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챕터9. 보고받다 (4)
자본유학.
연오랑이 성리학의 대체제로 내세운 유학의 변형버전.
좋은 예시가 있잖아? 청나라나 조선이나 후기로 가면 성리학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온갖 개혁적인 사상이 튀어나왔다.
거기에 21세기까지 수도 없이 싸우고 변화해온 동서양의 사상을 끌어와 붙였다.
실학자들이 외쳤던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
구한말에 외쳤던 개화자강開化自强.
유학 외에 다른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잡학근본雜學根本.
농본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익모델이자, 직업의 전문화를 꾀하기 위한 사업일체四業一體와 기업가 정신.
붓만 우대하고 칼과 돈을 천시하는 세태를 바로잡기 위한 상무호국尙武護國. 무자공국武資貢國.
왕과 조정에 충성하는 새로운 세력의 명분을 위한 보국안민. 위국헌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직업윤리와 인본주의를 섞은 조선유학.
연오랑과 청년기업가들은 조선과 중국의 온갖 고서와 유학서적을 긁어모아, 비슷한 내용의 단어와 문구, 예시를 찾아 짜깁기 했다.
똑같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15세기 이후에 나올 사상들이라 똑같은 게 있지도 않을 거다. 그저 엇비슷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고서나 다름없는 경서를 시대에 맞춰 재해석해서, 끊임없이 주석을 달고 자신의 주장을 담은 저서를 완성하는 게 유학자의 사명이다.
근거가 되는 토시 하나만 있어도, 일단 유학이라고 우길 수 있다.
이들은 이 모든 걸 하나로 묶어서, 유학이되 유학의 한계를 벗어난 새로운 버전의 유학.
이른바 유학ver.5. 자본유학을 만들어냈다.
*****
그가 개소리 연설을 끝마치고 자리를 피해주자, 마을 주민들은 연설을 안주삼아 계속 잔치를 즐겼다.
연오랑의 헛소리는 언제 들어도 속 시원하고 재밌지 않나. 그 내용이 그렇게 가벼운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재밌는 건 재밌는 거다.
그렇게 다들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그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이들이 있었다.
등짐장수인지, 허름한 옷차림에 등에는 말 그대로 등짐을 한가득 싣고 있는 두 사람이다. 공작기업에서 물건을 사러왔는지, 손잡이에 기업문양이 찍힌 낫이 한가득이다.
하지만 행상답지 않게 눈매는 매서웠고, 앞에 놓인 음식을 뚫어져라 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들었나?”
“재밌는 이야기군요.”
“재미? 저런 무도한 소리가?”
꿀꺽. 한 사내는 목이 탔는지, 자기도 모르게 술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딱히 뭐... 받아들이기 힘든 거지,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끄응...”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그리 답하고선, 앞에 놓인 계란부침을 바라봤다.
이것만 해도 이미 증명된다. 잔칫상에 전도 아니고, 이렇게 흔하게 계란부침을 내어줄 고을이 어디 있을까? 그것도 왕창 먹으라고 아무렇지 않게 쌓아 놨다.
나라의 부유함을 살피려면 저잣거리의 어린아이를 보라는 말이 있다.
옷은 깔끔하고 허름한지, 얼굴은 깨끗한지, 살은 통통하게 올랐는지, 등등. 하나같이 가난에 쪄들어 살면 이룩할 수 없는 경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곳 하동과 광양, 구례의 마을은 한성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아니다. 한성의 뒷골목에는 여전히 죽은 시체가 이따금씩 떠돌곤 하니, 오히려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결론은 연오랑이 지껄인 개소리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거다.
그게 지금 조선의 기조와 부딪치는 와중에도 말이다.
“오면서 타고 왔던 해안가의 자갈도로가 이 고을 양반들이 만든 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수지도 그렇구요.”
“음...”
“게다가 옷들도 보세요. 뭔가 특이하지 않습니까?”
사내의 말에 다른 사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옷을 입은 사람이 절반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옷을 입은 사람이 꽤 된다. 특히나 젊은이들이 그러했다.
