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챕터7. 포위하다 (8)
왼쪽에서 내리치는 칼날은 월도날로 튕겨내고, 뒤에서 덤벼드는 왜구는 자루 끝에 달린 정으로 목을 찌르고,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칼날은 자루로 튕겨내고 어깨로 들이받았다.
“죽어라!”
“이욧!”
잠시 밀리는 것처럼 보이자 삐쩍 마른 왜구 셋이 덤벼들었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또 다시 고무줄처럼 휘어 감기는 월도날.
연오랑은 제자리에서 빙글 돌듯 허리를 비틀었다. 어깨를 들이받은 왜구. 놈의 가슴팍을 쪼개놓은 월도를 회수해 다시금 사슬처럼 뿜어냈다.
그래. 휘둘렀다는 말보단 뿜어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짧게 잡았던 손은 어느새 자루 끝에 와 있었고, 원심력을 충분히 받은 월도날은 빗방울을 갈라내며 또 다시 반원의 번갯불을 뿌렸다.
번쩍! 벼락처럼 뿜어 나온 월도에 왜구의 옆구리가 움푹 파였고,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옆에 있던 다른 왜구들조차 모조리 밀려나며 쓰러졌다.
“크억!”
“아아악!”
거리를 좁혀 달라붙으면 자루를 짧게 잡고 망치처럼 휘두르고, 한칼 거리를 유지해서 견제하면 피할 수 없는 묵직한 일격이 날아오고, 멀리서 달려들면 채찍처럼 자루 끝을 잡고 휘두른다.
월도날은 그야말로 은빛의 수레바퀴처럼 마구 회전했고, 수레바퀴는 핏자국만 길게 남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연오랑이 왜구의 전열 자체를 무너뜨리고 안으로 파고들자, 뒤이어 달려온 돌격대원들이 각자 거리를 두고 자리잡고서 칼과 대도와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처음 쾅!하고 부딪친 순간에 이미 기세는 넘어왔다.
그 어떤 왜구도 연오랑의 한칼을 막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졌으니까.
발을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왜구의 팔다리가 잔뜩 깔렸고, 빗방울조차 월도날에 쪼개지고 밀려났다.
그렇게 거칠게 왜구전열을 밀어붙이는 돌격대원 중에서도 돋보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연전위다.
과연 전설장수답게 연오랑 못지않은 괴력을 뽐내며 왜구의 진형을 뚫고 들어갔다.
그가 쓰는 쌍검은 이런 근접 난전에 최적화 되어 있지 않나.
갑옷을 입건, 방패를 들건, 칼을 들건, 할 것 없이 모조리 깨부수고 밀쳐내며 찍어 눌렀다.
왼칼을 막으면 오른칼이 날아오고, 뒤에서 날아오면 어느새 자세를 반전해 칼을 튕겨나고, 옆에서 날아오면 강철장갑으로 칼을 튕겨내고 내리 그었다.
연오랑이 시범을 보여줬던 은빛구슬이 연전위의 손에서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돌격대는 거침없이 왜구를 밀어붙였고, 그 중심에는 역시나 연오랑이 있었다.
그는 이미 왜구 한가운데까지 홀로 돌파해 들어갔는데, 감히 그 주위로 오는 왜구가 없을 정도로 공간이 남았다.
앞을 가로 막은 이는 하나같이 어깨가 부서지거나 머리가 쪼개졌고, 팽이처럼 도는 월도에 모조리 무릎이 잘려나가거나 아래쪽 허벅지가 찢어져 주저앉아 있었다.
그렇게 무너진 왜구의 중앙. 연오랑의 눈에 그나마 제대로 갑옷을 차려 입은 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투구장식도 큼지막하고, 갑옷도 보병들이 입는 허술한 지갑이나 피갑이 아니다.
저들이 이 지겨운 포위전을 끝내줄 주인공. 대마도주 종정성과 일당이리라.
“합!”
무슨 말이 필요할까. 문답무용.
악당에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다가 재수 없는 꼴을 당하는 걸 많이 봤다.
그저 말없이 깔끔하게 한칼에 보내주는 게 최고다.
한걸음에 일장一丈가까이 뛰어나가 하단으로 쥐고 있던 월도를 거칠게 올려쳤다.
