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챕터9. 보고받다 (1)
복잡한 회계원리 같은 건 연오랑도 모르지만, 군 생활을 하면서, 또 가업을 도와주면서 장부정리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가계부 수준의 간단한 복식부기 따위는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다.
“그리고 어선 열 척을 더 개조하고, 새로운 그물을 짜기 위해 삼밭과 칡밭을 더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연오랑은 깔끔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글자와 숫자만 가득한 보고서다.
아. 숫자는 당연히 아라비아 숫자다. 조정에서 뭐라고 하면 고려 때 귀화한 회회인(아라비아,위구르인)에게 배웠다고 구라치면 그만.
설마 관의 문서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보는 데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할까. 이게 딱히 성리학의 이치를 벗어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이 녀석들은 “이걸 받아들여? 말어?”하는 선택지는 없었다.
뚝배기가 깨지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고, 몇 번 써보니까 솔직히 편하다. 지금까지 뭐 하러 힘들게 한문으로 표기했는지 모를 정도다.
어선 개조? 이 시대에 어업이라는 건, 그물어업보다는 낚시 혹은 망태기, 소규모 그물로 잡는 방식이었다. 이런 이들에게 신문물을 전수해 준다.
바로 쌍끌이 어선. 어선 두 척이 나란히 가면서, 꽤나 큰 그물로 한꺼번에 낚는 거지.
문제는 무거운 그물을 풀고, 그걸 다시 거두는 물건이 필요했는데... 따지고 보니 그냥 윈치 아닌가.
많이 본 물건이고, 전동식도 아닌 손으로 돌리는 수동식인데 만드는 게 뭐가 어렵겠나. 하여 윈치를 만들어서 어선에 장착했다.
물론 21세기처럼 바다 밑바닥까지 싹 훑을 수는 없다.
그물도 못 버티고, 배도 못 버티고, 그물을 마는 윈치도 못 버틴다.
그저 지금의 그물보다 조금 많이 깊게 가라앉는 정도? 그럼에도 이것 하나만으로 엄청난 어획량 증가가 있었다.
그물 또한 원시적이었다. 애초에 손으로 휙! 집어던졌다가 회수하는 게 보편적인 어업방식이니, 그물의 크기가 작은 것 또한 당연한 일.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초대형 그물을 만들었다.
돛줄에 쓰일법한 밧줄을 중심으로, 그물코가 적당한 이중구조에, 깔때기 모양을 한 그물을 만들었다.
삼이야 원래 옷으로도 쓰이는 물건이고, 청올치라고 해서 칡덩굴로 만든 천이 있다. 갈포라고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엄청 튼튼했다. 갈대야 뭐 흔히 있는 거고.
물론 처음에는 “옷 만들 것도 없는데, 그걸로 왜 괴상한 그물을 만드냐!”라고 했지만... 쓱싹. 바다를 한번 훑은 후에 보여주니, 다들 입을 다물고 그를 찬양했다.
게다가 칡은 일단 약으로도 쓰이고, 차로도 쓰이고 이것저것 쓸데가 많다. 일단 만들어 놓으면 충분히 수익이 나올 거다.
일이 이렇게 복잡하다보니... 사실 배를 개조하고 어부들이 손에 익는 시간보다, 그물을 만드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밭은 전처럼 지리산 쪽으로 올라가면서 화전을 만들면 되겠군.”
“옙!”
“아. 가져온 왜선 중에서 대형선 60척 정도는 내가 쓸 거다. 나머지는 전부 신형 어선으로 개조해라. 곧 팔아야 할 테니까. 이건 조선기업에서 담당해라.”
“알겠습니다.”
맞은편에 있던 청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고, 보고를 하던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청어절임법이 성공했습니다.”
“오!? 그래?”
연오랑이 반색을 하며 좋아하자, 몇몇 청년들이 하나같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기쁠 수밖에, 이들 또한 돈벼락을 맞은 건데 말이다.
‘역시 미디블워가 날 먹여 살리는 구나!’
연오랑은 속으로 21세기의 자신을 칭찬했다. 게임을 열심히 한 게 이렇게 도움이 많이 될 줄이야?
그가 모드로 만든 미디블워:동아시아 편 말고도 미디블워:유럽, 아메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중동 등등. 온갖 종류의 미디블워가 다 있다.
