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챕터7. 포위하다 (6)
“흐흐? 봤냐? 이 몸이 이런 분이다.”
“오...!”
“존경합니다. 특전대장님!”
연오랑의 자랑질에, 이번만큼은 다들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분명 획기적이니까.
“자! 가서 확인하자. 종정성. 그 개자식한테 아침인사를 하러 가야지!”
“옙!”
연오랑의 말에 모두는 우르르 달려갔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과연 효과가 있는지 다들 시험해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지 뭐.
화약장과 화포병들은 격목과 토격. 포가와 동차를 번갈아가며 사용해서 그 효용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단순한 이론과 구조만으로 사거리와 파괴력이 늘어난 게 눈으로 보였다.
대마도주는 뜬금없이 아침부터 처맞았고.
“흐흐. 어떻습니까? 쓸 만합니까? 다 적으셨는지요?”
“허허.”
“자네...”
“끌끌.”
연오랑이 실실 웃으며 묻자, 삼인방 또한 할 말이 없어서 웃고 말았다.
이유 따윈 설명하지 않고 일단 패고 보는 망나니가 연오랑이다.
그런 녀석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설명한 이유가 뭘까? 바로 삼인방 자신들 때문인 걸 바로 알아차렸다.
한성에 돌아가서, 여기서 있던 일을 상세하게 알리라는 뜻이다.
“괜찮아 보이십니까? 조정에선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문제 될 게 있겠나? 누가 봐도 좋아 보이고, 재화도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말일세.”
삼인방은 이구동성으로 연오랑을 칭찬했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공이 없더라도,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정받을 것 같다.
“다 적으셨겠지만, 제가 만든 건 그야말로 시제품이고 애들 장난감 같은 겁니다. 군기감에서 제대로 작업하면 괜찮은 물건이 나올 겁니다.”
“그럴 걸세. 하하.”
“그리고 화약장에게 들어보니까 화포 종류가 쓸데없이 많던데, 공성용,야전용,해상용으로 구분해서 확 줄이시죠? 보니까 덩치 큰 화포는 화약만 많이 먹고 효과는 별로던데요.”
“그런가? 그것도 적어놓지. 아무튼 자네가 정말 큰 공을 세웠어.”
“별말씀을요. 아직 공을 세울 일은 많이 남았습니다. 하현을 마저 불태워야죠.”
연오랑은 무서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혹시나 삼인방이 딴지를 걸까봐,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망발을 내뱉고 있다. 삼인방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터라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고.
더 이상 그런 말을 안 해도 말릴 생각이 없건만, 연오랑은 계속해서 “방해하면 안 돼.” “대마도는 꼭 불 태울거야.”라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포위한지 나흘 후.
시간은 꾸준히 흘러갔다. 지금 포위전을 하고 있는 건지, 훈련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매일같이 산성 주변을 돌면서 산악기동훈련을 하고, 남은 이들은 숙영지에 부대전술훈련을 했다.
이런 와중에도 제일 신난 건, 화약장, 화포병, 삼인방 일당의 무관들이다.
이들은 이제 대마도 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화포 개량작업이 끝난다면? 만약 자신들이 정말로 괜찮은 물건을 만들어 낸다면?
이건 대마도 원정 따위하곤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공을 세우는 거다. 그 혜택이 벌써부터 눈에 보여서 멈출 수가 없다.
연오랑도 허락했겠다.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난 후. 자기들끼리 회의하고 토론하고 개량하기를 반복하며 연신 화포를 쏴댔다.
이 때문에 피를 보는 건 역시나 대마도주와 왜구들이다.
이런 와중에 연오랑과 삼인방은 뭐하냐고? 뭐하긴. 느긋하게 앉아서 오후의 여유를 즐겼다.
산성이 정면으로 보이는 지휘천막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엔통사에서 약탈한 고급탁자와 좌하의 저택에서 챙긴 고급의자와 상현의 어느 이름 모를 저택에서 챙긴 고급찻잔과 어느 이름 모를 절에서 챙긴 차를 마셨다.
그야말로 도둑놈도 이런 상도둑놈이 따로 없다.
“음. 많이 먹어본 맛인데...? 이거 왜구새끼들이 조선에서 훔쳐온 차인가 봅니다. 쌍놈의 새끼들. 내 고향에서 훔쳐온 건가?”