쉐에엑! 빗방울마저 갈려나간다. 풍압을 이기지 못해 빗방울은 역류해 폭포처럼 하늘 위로 솟구치고. 펑! 날아오른 빗방울과 떨어지는 빗방울이 부딪치며 순식간에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또 다시 채찍과 사슬처럼 날아간 월도날은 꽤나 정갈한 갑옷을 챙겨 입은 왜구를 두들겼다.
두들겼다는 말이 정확하다. 월도날을 막으려 했던 칼은 튕겨나갔고, 그 거력을 이기지 못하고 벌러덩 뒤로 넘어졌으니까.
달려오던 이들의 전열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번개가 내리 꽂혔다. 쾅! 왜구를 쓰러뜨리고 치솟았던 월도날이 어느새 반전해 떨어졌으니까.
“끄억.”
“컥...”
일격에 등을 붙이고 있던 왜구 둘의 어깨와 팔이 잘려나갔고, 연오랑은 톱을 가는 것 마냥 손을 놀려 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한발 뒤로 후퇴하며 거리를 벌리고, 몸을 빙글 돌려서 회전력을 계속 이어갔다.
“이압!”
이미 수십의 왜구무릎을 작살낸 월도날이 또다시 반월로 변해 밀려들자, 황급히 달려들던 왜구 서너명이 일제히 푹푹 쓰러졌다.
제일 먼저 월도날에 맞은 왜구는 찰갑이 찢겨져 내장이 흘러나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용케 제대로 맞지 않은 왜구들조차 자세를 못 잡고 무너지거나 쓰러졌다.
그렇게 하늘을 또 다시 사선으로 가르고 지나간 월도는 흡사 팔八자를 그리는 것 마냥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쉐엑!쾅!쉐엑!쾅! 듣기만 해도 몸을 옹송그릴 정도로 오싹한 소름이 쫙 올라왔다. 파공음만 들어도 이런데, 직접 맞은 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종정성을 가운데에 두고 주변을 호위하던 가신무사와 무사들이 죄다 어깨와 목이 반쯤 조각나 쓰러져 있었다.
“어...”
“흐읍!”
소드마스터의 위용을 처음 봤을 텐데, 제정신일 리가 있을까.
지독하게 버티고 또 버티며 기개를 보여줬던 종정성과 가신무사들조차, 온통 피로 젖은 연오랑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손은 풍이라도 걸린 것 마냥 부들부들 떨리고, 몇몇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가 덜덜 흔들린다.
거세게 내리는 빗방울 때문인지, 아니면 이 항거 불능한 재앙 같은 칼질 때문인지, 아니면 빗방울에 역류해 분수처럼 솟아나는 핏방울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그걸 구분하는 게 중요하지도 않고.
“네가 종정성이냐? 이 새끼야. 형이 부르면 빨리빨리 와서 죽어야지. 왜 질질 끌다가 이제야 내려와?”
시건방진 말을 들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다. 반대로 연오랑이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쾅! 어느새 종정성 코앞까지 다가와선 월도날을 사정없이 내려찍었으니까. 말을 건 게 오히려 방심을 유도하려는 술책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술책은 깔끔하게 먹혔다.
종정성과 그 뒤에 있던 종준까지. 한꺼번에 투구가 찌그러지고 눈알과 뇌수가 튀어나왔다.
“어어...!?”
“헙!?”
이제 와서 놀랄게 뭘까? 하는 짓을 보니, 이들은 연오랑과 돌격대에 무력에 굴복해 항복하려 했던 것 같은데... 연오랑이 항복을 받아줄 생각이나 있겠는가.
그저 지금껏 쓰러뜨린 왜구와 마찬가지로, 종정성 일당 또한 똑같이 대접해줬다.
아직 어린애처럼 보이는 이들이나, 나이 먹어서 허리가 굽은 이들을 가리지 않는다. 평등의 가치를 몸소 보여준다.
모조리 목을 베고, 어깨를 부수고, 팔다리를 자르고, 머리를 쪼개버렸다.
대마도를 다스려왔던 종씨일가가 한날한시에 제삿밥을 먹게 됐다.
대마도주 일당이 공포와 절망을 맛보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사실 특전대는 이 싸움에서 질 거라고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다. 비가 와서 활을 못 쏘고 화포를 못 쏴도, 이미 머릿수에서 너무 차이난다.