팔을 반쯤 내놓은 소매가 짧은 상의, 소매 폭이 좁은 상의, 무릎 아래를 훤히 내놓은, 바지를 반쯤 자른 것 같은 하의, 펑퍼짐하지 않고 몸에 딱 달라붙은 것 같은 하의. 등등.
여기가 진정 조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입은 옷이 다들 자유분방했다.
“하여간 여긴 뭔가 특별한 곳 같습니다. 헌데 어째서 몰랐을까요? 바로 코앞에 순천도호부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거나, 위에서 관심이 없는 것이겠지.”
사내는 한탄하듯, 말을 내뱉었다. 정답은 둘 다 일테니까.
21세기의 여수를 지금은 순천도호부라 불렸다. 본래는 여수현이었는데, 조선건국시기에 이성계에게 불복해 폐현됐다. 그리곤 수군기지라 할 수 있는 순천도호부가 세워졌지.
그러니 이쪽과 관련이 있어도,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고 못 본 척 했을 거다.
현감들도 모두 마찬가지. 알아서 저수지를 세우고, 도로를 만든 건 현감의 치적이나 다름없다. 헌데 그러한 사실이 중앙조정에 안 알려졌다? 다들 입을 다물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게 잘못된 건가?’하고 따져보면, 애매하다. 현감이 잘못을 주도적으로 저지른 건 없으니까.
자기들끼리 알아서 뚝딱뚝딱해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해결했는데, 여기에 대고 현감이 뭐라고 할까. 어찌됐건 잘한 일이잖아.
또한 조용히 있으면, 중앙조정에서 이 촌구석까지 관심이나 가질까. 그냥 “별일 없구나.” 하고 넘어가고 말지.
태종이 왕권강화, 중앙집권을 노래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반대로 말하면 아직도 중앙집권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지금 조선은 혼란기 아니냐. 중앙의 명령을 받는 수령이 뭔가 하려고 하면, 지방세력은 교묘하게 방해하고 반대한다.
21세기에도 이장이나 군수가 지역유지의 눈치를 경우가 있잖아? 15세기초기인 지금은 훨씬 노골적이다.
마을 주민을 선동해서 조정의 시책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게 만든다거나, 온갖 핑계를 들먹여 현감의 허실을 폭로해 상소한다든가.
조정에 상소를 써서 정책을 시시콜콜 따지고 든다거나, 정책의 절차에 대해서 따지고 들며 시행을 늦추게 만든다든가. 등등. 하여간 온갖 치사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참다못한 수령이 폭발해서 왕에게 다이렉트로 일러바치면?
왕과 조정은 중앙군을 출동시켜 지방 세력을 협박했다.
그럼? 끝내 못이기는 척, 얼렁뚱땅 넘어가는 거지 뭐. 이미 시간을 질질 끌면서 정책의 시행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었으면 작전성공이지.
만약 중앙군을 보냈는데도 말을 안 들으면? 중앙에선 본보기를 보이듯 사정없이 밟아버리는 거지.
이렇게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도 쉽게 시행되기 어려운데, 더 큰 문제는 아래에서 입을 싹 씻고 가만히 있으면 중앙에선 알기 힘들다는 점이다.
중앙의 유일한 끈이라 할 수 있는 수령을 매수해서, “저희 고을은 조정의 목표치에 평균정도 효과를 냈습니다.”라고 허위보고를 올리면, 조정에선 “그나마 다행이군.”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조선팔도의 온 고을이 삐걱거리고 있으니, 평타라도 치면 잘하는 거니까. 튀지 않고 조용히 묻어가면,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지.
그렇다고 수시로 조정에서 사람을 내려 보내서 지방을 감시해? 그럴 거면 품계까지 높인 수령을 왜 보냈어? 수령이 일할 맛이 뚝 떨어져서, 오히려 자기잇속만 채우려고 지방 세력에게 붙어버릴 거다.
