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챕터8. 돌아오다 (2)
또 다시 하루가 지나, 대마도에서 출발한 귀환함대는 거제에 도착했다.
이천팔백의 특전대와 왜인포로 사천여명을 싣고 온 귀환함대. 이 함대가 원정함대에 비할 정도로 거대했으니, 특전대가 대마도를 얼마나 털어먹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드디어 기나긴 원정이 끝이 났지만 거창한 환영식 따위는 없다. 조정은 연오랑의 미친 짓에 과부하가 걸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까.
특전대원 또한 환영식엔 관심이 없다. 이들은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몇날며칠을 푹 쉬길 원했다.
무려 한 달. 아니다. 한 달 넘게 태풍이 몰아치는 와중에 산속을 헤매고 다니면서 사냥해야 했던 특전대다.
“전리품도 이젠 필요 없으니까 쉬게 해 달라!”라는 말이 목젖까지 치솟았지만! 그런 생각은 거제도에 귀환하자 싹 사라졌다. 역시 눈앞에 돈이 보이면, 없던 기운도 생기기 마련이지.
꿈에서만 그리던 전리품을 챙길 시간이 됐다.
연오랑은 개개인이 알아서 챙겨야할 전리품을 한곳에 모아뒀다가 다시 분배했다. 이건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될 거고, 무시하면 문제가 안 될 일이다.
다만 조선역사에 다시없을 승전을 하고 왔는데, 그 많은 병사에게 죄를 물고, 전리품을 회수할까? 그게 가능이나 하겠냐.
그렇다고 제멋대로 구는 연오랑을 처벌해? 대마도주의 목을 댕강해버리고, 왜구 수백을 혼자 처죽인 미친놈을? 이 또한 쉽지 않다.
괘씸하니 공을 깎고 말지, 이미 다 흩뿌려진 전리품을 회수하진 않을 거다.
하여 특전대의 귀환과 해산은 꽤나 조용히 진행됐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으니까.
반대로 신난 사람도 있다. 바로 연오랑의 창고지기 아닌 창고지기가 되었던 박홍신이다.
“드디어 왔군! 오기만 기다렸네. 자네가 종정성을 직접 처리하고 대마도로 귀환한 왜구 놈들까지 때려잡았다지?”
“예.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하.”
“하하. 그렇겠지. 장하네.”
박홍신은 나름 연오랑과 친분을 쌓지 않았나. 하여 이 미친놈을 다루는 법을 익혔는지, 잘난체하는 꼴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게다가 박홍신은 연오랑과 밀약을 맺고서 전리품을 보관 중이다. 이 골치 덩어리를 드디어 처리하고 자기 몫을 두둑하게 챙길 시간이 됐으니 연오랑이 그저 반가울 수밖에.
“그간 별 일 없었습니까?”
“음... 별 일이라면 별 일인데, 왜관을 전부 폐쇄하고 왜인을 포로로 잡았네.”
“오호?”
원래 역사에선 그냥 폐쇄하고 말았는데, 연오랑이 워낙 깽판을 살벌하게 치지 않았나. 왜관에 상주하던 왜인은 대부분 대마도인이라서 그냥 죄다 포로로 잡아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난리인데, 동래는 더 난리네.”
그래. 아마 감방이 미어터지고 있을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했는데, 더 신경 쓸 필요 있나. 연오랑은 분위기를 바꿔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 뭐. 그건 그렇고. 또 가져왔습니다만, 자잘한 건 특전대원끼리 다 나눠가졌습니다.”
“에이. 그건 상관없네. 어차피 전리품은 많으니까. 흐흐.”
이 양반 이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모양이다. 하긴 공돈이 생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괜히 오해를 살 필요는 없으니, 갑옷과 무기의 대부분은 조정에 넘겼다. 무관들이 무기류를 각자 하나쯤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 외에 자잘한 것들은 전부 특전대원에게 뿌리면 끝.
나머지 자잘한 건 너무 많아서 연오랑도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따로 빼놓은 큼직한 덩어리가 중요한 거지.
“대마도의 절에서 떼어온 범종이 6개. 불상이 12개. 전조시대에 넘어간 보물이 대략 40점. 왜선이 311척. 대마도말馬이 723필. 소 12마리. 명전 1341개. 마제은 10관. 은병 21관. 남만금전 3관. 진주 134알. 기타 귀금속이 180여점 일세.”