21세기 그는 당연히 전부다 섭렵했고, 본의 아니게 어지간한 역사적 흐름, 혹은 중요한 사건을 배우게 됐다.
로딩 때마다 심심하지 말라고, 백과사전을 복사한 것 마냥 이런저런 사건과 발명품을 떡하니 설명해 줬으니까.
수천시간을 플레이하면서 맨날 보다보면 저절로 외워질 수밖에.
물론 년도나 모든 등장인물, 숨겨진 진실. 이런 디테일한 건 모른다. 그럼에도 거시적인 건 알 수 있었고, 역사적으로 큰 변곡점을 가져다준 이벤트 또한 알게 됐다.
청어절임도 거기서 배웠다.
게다가 그는 칼덕후 아닌가. 어부가 만든 작은 칼이 역사를 바꿨다고 하니 흥미가 생길 수밖에.
물론 유럽에서 청어절임이 잘 팔렸던 건, 육류의 섭취를 금지하는 사순절 때문이다. 당연히 기독교와 관계없는 조선에 영향이 있을까 싶지만! 조선은 애초에 거지국가다.
내륙에서 먹을 수 있는 생선이라곤 말린 생선, 민물생선밖에 없는데, 양 많고, 값싸고, 빠르게 생산되는 청어절임이 인기가 없다고? 이게 말이 되나. 없어서 못 먹을 거다.
아무튼 이렇게 게임을 통해 배운 지식이 15세기조선에 쓰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시대의 식량보존이라는 건 염장, 발효, 자연건조 말곤 없다.
청어는 비웃이라고 해서 조선에서도 흔하게 많이 먹는 물고기다. 오죽하면 서양에선 바다의 밀이라고 불렀을까.
과메기나 정어리도 크게보면 청어 아닌가. 그런 면에서 청어절임은 그리 특별한 건 아니다.
특별한 건 청어를 빠르게 손질할 수 있는 v자형태의 칼과 소금을 끓여서 만든 함수다.
본래 조선의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서 알갱이로 만드는 자염이다. 이 자염 만드는 과정을 대충 반쯤 하다가 멈춰서 소금물이 졸아들면 그게 함수다.
이 함수를 배에 싣고 나가서, 청어를 잡자마자 바로 내장을 처리하고 신선한 상태로 염장하는 작업을 드디어 성공한 거다.
이게 말은 쉽지... 제대로 된 함수를 만드는 데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었고, 함수를 담을 통을 만드는 데 고생했고, 청어칼에 익숙해지는데 오래 걸리고, 함수통을 담는 어선을 개조하는데 또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
그야말로 수년간 이어온 노력의 결실이다.
“으하하. 사원들에게 추가수당 날려! 드디어 돈맛 좀 보겠구만!”
“으히히.”
“으헤헤.”
연오랑이 신나서 음흉한 웃음을 날리자, 청년들 또한 하나같이 음흉한 웃음을 내질렀다.
어포를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절임으로 만드는 게 훨씬 손이 덜 가고 시간도 적게 걸린다. 당연히 수익이 늘어날 수밖에.
“크음... 어르신. 축산기업에서 보고 드립니다.”
“오냐.”
“하동과 광양의 1,3목장에서 12마리의 망아지를 낳아 총 2341여필 됐습니다. 새로 들여온 제주마가 154필, 요동말이 21필이고, 우계마을을 개간해서 5목장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2목장 근처에 양계장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양계장이 벌써 부족해졌어?”
“예. 생각보다 잘 크더군요. 이제 저희 하동과 광양,구례를 벗어나서 다른 고을에도 계란을 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군.”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1세기야 집약형 양계장이 일반적이지만, 15세기조선은 흔히 말하는 토종닭이 근본이다.
조금 사는 집에서 마당에 대충 풀어놓고 기르는 게 보편적이다. 게다가 품종관리를 하지 않은 터라, 맛이나 크기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조선팔도 전국에서 닭을 사와서 교배하고, 21세기식 집약형 양계장과 방사장을 반쯤 결합한 양계장을 만들었다.
물론 이 시대 조선의 닭은 엄청나게 작지만...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나중에 다른 나라의 닭을 가져와서 크게 만들어야지.