게다가 특전대는 조선땅에 흔하게 널린 그저 그런 정군이 아니다. 이미 피맛을 꽤 봤고, 그 피맛에 홀리고 물든 이들이다.
연오랑의 “노련한 훈련관.”효과도 있겠지만, 정신무장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 앞에 있는 대마도주 일당은 두려움을 주는 왜구가 아니라, 그저 수도 없이 사냥한 대마도민일 뿐이다.
하지만 삼인방 일당은 아니었다.
그들은 연오랑의 칼을 직접 보지 못했고, 특전대와 같이 뛰지 않았다. 어쩌면 이 대마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이자 방관자로서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연오랑이 굉장한 업적을 세우고, 참신하게 똑똑한 미친놈이라는 건 잘 안다.
의문은 다른 거다. ‘대체 그 한칼이 얼마나 대단한가?’다. 얼마나 대단하면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을까?
이순몽사건을 들었으니 짐작하고 있지만, 짐작은 곧 의심으로 바뀌었다. 보여주는 게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 상식으로 제단하기 힘들었으니까.
특전대의 훈련은 전에 본적 없는 특별하고 강인한 훈련이 맞다. 그렇다 한들 요 며칠간의 훈련으로 사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 오만하고 위험천만한 돌격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어쩌면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회의감과 ‘설마 이제 와서 마무리가 실패하나?’하는 의심이 살포시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삼인방 일당은 공포와 함께 전율이 치솟았다.
자기도 모르게 오한이 걸린 듯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칠칠치 못하게 입가가 벌어졌다. 눈은 황망하게 커져,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울 지경이다.
허나 그 누구도 타박하지 못했다. 모두가 다 똑같았으니까.
“어찌...?”
“저게 정녕 사람이란 말인가!”
“허헙!”
지난날 수많은 맹장과 명장이 있었겠지만, 저런 이는 다시없을 거다. 세상천지에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연오랑은 오백에 가까운 왜구를 홀로 뚫어버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은빛과 붉은빛만 가득해서, 빗방울조차 없어지는 것 같았다. 피보라와 빗방울은 번갈아가며 사위를 밝혔고, 붉어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기괴하고 잔인한 광경은 이내 끝을 찾아갔다.
왜구무리를 홀로 일도양단한 연오랑. 그는 후열에 이르자, 반대로 왜구의 뒤를 치면서 다시금 왜구무리를 뚫고 앞으로 나왔다.
그야말로 만인지적. 만부부당이 따로 없다.
“...!”
삼인방 일당은 점점 가까이 오는 혈인을 보며 감히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 혈인이다. 과장과 은유도 없는 정확한 표현이다. 빗방울조차 씻겨내지 못한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얼굴을 온통 붉은빛으로 칠한 혈인은 히죽 웃으며 흰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이 괴기스럽고 섬뜩해서 모두는 흠칫. 살짝 뒷걸음질 쳤다.
자기도 모르게 겁먹은 삼인방 일당에게 혈인은 뭔가를 집어던졌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한칼이라고.”
데구루루 굴러온 물건.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물건.
가운데가 움푹 파여 투구와 머리통이 하나가 되어버린, 대마도주 종정성과 그의 동생 종준의 머리다.
‘나를 증명하겠다고?’
모두는 연오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체 저게 뭔 개소리인가?’ 했지만, 녀석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증명했다.
이놈은 참신하게 똑똑한 미친놈이 아니라, 참신하게 똑똑하고 잔학무도한 미친놈인 걸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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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 너울을 넘을 때마다 시선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재밌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고... 하여튼. 바다를 건너는 일은 뭔가 가슴을 채우는 게 있다.
그게 투쟁심인지 두려움인지 호기심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파도를 한번씩 타 넘을 때마다 기분이 오락가락 변해갔다.
연오랑은 뱃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졸린 닭 마냥 파도에 따라 머리도 같이 흔들거리고 있다.
“흐음...”
“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나?”
“아닙니다. 장군님.”
연오랑 옆에서 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 이각은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변한 연오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알 수 없는 아이로고...’
덩치야 이각보다 머리 하나쯤은 크지만, 나이는 이제 고작 열일곱 아닌가.
이각 자신의 자식을 생각하면 연오랑은 정말 어떻게 되어 먹은 녀석인지 알 수가 없다. 어디서 이런 도깨비 같은 녀석이 나왔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