화내기도 뭐하고 좋아하기도 뭐한 애매한 표정이다.
오히려 사색이 된 건, 연오랑 옆에 있던 병사들.
이들은 중군에서 보낸 척후인데, 특전대에게 잡혀 오도가도 못 하고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 말을 내뱉기 전에, 연오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종정성이 가지고 있던 서류를 보아하니 산성의 병력은 많아봐야 오백정도일 듯합니다. 좌하의 무사가 대략 이백. 상현정, 소록, 금, 비전승에서 합류한 무사가 삼백정도 될 것 같습니다. 포로들의 말을 들어보니, 식량은 고작해야 십여일 정도 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산성에 올라간 게 벌써 칠일전이니, 이제 곧 굶기 시작할 겁니다.”
“...자네.”
“...?”
연오랑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최윤덕은 다시금 할 말을 잃고 혀를 찼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렸다. 저 순진한 눈빛 속에 숨어 있는 음흉한 속뜻이 보인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렇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냐?’라는 속마음이 그대로 읽혀진다.
‘그래. 그게 맞긴 하지. 하나...’
최윤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맞는 말이다. 연오랑이 잘못한 건 없지 않나. 다만 지금 상황이 요상해져서 문제지.
“보고 올리겠습니다. 특전대 사상자 24명. 적병 1400여명 사살. 좌하의 왜인 포로 이천이백여명. 구출한 조선인, 중국인 131명. 노획한 대마도마馬 561필. 사살한 적병 중 가신무사는 삼근의 원정칙. 인전의 도택금. 이내의 판안청진. 좌수내의 매전총유. 대포의 미촌입오. 악포의 각능량홍. 천간의 시겸재. 일중의 진관차. 주지의 정목흥헌. 입니다. 노획품은 아직 분류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두지포에서 처리하고 있을 겁니다.”
“허허.”
“헙!”
연오랑은 생각 없이 그저 줄줄이 읊어댔지만, 듣고 있던 이들은 기겁해서 헛기침을 뱉어냈다.
원정군 사령부에서 딱히 목표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가신무사들을 죄다 죽여 놨다.
연오랑은 이들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서 일까? 아니면 자랑을 하려고 하는 걸까?
슬쩍 눈치를 주자, 근처에 있던 병졸 몇이 얼른 뛰어가 피에 절은 보자기 수십개를 가져왔다.
“우욱.”
“크흠...”
썩은 내가 풀풀 나는 꼴이 염장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그냥 머리통만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큼. 죄송합니다. 날씨가 이래서...”
말은 죄송하다고 하는데, 하나도 죄송한 표정이 아니다.
“...”
“부패하기 전에 주문(항왜길잡이)이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또한 저들의 혈족도 마찬가지로 참수했습니다. 포로로 잡힌 왜인들에게 하문하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허허...”
“쯧. 됐네.”
“...?”
연오랑이 ‘날 못 믿냐? 그럼 직접 확인하시든가.’라는 표정을 짓자, 최윤덕, 이순몽, 박무양은 결국 항복하고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박무양은 박홍신에게 들었던 것보다, 연오랑이 훨씬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얼이 빠져서, 더 이상 말할 기운조차 없다.
또 제 잘난 맛에 사는 이순몽조차 이런 전과에는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3군 모두가 훈내곶에서 뭉개고 있는 사이, 특전대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상현을 지도에서 지워버렸으니까.
“대체 이게... 후... 저건 어떻게 된 건가.”
최윤덕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저 멀리 보이는 북쪽 하늘을 가리켰다.
여기서도 보인다. 저 시커멓게 타오르는 검은 연기가. 상현 북쪽에서 시작한 산불이 점점 남하하고 있다.
“원정군 회의 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다 불태워버려야지요. 그 작업 중입니다. 아. 기름은 약탈로 해결했습니다. 겸사겸사 내지로 숨어들었던 왜인도 다시 해안가로 나올 겁니다.”
“허...”
“끄응.”
또 다시 ‘나 잘했지? 원정군에게 부담 안주고 내가 다 처리했어.’라고 말하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한숨 밖에 안 나온다.
이래서야... 항복은커녕 후퇴하자고 말도 못 꺼내겠다.
“아. 여기까지 불이 내려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 때쯤 되면 대마도주는 불타 죽든지, 굶어 죽든지, 칼에 맞아 죽든지 해야겠지요.”
“...”
그들의 생각을 읽은 걸까? 연오랑은 곧장 말을 이었다.
그의 살벌한 말에, 최윤덕과 이순몽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서로의 눈빛에 노기가 흐르고,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원정군의 목표 따위는 녀석에게 관심거리조차 못됐던 거다.
녀석이 바랐던 건 오로지 단독지휘권.
사령부의 장군들은 그것도 모르고, 승리에 취해서 덥석 쥐어 주고 말았다.
연오랑은 애초에 대마도주의 항복 따위는 관심조차 없고, 원정군 사령부가 반려했던 그의 계획. 대마도 초토화 작전을 혼자서 실행하고 있었던 거다.
문제는... 이런 속내를 이제야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연오랑에게 뭐라고 하기가 애매하다는 거다.
원정군에 참가해 왜구를 열심히 때려잡았는데, 이게 잘못된 건가?
만약 이 상황이 나중에라도 조정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고작 천여명의 병사를 이끄는 어린 장수가 홀로 상현을 다 박살내고 다녔는데, 2만에 가까운 중군이 고작해야 마을과 도시 몇 개 부수고 엉덩이 뭉개고 항복만 기다리고 있다?
조정대신들은 분명 원정군을 마구 뜯어먹을 거다.
그렇다면 연오랑이 원정군 사령부의 명을 어겼나? 명을 어기긴 커녕 너무 잘 수행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한다고 말했고, 모든 건 원정군과 연오랑의 약조대로 이뤄졌다.
실수는 딱 하나. 원정군 사령부는 그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어쩔 텐가.”
“...”
연오랑은 ‘뭘 어째?’라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고.
“...”
“...”
최윤덕과 이순몽은 ‘다 알면서 뭘 물어보냐.’라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어찌나 살벌한지 눈에서 칼날이 나올 거 같다.
일신의 무력은 이미 일전에 확인했고, 이제는 군재軍才가 뛰어나다는 것도 깨달았다.
군재가 없으면 잡졸이나 다름없는 잡색군과 정군이 저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정예가 되지도 못했을 거다. 당연히 이런 말도 안 되는 전과 또한 없었을 거고.
그렇게 머리 잘 돌아가는 녀석이 지금 원정군이 처한 상황을 모를까? 그럴 리가 있나. 알면서도 끝까지 말을 안 하는 거다.
녀석의 머릿속엔 태풍이 몰아치건 뭐건, 후퇴 따위는 절대 없으니까. 어떻게든 대마도주를 죽일 생각인 게 분명했다.
최윤덕과 이순몽은 그리 확신했고, 빨리 대답을 하라고 압박하며 연오랑을 노려봤다.
이제 와서 지휘권을 빼앗고 뭐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대마도주를 독안에 가둬놓고 죽일 날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원정군이 태풍을 핑계로 후퇴하면? 조정에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도 그냥 가둬놓은 것도 아니고, 아예 산성에 몰아넣고 굶겨 죽이고, 불태워 죽이려고 하고 있는데 포위를 풀고 퇴각해?
이건 태풍을 떠나서 분명 문제가 된다. 아니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으니 문제는 안 되지만, 조정대신들은 억지로 문제 삼아 원정군 무관들에게 엿을 먹일 게 분명하다.
이러니 진퇴양난에 빠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