어찌됐건 이걸로 효율이 과연 나올까 싶었는데, 드디어 결실을 보나보다.
“사육장에선 진도에서 데려온 개와 어르신 사냥개 사이에서 23마리의 새끼가 태어났습니다.”
“좋아. 사냥개는 계속 키워라. 앞으로 지리산은 계속해서 개간해야 하니 사냥은 꾸준히 해야 된다. 또 훈련만 잘 시키면 사냥개도 목양견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중국놈들이 조선의 사냥개를 좋아하니, 잘 키우면 돈벌이가 될 거다. 이점이 이렇게나 많으니 반드시 명심하고 실행해라.”
원래 역사에서도 중국에선 조선 사냥개가 유명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 실제로 그랬다.
행상들이 자꾸 사냥개를 살 수 있냐고 물어보기에,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의주를 통해서 중국에 판다고 하네? 그것도 꽤나 비싼 값에 판다고 했다.
취미삼아 키우던 사냥개를 그 때부터 제대로 키우기 시작했다.
얘들 품종은 정확히 모르겠는데, 시베리아에서 온 라이카 계열이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꼭 작은 늑대처럼 생긴 녀석들 말이다. 아마 몽골 때 들어온 게 아닐까?
오히려 21세기에 유명한 진돗개나 풍산개 같은 토종견들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아무래도 특정지역에서만 키우다보니, 마구 퍼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반대로 21세기까지 혈통이 보존된 게 아닐까?
대신 삽살개 비슷한 녀석들과 시골잡종, 라이카 계열이 많이 보였는데, 그는 개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라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저 늑대를 닮은 녀석들이 사냥개로 훌륭하니까 많이 키운 거지. 일단 멋있게 생겼잖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개 잡아 먹는 놈들 없지?”
“아예... 저희 동네에선 없습니다.”
연오랑이 싸늘하게 바라보자, 다들 냉큼 고개를 숙였다. 이들은 백성들이 개를 먹는 걸 막느라, 진땀을 뺐으니까.
이 시대에 개를 먹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먹는 동물이 개다. 오히려 개를 돼지나 소보다 더 많이 먹을 걸?
다만 연오랑이 이걸 금지하는 건,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사냥개가 고작 똥개 취급을 당하며 푼돈에 팔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인식을 바꾸기 위함이랄까?
원래 역사에선, 수렵, 목축보다 농경에 집중한 조선은 가축의 품종개량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마 신경 쓴 건 농사에 필요한 소와 군사에 필요한 말 정도?
하지만 연오랑이 그걸 봐줄 리가 있나.
말도, 소도, 심지어 닭도 품종관리를 하느라 등골이 빠지고 있는데, 사냥개의 품종을 관리하는 게 뭐가 이상하겠냐.
하동,광양,구례 인근을 떠도는 들개나 집에서 제각각 키우는 개마저도 전부 관리했다. 쓸모없는 녀석들은 도살하고, 괜찮은 녀석들만 골라 교배 및 훈련시켰다.
외모,체격,체력이 우수한 녀석들은 따로 빼서 축산기업에서 직접 관리하고, 그렇게 나온 녀석들과 밖에서 잡아오거나 사온 괜찮은 개를 교배해서 더욱 품질 좋은 녀석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탈락한 녀석들은 일반가호로 돌려보냈고.
다만 연오랑의 이런 생각을 모두가 따라올 수는 없으니, 그저 매로 다스리는 수밖에.
“우리 동네가 다른 고을처럼 거지도 아니고, 대신 먹을 고기는 많지 않냐? 개를 먹고 싶으면 다른 걸 먹으라고 해라. 돈 없으면 청어라도 먹든가. 또 우리가 보내 준 개가 새끼를 치면 반드시 데려와서 훈련시켜라. 앞으로 중국과 왜국에서 “사냥개!”하면 “조선!”, “조선 사냥개!”하면 바로 “하동 사냥개!”라는 말이 나오도록 해야 된다.”
“철저히 관리하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재깍 답을 했다.
“그리고... 구서마을에서 기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청년은 자기 옆에 있던 어린 소년을 툭툭 건드렸고, 그 옆에 줄줄이 앉아 있던 소년들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