“흐음...”
“크큭.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음... 차는 오랜만에 마셔봐서 잘 모르겠군.”
연오랑의 격식 없는 말에, 삼인방은 피식 웃으며 은은한 차향을 즐겼다.
대마도에서 이런 망중한을 즐길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뭐가 어찌됐건 지금은 좋을 따름이니, 삼인방은 연오랑의 말을 애교로 받아 넘겼다.
연오랑에 대한 이들의 평가는 미친놈에서 똑똑한 미친놈으로, 화포사건 이후로는 참신하게 똑똑한 미친놈으로 바뀌었다.
저런 발언쯤은 이젠 애교로 봐줄 정도가 됐다.
게다가 마냥 싫은 건 아니다. 이런 고급 녹차를 마시는 건, 이들 입장에서도 참 오랜만이니까.
고려 때 불교가 융성하면서 차문화도 급속히 발달했다.
일상이 아니라 사치의 수준까지 올라가서 귀족들은 차세를 걷는다고 난장을 피웠다. 백성들은 그런 차를 증오할 정도였고.
하여 조선이 건국된 후. 권문세족과 지방호족을 다 짓밟으면서, 당연히 그들과 연관된 사찰 또한 박살났다.
승려를 천민 취급할 정도로 밟아버렸는데, 고려귀족과 승려가 향유하던 차문화가 어떻게 됐겠는가? 그들의 주요 돈줄이 차로 벌어들이는 수익인데? 당연히 박살났지.
그래서 지금은? 겨우겨우 명맥을 살려서 살고는 있는데, 과거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요샌 조선사람들도 차를 잘 안 마시는 정도에 이르렀다.
중국처럼 기름진 음식 먹고, 물이 안 좋아서 차를 마셔야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조선이 굳이? 차를, 그것도 녹차를 마셔야 될 이유가 있을까?”하며 점점 다도문화가 쇠퇴해 가고 있는 것.
이런 시대에 뜬금없이 대마도에서 다도를 즐기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연오랑이 뜬금없이 욕을 박은 이유? 21세기의 그는 차를 안 즐겼다. 아는 건 티백으로 파는 보성녹차 밖에 몰랐다.
헌데 이 세상에 와서 보니 고향인 하동녹차도 유명하더라. 해서 야금야금 많이 먹어봤는데, 지금 마시는 차맛이 비슷한 거다.
어쩌면 싸구려 입맛이라 차맛은 거기서 거기인데, 그냥 왜구에게 욕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그나저나 종정성. 이놈 끈질기군요. 분명 굶고 있을 텐데, 나올 생각을 안 하네요. 귀찮게끔... 빨리 처리하고 하현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겁을 먹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연오랑의 투덜거림에 그저 쓴웃음만 흘렸다.
병력수가 무려 다섯배 이상이다.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식량도 없어서 며칠은 굶었을 거다. 그런데 싸우러 나온다? 쉽지 않다.
“아마 태풍을 기다리는 걸 테지요. 그래야 그나마 저들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태풍이 오면 화포는 물론이고, 화살도 쏘기 힘들다. 머릿수의 효과를 발휘하기 힘드니, 그 때를 노리는 게 분명하다.
“단병접전에 자신이 있으니, 확실히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삼인방은 대화를 나누면서 연오랑을 힐끔 살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떤 계획이 있냐?’라고 묻고 있다.
“아. 빨리 나와야 하현도 불태우는 건데, 태풍이 오면 산불이 잘 안 붙을 거 아닙니까.”
“허허.”
헛다리를 제대로 집었다. 연오랑은 이제 보니 단병접전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불이 안 날까봐 걱정하고 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군을 분할하는 건 어떤가? 어차피 왜구 지원군은 오지도 않는 것 같고, 저들 또한 안 나오는 것 같은데 말일세.”
“음...”
연오랑은 박언충의 물음에 대답을 삼켰다.
사실 그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판단과 행동을 보류한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
게임 미디블워의 “노련한 훈련관.” 특성이 적용되는 건 확실히 확인했다. 다만 작동원리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소속이 되면 적용되는 건가? 그가 직접 지시를 해야 적용되는 건가? 그를 중심으로 일정한 범위에 있어야 적용되는 건가? 떨어져 있어도 그의 명령을 따르면 적용되는 건가?