지금은? 원래 역사보다 더욱더 중앙과 지방이 따로 놀고 있다.
“현감이 한통속인건지도 모르겠군요.”
“당연히 한통속은 한통속인데...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도 아니고, 세금을 빼돌리거나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도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고 수령을 무시하고 지방사족이 힘을 키웠냐? 하면 그것도 애매하군.”
“그렇죠? 사족이 돈을 모아서 나라의 일을 대신했는데, 욕을 먹는다? 사족들이 좋게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죠.”
“거기에 만약 이곳 일을 들춘다면, 오히려 다른 고을만 더 욕을 먹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곳 사정이 널리 알려지면 “아니. 저쪽 동네는 양반네들이 고을을 위해서 이것저것 하는데, 우리 동네 양반네들은 왜 아무것도 안하고 있냐?”라는 반응이 나올게 뻔하지 않냐.
그럼 뜬금없이 욕 처먹어서 심술 난 양반네들이, 괜히 들춰낸 조정을 원망하게 되는 거지.
일이 요상하게 꼬였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별거 없기도 하다.
하동,광양,구례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현 3개다. 조선팔도의 목,군,도호부,현등을 합치면 수백개 아닌가. 그러니 과연 여기서 이런다고 영향이 있을까. 없을까.
현실적으로 보면 분명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찜찜함이 가시질 않는다.
“곤란하군. 곤란해.”
“곤란할 게 뭐 있습니까? 따라오시죠.”
“...!”
“...!”
사내 둘은 뜬금없이 끼어든 말에,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몰래 끼워놓은 나무 몽둥이에 손이 닿았지만, 손등을 누르는 차가운 물체에 절로 굳어졌다.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다가온 두 청년이, 사내의 손등을 칼집으로 누르고 있었으니까.
“저는 윤현이라고 합니다. 이쪽 덩치 큰 형님은 연전위라고 하죠.”
“...!”
두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모를 리가 있나. 이 잔칫상의 안주 중에 하나가 바로 윤현과 연전위인데.
“행장이나 노인 좀 보여주시죠?”
“... 자네들은 포졸도 아니지 않나?”
“그러는 아저씨도 행상은 아니잖아요? 귀찮게 하지 마시고 그냥 보여주시죠.”
“맞아. 귀찮게 굴지 마시죠? 오늘 해야 될 훈련이 남아서 빨리 마무리해야 된단 말이죠.”
연전위와 윤현은 꽤나 친해졌는지,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며 사내들을 압박했다.
이 둘이 왜구를 얼마나 썰어댔는지는 이미 익히 들었지 않나. 두 사람은 당연히 고민되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누군지 아니까 장난 그만하시죠? 이 좁은 동네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의심받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보아하니 장사도 안 해본 사람들 같은데... 늦게 오면 제가 혼나는 게 아니라, 아저씨들이 혼납니다.”
어째 두 사람은 신분을 감추려 했던 모양인데, 너무 티가 나게 변장을 했나 보다. 딱 걸리고 말았다.
“... 어딜 따라 간단 말인가?”
“알면서 뭘 물어보십니까. 어르신한테 가는 거죠.”
“...!”
이 고을에서 어르신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 하나밖에 더 있나.
방금 전까지, 저 앞에서 큰소리로 열변을 토하던 그 인간. 왜구학살자. 아니, 왜구도살자라 불리는 연오랑이다.
포구의 한쪽에는 꽤나 정갈하게 만들어진 정자가 위치해 있었다. 나름 둔덕도 쌓고, 버드나무와 꽃나무도 심어 놨다.
강바람이 몰려오면 버드나무가지가 춤을 추며 자연의 음악을 만들어냈고, 그 풍경에 취한 듯 연오랑은 날카로운 칼날을 앞에 두고 상념에 빠졌다.
정신수양을 하듯, 무명포로 칼날을 쓱쓱 닦으면서 침묵을 지켰다.
괜히 폼을 잡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을 집중하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중이다.
10년대계가 드디어 마무리되고, 2막으로 넘어갈 때가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