자기 것도 아니면서 좋아서 함박웃음을 짓는 박홍신을 보며, 연오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이렇게 담이 작아서야 어디에 쓰나. 21세기 금수저 시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푼돈이나 다름없다.
“대마도를 다 턴 것치고는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고작 이게 대마도 전부라니. 쯧쯧. 역시 거지새끼들이었어.”
“허헙!”
“일단 확인해 볼까요?”
“그러게.”
다른 건 둘째 치고 은만 따져도 수천냥인데, 연오랑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있다.
박홍신은 ‘과연 미친놈답게 배포하나는 끝내주는 구나!’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안내했다.
직급이며 나이며 따질 상황인가 지금? 박홍신은 연오랑이 왜구 수백을 혼자 썰어버린 걸 이미 들은 터라, 군말 없이 안내했다.
작은 창고가 아니라 박홍신이 머무는 관사로 직행했다.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물건이니까.
딸깍. 몇 개의 나무상자를 열자, 방안이 갑자기 따스해진다. 햇빛을 반사하며,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물건들이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음...”
명전明錢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동전이다. 하지만 명나라가 망한지 오래됐지 않았나. 아니다. 망한 게 아니라 아예 없어져서 이건 동전이 아니라 그냥 동銅덩어리다.
마제은은 말발굽모양으로 생긴 은덩어리로, 지금 중국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화폐다.
나라에서 지정한 조제소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민간 교환소에서 지들끼리 만드는 물건. 당연히 형태건 순도건 전부 제각각이다.
원래 역사에서 명나라가 있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라 온갖 마제은이 마구잡이로 풀리고 있다. 지들도 거래할 땐 무게를 달아서 사용하고 있다.
은병銀甁은 고려시대에 쓰이던 은화로, 말 그대로 병 모양으로 생긴 은덩어리다. 태종 때에 이미 유통이 금지됐는데,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네?
남만금전. 15세기엔 중국,조선,일본 모두가 남쪽에서 온 물건은 죄다 남만이라 이름 붙였다.
즉.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는 뜻. 물론 동남아시아산産 물건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를 거쳐서 온 물건도 포함이다.
유럽에서 중동으로, 중동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남부로 무역로가 이어지는데, 이렇게 흘러온 물건을 죄다 통틀어서 그냥 남만물건이라 불렀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대충 인도에서 쓰는 금화 같군.’
연오랑이라고 뭐 얼마나 정확히 알겠나. 알파벳이 아닌 다른 글자가 적혀 있어서, 그냥 대충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어쨌든 금은 금이니까.
“뭐가 필요하십니까? 역시 말,소하고 귀금속이 깔끔하고 좋겠죠?”
“물론일세.”
“그럼 소 2마리. 말 6필. 진주 20알. 마제은 5개. 귀걸이와 반지 20점이면 되겠습니까? 자잘한 건 알아서 처리하셨을 테고...”
“그럼. 그럼.”
박홍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한 달간의 고생과 조마조마했던 불안감이 싹 사라지고, 왠지 모를 충만함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드디어 제대로 한몫 챙기는 순간이다.
“이제 저희가 왔으니 조정에서도 후속보고를 원할 테니까... 장계는 알아서 작성해 주시지요. 범종은 군기감에서 좋아할 테니까 다 보내고. 불상과 불교보물은 줘봐야 다 때려 부술 테니까 보내지 않는 게 좋겠고, 전조의 보물은 전부 보내면 될 것 같고.”
“...”
쓱쓱. 박홍신은 연신 손을 놀리며 받아 적었다.
“쓸데없는 명전은 전부 보내는 걸로 하죠. 구리니까 뭐 알아서 쓰겠죠. 나머지는 없는 걸로 하고요.”
“... 그래도 되겠지?”
“금,은,보석이라고 해봐야 이것밖에 안되는데, 누구 코에 붙입니까. 조정에선 있는지도 모를 걸요.”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작은 나무상자를 가리켰다.
귀금속은 덩치가 작아서, 특전대나 원정군마저도 대마도에서 얼마나 털었는지 모른다. 둘이 입을 다물면 조정에서 어찌 알겠나. 게다가 분명히 특전대원 중에서 슬쩍 챙긴 이들이 있을 거다.
조정에선 ‘저 놈들 분명히 귀금속을 털었을 건데...’라고 의심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챙기는 전리품은 암묵적으로 인정해줘야지.