게임에서나 이걸 쉽게 증명하고 확인하지, 현실에서 어떻게 알아보나.
실력이 얼마나 느는지 안 늘었는지 확인하는 방법도 없는데.
하동잡색군이야 워낙 바닥이었으니까 조금만 성장해도 ‘어?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익혀?’라고 느낄 수 있는데,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지금은?
실력이 올라가도 이게 효과를 받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 스스로 한계를 깨고 올라가는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여 가장 명확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가 직접 조련하는 거지.
그래서 분병分兵을 못하고 여기서 함께 머무는 거다. 또 느긋하게 포위만 하고 죽치고 있는 게 아니라, 특성효과를 받기 위해 빡세게 훈련하는 거고.
“조금만 더 지켜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구름을 보아하니 이제 정말로 비가 올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연오랑은 저기 동쪽 하늘을 바라봤고, 그곳엔 벌써부터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태풍이 오기 전에 선발대로 소나기부터 쏟아질 모양이다.
“막상 태풍이 오면 저들도 건사하기 힘들겠지요.”
“그럴 겁니다. 허허. 화포병이 저리 신을 낼 줄 누가 알았겠소.”
화약을 다 써버리겠다는 듯, 미친 듯이 쏴재끼지 않았나.
산성은 말 그대로 뼈대만 남아 있고, 안쪽의 건물들도 엄청나게 파손을 입었다. 이 밑에서 봐도 무너진 건물 몇채가 보일 정도니까.
저 상태에서 태풍을 맞이하면, 주둔지에 머무는 특전대보다 몇 배는 더 고생해야 할 거다. 그럼 정말로 마지막으로 발악할 힘조차 없어질 걸?
“그럼 승부처는 하루,이틀 사이겠군요.”
“그렇겠지요.”
“준비를 하겠습니다. 솔직히 뭐. 딱히 할 것도 없지만 말이죠.”
연오랑의 자신만만한 말에, 삼인방은 그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말았다.
저 오만한 콧대를 눌러줘야 하는데 방도가 없다. 과연 대마도주의 마지막 발악도 깔끔하게 막아낼 수 있을까?
삼인방 모두는 그런 기대와 의문을 동시에 품었다.
대마도주는 과연 끈질겼다. 또 다시 사흘을 더 버티고야 말았다. 포위당하고 나서 무려 일주일 넘게 버틴 거다.
상현의 가신무사 가족을 다 죽였는데, 그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대마도주의 지배력이 대단한 걸까? 아니면 가신들의 충성심이 대단한 걸까?
하지만 이제 그런 대치도 끝났다.
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는 점점 굵어져갔고, 하루 종일 쏟아지는 비로 인해 북쪽에서 밀려오던 산불마저 꺼졌다.
특전대가 열심히 파놓은 참호와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린 산비탈은 거대한 흙더미와 진흙밭이 되어 위태위태했다. 언제 산사태가 일어나서, 산성을 덮칠지 모를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산성에서 저길 공격한다? 내려오거나, 목책을 향해 올라오다가 알아서 굴러 떨어질 거다.
결국 왜구가 산성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 병졸들이 생사교라 이름을 붙인 통로뿐이다.
쏴아아... 태풍이 불러온 비바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군데군데 세워놓은 막사에선 불꽃이 피어올랐다.
야습이 저들에게 유리할 터, 열심히 베어온 나뭇가지를 매일 밤마다 피워서 어둠을 몰아냈다.
그래서 확실히 보였다. 저기.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서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는 왜구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어두운 밤을 타고 땅거미처럼 밀려오는 그림자 무리가 점점 커져간다. 타는 모닥불 너머로 검은 인영이 일렁이는 꼴이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한편으론 안쓰러워 보였다.
“결국 야습이군?”
“이걸 야습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연오랑은 김효성의 말에 히죽 웃었다. 이미 올 거라 예상하고 불을 환하게 밝혀놨는데 야습이 맞을까?
물론 지금은 비바람에 달빛마저 흔들릴 지경이지만, 그래도 훤히 보이지 않나.
“화약장. 화약은 어때?”
“한발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습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화약장은 송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흐렸지만, 연오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거라고 예상했다. 이 시대의 화약에 뭐 얼마나 기대했겠나. 아무리 습기를 없애려고 노력해도 쉽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화포를 열심히 쏴서 항전의지를 꺾었으니,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