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챕터7. 포위하다 (7)
“내가 알려준 거 있지? 대장군포에 장전하고 직사로 쏠 준비해라.”
“옙!”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약장은 화포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비가 올게 뻔해서 화포진지는 앞이 트여있는 작은 건물형태로 만들어 놨다. 적어도 빗방울에 맞아 점화가 안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윤현.”
“예. 어르신.”
“활은 어떠냐?”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반 이상이 못 쓸 거 같습니다.”
“됐다. 그 정도면. 그래도 몇 백은 쏘겠군?”
“예. 아마도요.”
“그럼 대기하고 있다가 적들이 생사교로 몰려오면 후방으로 이동해 포위하고, 적들이 퇴주하면 몰아칠 준비를 해라.”
“옙!”
복합궁은 확실히 이게 조금 아쉽다.
아무리 시위를 관리하고 몸체를 달궈서 고정시켜도, 습기가 많아지면 아교가 풀어지고 탄성이 줄어든다.
이곳은 안 그래도 바다가 코앞에 있고, 요 며칠사이엔 쉬지 않고 비가 쏟아지지 않았나.
제 성능을 반도 발휘하기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뭐. 이것 또한 예상범위다.
“전위야. 칼은 손에 많이 익었냐?”
“예. 어르신. 왜구놈들 따위는 문제없습니다.”
든든한 전설장수 연전위. 녀석은 돌격대 무관과 매일같이 대련하며 실력을 갈고 닦았는데, 거제도 시절과 지금은 비교조차 불가한 실력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벌써 무관들을 뛰어넘었을 지도 모른다.
“돌격대를 준비시키고, 생사교 앞에서 대기해라.”
“옙!”
“... 자네?”
연오랑의 지휘에 삼인방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보니... 뭔가 대단한 계책 같은 것 없이, 그냥 냅다 박아버리려는 모습 아닌가.
삼인방 일당이 ‘설마?’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연오랑은 가볍게 몸을 풀며 입을 열었다.
“제가 대마도주는 한칼이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습니까. 보여드리죠. 한칼이 뭔지.”
연오랑은 그리 말을 하고선,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히죽 웃었다.
다들 ‘과연 미친놈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감히 말도 붙이지 못했다.
살기를 풀풀 풍기는 모습에 절로 기가 질린다. 나름 싸움터를 전전했다고 자부하는 장군들마저도, 앞을 막아서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다.
연오랑은 항상 끼고 다니던 장도를 놔두고, 날이 시퍼렇게 선 흉측한 무기를 집어 들었다.
날 길이는 협도와 언월도의 중간. 칼날 두께는 언월도와 나기나타의 중간. 자루 끝엔 손받침대와 날카로운 정이 박혔다. 혼종이 따로 없다.
협도와 언월도는 중량으로 찍어 누르는 무기라서 다루기 힘들고, 민첩함이 떨어진다. 나기나타는 중량이 아니라 칼보다 더 긴 리치를 이용해서 날렵하게 찌르고 베는 무기고.
결국 중량의 파괴력을 유지하면서 민첩함을 살리려면, 무게중심을 바꿔야 하니 이런 모양새가 됐다.
나쁘게 말하면 이도저도 아니고, 좋게 말하면 밸런스가 잘 잡혔다고 할까? 뭐 어떠냐. 그가 생각하기에 배우기 편하고, 쓰기 좋은 데.
연오랑은 그리 생각하며, 몸을 풀듯 월도를 빙빙 돌리며 나아갔다.
빗방울이 긴 칼날에 맞고 팅팅 튕겨나가는 게, 꼭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쁘지 않아. 좋은 날이군.”
“...”
비가 좌르륵좌르륵 쏟아지는 데, 저게 뭔 개소리일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웃고 있는 연오랑을 보며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저건 꼭 피를 보는 걸 기대하는 맹수 같았으니까.
이윽고 생사교에 다다르자, 미리 준비한 돌격대가 그를 맞이했다. 수는 대략 칠십. 열심히 구르고 구른 특전대원 중에서도 칼질은 자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만 모였다.
“내가 했던 말 잊지 마라. 일격필살이다. 무리할 필요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한칼만 먹여라. 알겠냐? 밥도 못 먹어서 힘도 없는 놈들한테, 괜히 무리하다가 뒤지지 말고.”
“옙!”
“흐흐. 알겠습니다.”
농담 섞인 말에 긴장했던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다.
지금껏 매번 사냥 비슷한 싸움만 해왔다. 이들도 이렇게 대놓고 힘대힘으로 싸우는 건 처음이라서 긴장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 주위로 오지마라. 한 삼십보 정도는 떨어져 있어. 오늘은 큰 거 가져왔으니까, 괜히 와서 맞지 말고.”