“왜선이야 어차피 제가 안 가져왔으면 다 불태웠을 거 아닙니까? 조정에선 보나마나 어민들에게 나눠주라고 할 텐데, 제가 가져간다고 뭐라 하진 않을 겁니다. 오다가 몇은 침몰했고, 나머지는 제가 돌아가는 길에 나포했다고 하고서 하동에서 따로 보고를 올리죠. 어차피 전라도로 복귀해야할 기선군이 있으니, 그 친구들에게 전리품을 좀 쥐어주고 왜선을 끌고 가라고 하면 되겠죠.”
“그래주면 고맙고.”
박홍신은 부담을 덜은 터라, 냉큼 연오랑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돈은 연오랑이 알아서 낼 테고... 기선군도 맨손으로 돌아가느니, 뭐라도 받아서 가는 걸 원할 거다.
“분명 말馬에 관해서도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오는 길에 풍랑을 견디지 못하고 폐사했다고 하시죠. 어차피 지금은 배에 있으니까요.”
“그러면 더 좋고!”
아무리 연오랑이라도 막무가내로 떼를 쓰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일.
하여 말들은 내리지도 못하고 따로 70여척의 배에 숨겨 놨다. 그뿐이랴. 연오랑이 챙길 전리품 또한 내리지도 않고 배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렇게 허술하고 대강 넘어갈 수 있는 이유?
조정은 정말로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쥐어 패고 대마도주의 굴복을 얻어낼 줄 알았는데, 살인강도방화납치를 저지르고 올 줄 누가 알았겠냐. 심지어 원정의 입안자인 태종도 예상 못했다.
조정은 연오랑이 떨어뜨린 만수천명의 거지떼 폭탄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왜국 막부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했다.
조선조정 뿐만 아니라, 왜국막부도 지금 넋이 나간 상태.
전에 없이 강경한, 조선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초강력하게 대마도를 박살내니, “혹시 열도본토까지 넘보는 거 아냐?”하는 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대마도가 불타는 건, 먼 옛날 여몽연합군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니까. 왜관까지 전부 폐쇄되고 포로로 잡혔으니, 오해는 더 깊어질 수밖에.
거기에 특전대가 귀환하면서 2차 폭탄을 집어던졌다. 마중 나와 있던 관리는 왜인포로가 또 사천여명이나 된다는 말에,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21세기 사람이라면 왜인포로를 보고 “오예! 공짜노예들이다. 마구 부려먹어야지!”라고 생각하겠지만, 15세기조선 입장에선 “아니. 말도 안 통하는 거지떼를 왜 데려와! 재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라고?”라는 반응이 먼저 나온다.
당연히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다.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15세기 조선조정은 강력한 농본주의를 통치기조로 삼아서 “이것저것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냥 조용하게 살자.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사는 거지. 뭐.”라고 밀어 붙이고 있다.
안정되고 정적일수록 중앙집권과 왕권강화에 도움이 되니까. 유학자들이 생각하고 꿈꾸는 이상향이기도 하고.
조금 과장하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이 조용하게, 지방세력이 날뛰지 않는 중앙통제력이 강한 사회를 유지시키는 게 목적이다.
이러니 왜인포로가 기회가 아니라 짐으로 밖에 안 보이는 거지.
연오랑은 조정의 이런 상황을 거제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거창한 환영식이 없다는 건, 거창한 해산식도 없다는 뜻.
먼저 회군한 본대는 벌써 제각각 찢어져 되돌아갔으니, 특전대도 조용히 해산하길 바라고 있다. 상을 주건 뭘 하건, 일단 다들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해결하자는 거다.
특전대는 자기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해산할 거고.
“그럼... 다른 이들은 어떤가?”
“공을 전부 넘겨줬으니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자기들도 양심이 있지. 여기서 더 탐하면 그게 사람입니까?”
“그건 그렇지.”
속닥속닥. 보는 사람도 없건만 둘은 비밀을 주고받듯, 조용히 입을 놀렸다.
연오랑이 삼인방 일당을 돌려 까자, 박홍신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삼인방 일당에 자기 형이 포함되어 있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오랑이 대마도 하현을 다 박살내놨는데, 그 공을 홀라당 챙긴 게 삼인방 일당과 특전대 하급무관들이다. 양심이 있으면 전리품까지 탐내면 안 되지.
끝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