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챕터7. 포위하다 (5)
“흐음...”
화포 시연이 끝나자 연오랑은 어디가지도 않고 곧장 땅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다들 ‘또 뭐하는 건가?’하는 눈으로 구경했다.
한참을 머리를 긁어가며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고, 이윽고 완성되자 우투머를 불렀다.
“이거 그대로 옮겨 적고, 특전대원 중에서 나무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 뽑아서 나한테 오라고 해라.”
“옙. 어르신.”
우투머는 재깍 고개를 숙이고선, 열심히 땅에 그린 그림을 옮겨 적었다. 안 그래도 계속 옆에 달라붙어서 뭔가를 쓰고 있지 않았나. 그 연장선이니 딱히 어려울 것도 없다.
새로 합류한 특전대원 중에는 공을 세워서 한몫 챙기려는 잡색군이 은근히 섞여 있다. 그 중에서 목기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게 우투머가 떠나자, 삼인방이 은근히 다가와 물었다.
“음... 저 녀석은 여진인 아닌가?”
“두만이 말씀입니까? 예. 맞습니다. 장군님.”
연오랑이 ‘근데 뭐? 어쩌라고?’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김효성은 떫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연씨가문의 비기를 그렇게 막 알려줘도 되나 싶어서 말일세.”
“아. 걱정 마시지요. 저 녀석은 조선으로 귀화했습니다. 원정군 본대 편에 서신을 보냈으니, 저 녀석 부족도 전부 귀화할 겁니다. 저래 봬도 나름 족장의 외아들입니다. 뒷머리도 저렇게 깔끔하게 밀지 않았습니까.”
“흐음.”
역시나 이걸로 부족한 걸까? 만족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연오랑은 살벌한 말을 웃으며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약속을 안 지키면, 제가 북변으로 가서 대마도 꼴로 만들어준다고 했거든요. 죽기 싫으면 약속을 지키겠죠.”
“...”
“...!”
오만방자하고 피비린내가 가득한 발언에, 다들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끄덕인다.
이 미친놈이라면 여진이건 뭐건 할 것 없이, 다 쓸어버릴 수 있을 거다. 그간 조선을 그토록 귀찮게 했던 대마도가 이 꼴이 날 줄 누가 알았을까.
삼인방의 머릿속에 ‘이 미친놈을 북변에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만 해도 너무 골치 아플 것 같아서 애써 지워냈다.
잠시 우투머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처음에 우투머의 위치는 애매했다. 특전대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진야인도 아니다. 연오랑과 함께 있으니까 ‘윤현과 연전위처럼 대접해야 하나?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무관과 특전대원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우투머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고, 어떻게 해야 이 미친놈과 미친놈 집단의 손에서 온전히 버틸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참 하다가... 결론은 어차피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밀고 말았다.
우투머에게 미안하지만... 이미 연오랑의 손에 들어온 순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살고 싶으면 여진을 포기하는 수밖에.
그 결심은 대마도에 와서, 연오랑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물은 엎어졌다. 이제 와서 딴소리를 했다가는 이 미친놈이 자신의 고향을 대마도 꼴로 만들 게 분명했다. 잔혹하다는 여진족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짓밟아 버리지는 않는다.
애초에 우투머 부족은 다 합쳐봐야 50명도 안 되는 작은 부족이다. 사실 부족이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
다른 부족의 강세에 휩쓸릴까봐 조선에 빌붙어 살아왔고, 그래서 우투머 혼자서 대마도 원정에 참여한 거 아닌가. 자기 부족을 건드리지 말고 잘 좀 봐주라고 말이다.
이러니 연오랑에게 납작 엎드리고 일생을 걸기로 했다.
우투머도 바보가 아니니 연오랑에 대해서 은근슬쩍 알아봤고, 하동잡색군 출신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결과는? 미친놈이긴 한데... 그래도 착하고 믿을만한 미친놈이라는 게 대세다. 하여 내린 결론은 연오랑의 가솔이 되면 인생을 펼 수 있겠다는 거다.
그리하여 지금 우투머의 위치는 연오랑의 비서쯤 됐다. 윤현과 연전위가 특전대의 우두머리라면, 우투머는 연오랑의 시시콜콜한 잡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젠 더 이상 우투머도 아니다. 충성을 맹세하자, 연오랑이 친히 “그래? 그럼. 앞으로 넌 우두만이다.”라며 조선식 이름까지 지어줬다.