“옙!”
오만방자한 말에 다들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생사교 건너편에선 수백의 왜구가 몰려오고 있는데, 연오랑에게선 두려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약장! 내가 신호하면 갈겨.”
“알겠습니다!”
애초에 이럴 줄 알고 생사교 바로 앞에 포진지를 만들어 놓지 않았나. 화약장은 냉큼 답을 하고선 언제든 쏠 준비를 마쳤다.
저벅저벅. 드디어 산길에서 내려온 왜구는 죽을 각오를 하고서 생사교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와아!”
“죽여라!”
“뚫고 나간다!”
기세 좋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온다. 굶어서 힘도 없을 텐데 목청도 좋다.
그럼 친절하게 선물을 날려줘야지.
“발포!”
“발포!”
연오랑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포가 불을 뿜었다.
그가 만들어 준 포가 덕택에, 이젠 대장군포가 직사가 가능해지지 않았나. 게다가 그 안에 넣은 건 나무화살인 철령전이 아니다.
강 주변에서 긁어모은 조약돌과 자갈을 넣고, 그 위에 진흙으로 만든 토격을 넣고, 또 그 위에 자갈탄을 넣고 토격을 넣기를 반복.
무식할 정도로 빽빽하게 꽉 채운 산탄을 준비했다.
과연 왜구가 이런 걸 맞아봤을까. 지금까지 계속 철령전만 맞았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우르르 떼로 달려들진 않을 거다.
팡! 파파팍!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괴상한 폭음과 굉음이 울려 퍼지기 무섭게. 푸하학! 생사교를 향해 달려들던 왜구에게서 피보라가 일어났다.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다. 정말로 쏟아지는 빗방울을 잠시 삼켜버릴 정도로 혈화血花가 활짝 피었다가 사라졌다.
몸에 구멍이 송송 뚫려 내장이 흘러내리고, 갑옷과 살가죽이 하나로 뭉쳐 튀어 올랐다. 주인 잃은 팔다리가 나뒹굴고, 짓이겨진 살덩이는 빗방울에 묻혀 반죽이 됐다.
수십의 왜구가 일제히 쓰러졌다.
“돌격!”
연오랑은 그리 소리치고선, 그 누구보다 먼저 생사교를 향해 달려 나갔다.
두려움? 그딴 게 있을리가. 전생과 이번생 동안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다.
한 때 고민하기도 했다.
그는 최강의 전설장수. 조선의 소드마스터다.
하지만 그게 진짜 자신일까? 그가 소드마스터가 된 게 그가 잘해서 일까 아니면 그냥 이름 모를 신의 게임모드라는 장난일까?
정체불명인 규격외의 신체가 본질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과거의 경험과 마음과 영혼이 본질일까.
결론은 쉽게 나오지 않았지만... 어찌됐건 나왔다. 인정하자. 둘 다 연오랑이고, 하나가 된 연오랑이다.
이제 와서 다시 차원이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자살해서 미래로 회귀를 할까 아니면 게임 밖으로 이동을 할까.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했던 이유? 그가 누구보다 오만하고 자신만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게, 고작 누군가의 장난 혹은 안배라고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우월한 신체로 인해 소드마스터가 된 게 아니라, 피를 토하고 뼈를 깎으며 수련했던 과거가 소드마스터를 만들었다고 증명하고자 했다.
그도 사람이고, 당연히 남들의 눈치를 본다.
미친놈이 따로 없던 21세기의 인생. 그건 비아냥거리는 남들의 말처럼, 정말로 헛된 인생일까. 아무런 효용도, 쓸모도 없는 무가치한 일일까?
정말 그럴까? 그가 해온 모든 게 의미가 없는 일일까? 모두에게 자신 있게 증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도 장소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여긴 21세기가 아니라 15세기다.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나는 얼마나 강한가. 나는 정말 만부부당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가?”
과장을 바가지 채로 퍼 넣은 수많은 야담잡설처럼, 만인지적, 천인지적의 무용을 뿜어낼 수 있을까. 소드마스터라 자부하려면 어느 정도쯤 되어야 할까.
누군가 살인귀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뭐 어때서? 15세기조선에서 살아봤어?
여긴 심심하면 병에 걸려 죽고, 심심하면 짐승이 사람잡아먹고, 심심하면 굶어죽는 시대다. 사람 죽는 건 일도 아닌 시대고, 적을 죽이는 건 죄가 아니라 칭송을 받는 시대다.
그리고 지금. 최악의 적대감과 최고의 분노로 가득한 적과 마주하게 됐다.