그런 우두만에게 떨어진 첫 번째 명령은, 연오랑 자신의 옆을 항상 따라다니면서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받아 적으라는 것이었다.
“대체 이건 또 무슨 미친 짓인가?”하고 은근히 돌려서 물어보니,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만 들었다.
“카이사르도 갈리아 전쟁기를 썼는데, 내가 못할 건 뭔데? 난 연오랑의 대마도 전쟁기를 쓰겠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대체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그렇게 우두만은 연오랑의 전속사관이 되어, 거제도에서부터 열심히 손을 놀리는 중이었다.
대마도주가 항복을 하건 말건 이미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산성에서 보든지 말든지 특전대는 그냥 일상을 영위했다.
특전대원은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며 열심히 훈련을 이어갔다.
윤현은 무관들에게 조선의 병법과 군진을 배우고, 특전대 무관은 윤현에게 소대,중대전술을 배웠다.
윤현은 연오랑의 제자 아닌가. 충분히 이들을 가르칠 역량이 있었다. 연전위? 연전위는 연오랑에게 개인교습을 받고, 윤현과 무관에게 배움을 받았다.
마냥 연전위만 이득을 본 건 아니다.
녀석은 전설장수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연전위의 칼질은 윤현과 무관들의 턱밑까지 쫓아왔고, 그들은 절대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연오랑 타임.
연오랑은 목기를 다루는 장인과 함께 이것저것 만들었다.
만드는 거? 뻔하지 않나. 포가와 격목. 그 중에서도 집중하는 건 포가다.
포가는 21세기에서 온 그에게도 익숙하다. 포가의 최종 테크트리가 뭔가? 바로 견인포다. 비록 특전사출신이지만 훈련 나가서 105미리 똥포는 지겹도록 봐왔다.
게다가 근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맨날 등장하는 게, 바로 바퀴 큰 야전대포 아니냐.
그 기억과 경험을 녹여낸다.
포를 담을 박스형태의 나무몸체를 만들고, 몸체 옆에 큼지막한 바퀴를 달고, 몸체 뒤에는 견인과 반동을 잡아줄 포다리를 달았다.
몇 세기를 뛰어넘는 물건이지만, 뭐 어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구조적인 부분뿐이니, 이거라도 해서 조선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되지 않겠나.
하나 더 만든다.
임진왜란 시기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물건. 수군용으로 쓰이는 작은 포가인 동차도 함께 만들었다.
21세기의 그는 지방 유지 금수저였다.
집에 널리고 널린 게 농기계고, 그걸 고치고 노는 건 취미였다. 칼질은 인생이었고.
뭔가 주객이 전도된 거 같지만, 어찌됐건 그는 그러고 살았다.
기계공학 수준의 복잡한 건 몰라도 단순히 톱니바퀴를 이용한 동력전달, 판스프링을 이용한 현가장치등. 농기계 부품과 수리에 관한 지식은 있다.
전문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몸으로 때우면서 야매로 알음알음 익혔단 말씀.
하여 포가와 동차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지금은 전용부품도 없고 그래서 장난감과 별반 다를 게 없지만, 이거라도 만든 게 어딘가?
우리의 그레이트 킹갓 세종느님이 보고서 알아서 고치겠지.
그렇게 하루를 꼬박 장인들을 들들 볶아서 시제품을 만들었다.
만들었으면 자랑을 해야 하는 법.
연오랑은 화약장과 화포를 다루는 병사들, 소대장급 무관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삼인방과 일당들은 ‘또 이상한 짓을 하는구만.’하고서 슬금슬금 모여들었고.
그렇게 거의 육십에 가까운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모두가 보기 편하게 살짝 움푹 파인 구덩이에 자리 잡은 연오랑.
그는 나무막대기를 툭툭 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밥은 다들 먹었냐?”
“옙!”
“오늘은 화포에 대해서 알려주기로 하겠다. 다들 똑똑히 듣고 외워라. 시험 볼 거다.”
“흐읍.”
“끄응...”
무관들은 그저 앓는 소리를 먼저 냈다.
“네가 화포를 아냐?”“나는 화포병도 아닌데 왜 내가?”라는 질문을 던질 법도 하지만... 이미 익히 경험했다. 반문은 그저 뚝배기가 깨지는 걸로 되돌아온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중,우군의 무관은 반항이라도 하고 싶건만... 연오랑의 장도가 무섭고, 직위 높은 삼인방조차 아무 말도 없이 따르니 개길 수도 없다.
더 화가 나는 건, 특전대 소속 무관과 좌군소속 무관의 비웃음과 약올림을 버텨야 한다는 거다.
지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잘났다고.... 이러니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하자, 연오랑은 땅바닥에 큼지막한 화포를 그렸다. 그리고 포가와 동차를 가져와선, 부위를 가리키며 초등학생을 가르치듯 조근조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배우는 이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르치는 연오랑의 능력이 부족해서다.
그의 과학이론지식은 주입식 교육으로 기억하는 결과 뿐이다.
수세기에 걸쳐 쌓아온 논리와 체계 따위를 알기나 할까? 나아가 수능을 본 게 언젠데, 그런 걸 기억하고 있어? 그는 예체능전공의 칼잡이였다고.
당연히 야매와 꼼수, 경험으로 땜질이 된 엉성한 이론을 가질 수밖에.
그럼에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지식인 터라, 다들 “오...?” “그런가?” “그런거 같은데?” “신기하네?” 이런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큰둥하게 보던 이들도 점점 진지해져 갔다.
지금 이 상황이 단순히 질의응답을 하는 게 아닌 걸 알았기 때문. 삼인방 일당의 눈은 점점 진지해졌고, 그들은 흡사 평가를 하듯 무관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즉. 대답을 잘하면 눈도장을 찍을 기회라는 거다. 그래서일까? 강의 아닌 강의는 점점 열기가 뜨거워졌다.
“이번엔 격목과 토격이 왜 필요한지 봐라.”
연오랑은 바닥에 평행선을 하나 그리고, 점점 넓어지는 평행선을 따로 그렸다.
“자. 사방이 꽉 막혔다. 기운이 갈 길은 정면뿐이다. 그럼 이 두 개 중에서 어떤 게 기운이 더 강하게 나갈까?”
지금까지 이해했으면 이 정도는 쉽다. 당연히 평행선이 더 강할 거다. 입구가 커질수록 기운은 사방으로 퍼질 테니까.
그걸 보자마자 화약장과 화포병들은 바로 문제가 뭔지 알아차렸다.
“아...! 지금 쓰는 화포의 구조는 화약의 힘을 덜 받는 군요?”
“그래. 맞다. 앞으로는 구경이 똑같은 화포를 만들어야지. 바보가 아닌 이상.”
신천지라도 발견한 것 마냥, 화포병등을 웅성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원리다. 철령전을 봐라. 이게 화포에 꽉 맞춘 것처럼 보여?”
다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누가 봐도 아니다.
“기운이 빠져나갈 곳은 화포의 입구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꽉 맞춰있지 않고 헐렁하게 막아 놓으면 어떻게 될까?”
“빈 공간으로 기운이 빠져 나갈 거고...?”
“그럼 위력이 줄어들겠군?”
“아... 그건 기운이 빠져 나오지 못하게, 화포의 부리를 꽉 막는 물건이군요?”
“그렇군! 철령전을 똑같이 만드는 것보다, 격목을 똑같이 만드는 게 더 쉽겠어.”
줄줄이 이어져 알아서들 답을 찾아냈다.
“이해했냐? 그럼 이건 뭘까? 이름은 동차라 한다.”
포가의 원리를 이해했는데, 동차의 원리를 이해 못할 리가 만무. 이미 완성품이 만들어져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기만 해도 핵심을 밝혀낼 수 있다.
자기들끼리 열심히 토론하면서 이내 해답을 찾아냈다.
“지지대가 없는 걸로 보아, 일부러 뒤로 밀리는 힘을 방치하는 거군요? 게다가 이렇게 작은 바퀴를 땅에서 끌고 다니기는 힘들고.”
“반동을 받아 일부러 뒤로 움직인다. 지지대를 사용할 수 없다. 육상에서 이동하기 힘들다. 그럼? 당연히 배에서 쓰는 물건이겠군!”
기선군에서 활동했던 무관들도 있는 터라, 이들은 자신들이 낸 대답을 듣고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지금껏 자신들이 사용했던 화포의 운용원리를 단번에 깨부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