조선에선 감히 할 수 없던, 잔혹한 실험을 할 실험장이 완성됐다. 이 실험장을 만들기 위해서 공성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왔다.
“하하하! 와라.”
하여 큰칼을 비껴들고 달려간다.
우악스럽고 무자비한 칼질과 면도날처럼 예리한 칼질을 보여주리라.
그는 오만할 정도로 자존심 강한 투사니까. 그는 칼잡이니까. 그는 소드마스터니까.
“나를 증명하겠다!”
‘나 스스로도 정확히 모르는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이 자리에서 확인해보마!’
그는 스스로에게, 이곳에 모인 모든 이에게, 이 15세기조선에게, 포효하며 선포했다.
폭풍과 함께 몰아친 선포는 불벼락으로 변해 떨어졌다.
몸은 맥아리도 없는 주제에 눈만 형형하게 불타오른 왜구. 제대로 된 갑옷조차 입지 않아 넝마 같은 옷자락이 몸에 붙어 있는 왜구. 녀석이 가진 것 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물건이라고는 칼 하나 밖에 없는 왜구.
그 녀석의 보물을 한칼에 빼앗았다.
쾅! 두툼한 월도의 날과 부딪친 칼은 불꽃을 튕기며 휘어졌고, 피하지 못한 왜구의 어깨가 일격에 잘려나갔다.
“컥!”
휘잉!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어깨와 팔을 한방에 잘라낸 월도가 사라졌다. 흡사 빨려 들어가듯 연오랑의 손아귀로 다시 되돌아간다.
자루를 당겨 월도를 짧게 움켜잡은 연오랑. 그는 흡사 방패로 밀어붙이는 것 마냥, 월도날을 앞세워 왜구를 향해 달려들었다.
캉캉캉! 짧게 잡은 월도를 가볍게 휘두를 때마다 그에게 날아오던 칼날은 불꽃을 튀기며 튕겨나갔다.
그리곤 반탄력을 버티지 못해 가슴을 훤히 내준 왜구에게 망치를 휘두르듯, 짧고 굵직한 일격을 날렸다. 지금 대도를 휘두르는 건지, 도끼를 휘두르는 건지 모를 정도다.
퍽! 찰갑마저 우그러뜨리며 들어간 월도날에 왜구는 가슴뼈가 부서지며 제풀에 쓰러졌고, 연오랑은 그 자세 그대로 전진,후퇴,반전을 반복하며 사방을 막고,치고,이어갔다.
애초에 중량으로 밀어붙이는 월도날이다. 얇은 칼날로 막기에는 너무 버겁다.
몇몇은 칼날이 휘어지고, 몇몇은 쪼개지며, 하나같이 가슴팍과 쇄골이 부서져 주저앉았다.
그렇게 주변을 모조리 무너뜨린 연오랑의 손이 다시금 변신을 꾀한다. 휘릭! 공간이 확보되자 짧게 잡았던 자루를 다시 길게 늘어뜨린 동시에 힘차게 허리를 비틀었다.
휘잉! 흡사 풍차를 돌리듯, 빗방울마저 모조리 날려버리는 풍압과 함께 빛살이 반원을 그렸다.
“크억.”
“꺼...어.”
연오랑에게 달려들던 왜구 몇몇이 일순간에 무릎이 쪼개져 일시에 꼬꾸라졌다.
횡으로 돌며 왜구를 쓸어낸 월도는 연오랑의 허리를 타고 다시금 빙 돌아 반대편으로 진격.
아무리 무게를 줄이고 무게중심을 옮겼어도 대도는 대도다.
한번 원심력에 탄력을 받은 월도는 뱀이라도 된 것 마냥, 스스로 회전하며 다시금 왜구를 때려 부셨다. 그랬다. 이건 자르는 게 아니라 부수는 모양새다.
좌우를 모조리 쓰러뜨린 월도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한바퀴 크게 돌아 월도날이 정면을 향하자, 연오랑의 손은 다시금 자루를 바짝 당겨 좁게 잡았다. 그리곤 크게 한발짝 내딛으면서 흡사 낚싯대를 던지듯 사선으로 세차게 휘둘렀다.
쉐에엑! 정말로 낚싯대라도 되는 걸까? 연오랑의 손은 어느새 자루 끝을 붙잡고 있었고, 사슬처럼 쭉 뻗어나간 월도날은 앞에서 달려오던 왜구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포탄처럼 날아든 일격. 퍽! 찰갑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왜구는 벌러덩 넘어졌고, 넘어진 왜구의 머리를 짓밟으며 다시금 전진.
월도가 끌려오는 건지, 아니면 연오랑이 월도에 끌려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전진하여, 또 다시 자루를 짧게 잡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