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챕터9. 보고받다 (6)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고 있을 때, 정자로 그림자들이 찾아왔다.
역시나 숨어서 살펴보고 있었나보다. 하긴 그가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조사를 안 하면 그게 더 문제지.
“어르신.”
“오냐. 올라오라고 해라. 아. 그리고 영진이 좀 불러와라.”
“옙.”
윤현은 끌고 왔던 사내 둘의 등을 툭툭 건드렸고, 사내들은 어쩔 수 없이 신을 벗고 정자 위로 올라가 앉았다.
시커먼 어둠과 은은히 피어나는 달빛. 그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강물.
어둠에 반쯤 파묻혀 있는 연오랑의 모습은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누군지 알지?”
“...”
“나는 사람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쓱. 협박을 늘어놓기 무섭게, 연오랑은 성큼 자리에서 일어서서 칼을 겨눴다.
“보아하니 넌 붓쟁이고, 넌 칼잡이군. 전하께서 보냈냐?”
척하면 척. 앉은 자세나 옷차림만 봐도 칼잡이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
“...! 그렇소.”
대답을 망설이자... 성질 급한 연오랑은 당장에 칼을 들어 올렸고, 칼잡이라고 불린 이가 냉큼 답을 했다.
붓쟁이라 불린 이가 눈을 부라렸지만, 칼잡이는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연오랑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인물이라는 걸, 칼잡이의 본능으로 알아차린 모양이다.
“어사냐, 차사差使냐?”
어사는 흔히 아는 암행어사, 차사는 왕명으로 파견되는 임시 관직이다.
“어사요.”
“어사?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젊은데?”
어사는 왕하고 1대1로 직접 통교하는 인물이니, 당연히 굳건한 신뢰로 엮여 있어야 한다.
그럼 조정에서 일을 열심히 해서 왕의 눈에 들든가, 아니면 애초부터 왕이 집어서 키우든가. 둘 중 하나다.
이 과정이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으니, 아무리 못해도 서른 중후반은 넘어야 어사든 차사든 임명되는데... 이 자는 그 정도로는 안 보인다. 딱 봐도 변장부터가 어설프지 않나.
“...”
연오랑이 말없이 계속 노려봐서 일까? 사내는 조심스럽게 답을 이어갔다.
“... 올해 문과에 합격하고 성균관학유에 임명되어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했는데?”
“조정에 일은 많으나 사람이 없어, 운 좋게 임명되었소.”
“꽉 막힌 조선이 그렇게 만만하냐? 뭔 개소리... 아!”
연오랑은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하고 눈을 흘기다가, 갑자기 이해가 됐는지 탄성을 내뱉었다.
지금 연오랑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으니, 이제 막 과거에 합격한 새내기까지도 마구 부려먹는 모양이다.
특히나 연오랑에 대해서 알아봐야 하니, 하동에 직접 사람을 보내 살피게 했는데... 이렇게 어설프게 행동에서 바로 붙잡힐 줄은 몰랐겠지.
하는 짓을 보아하니, 사실 진짜 어사는 아니고... 어사와 차사의 중간쯤 되지 않을까? 꿀리기 싫으니 허세를 떠는 게 아닐까?
“진짜 어사라고?”
“그렇소. 봉서封書와 마패도 가지고 있소.”
“흐음...”
어째 허세가 아니었나보다. 봉서는 임명장 및 명령서, 마패는 어사의 상징 아닌가. 품속에서 척척 꺼내 머뭇거림 없이 보여주는 게, 가짜 어사는 아닌 모양이다.
“보니까 암행어사도 아닌데, 왜 어설프게 변장한 거야?”
“...”
자기 딴에는 제대로 속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 꾀를 쓴 건데...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이렇게 허탈하게 들킬 줄은 상상도 못했을 거다.
“크음. 어사인 걸 알면서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오?”
“난 관인도 아닌데 내가 왜? 오히려 몰래 염탐했는데도 패 죽이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라. 기업의 비밀을 훔쳐보는 자를 너 같으면 가만히 놔두겠냐?”
기업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분위기는 알아차렸다. 따지지 말고 입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가 이런 무도한 협박에 굴복할 수 있나.
“일개 야인이 어찌 관원을 함부로 대한단 말이오!”
“이거. 골수였구만? 야인? 전조를 합치면 삼대에 걸쳐 공신에 오른 연씨 앞에서 감히 신분을 내세우는 거냐? 우리 집안이 권세를 탐했으면, 넌 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어. 인마.”
“...”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고려와 조선에서 삼대를 연이어 공신에 오른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고대중국의 한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원소집안이 사세삼공인데, 조선처럼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삼세삼공이면 충분히 위세가 넘치고도 남는다.
물론 그 공公이 이 공功은 아니지만... 어찌됐건 대충 넘어가자.
그래도 연오랑이 진짜 관인은 아니잖아? 어사가 참지 못하고 한소리 하려는 찰나.
“관인은 지랄. 니들이 뭐 하는 거라도 있냐? 내가 다했지. 여기 와서 살펴보니까 어떠냐? 관인이 다스리는 고을보다 좋아 보이냐? 나빠 보이냐? 잘한 것도 없으면서 큰소리는. 게다가 나라의 대업인 대마도 원정도 참가 안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쯧쯧.”
“...”
팩트로 사정없이 때려주자, 어사라 자칭한 사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약한 모욕을 견디지 못한 건지, 아니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연오랑의 눈치를 봤다.
원래 역사에서, 어사의 암행은 고되긴 하지만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왕과 일대일로 통교하는 고급인재를, 아무렇게나 막 굴리다가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다보니 어사와 호위들, 역참을 통해 역졸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같이 다녔다.
또한 어사 건드려봐야 의심받는 사람은 뻔하지 않나. 괜히 건드렸다가 불똥이 튀기면 여럿 다친다.
다만 신분증명이 어렵다보니, 어사라고 구라치고 한상 거하게 받아먹고 튀는 사기극은 종종 있었다.
이런 어사제도는 세조, 성종 때쯤 돼서야 제대로 안착되고 체계화 된다.
즉. 지금은 어사제도가 완비된 게 아니라는 거지.
태조, 태종때는 행대어사를 파견해서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정비하던 시기로, 이들은 수령보다 토호 등 지방세력의 불법을 집중적으로 규찰했다.
문제는 자주화의 물결로 말미암아 원래 역사에선 없었던 자잘한 봉기나 반란이 몇 번 있었고, 이 여파로 어사들이 몇몇이 골로 갔다는 거다.
거기에 연오랑의 깽판으로, 조정은 관리가 부족해 새내기까지 어사로 임명해 파견할 정도 아닌가.
정식으로 어사가 된 노련한 인재들이 아니라, 조사차 나온 관리들을 지방에서 함부로 하지 못하게 어사관직을 내려준 상황이라는 것.
그렇다보니 어사와 호위만 달랑 붙여서 보낸 거고, 어사일이 처음인 두 사람은 지레 겁먹은 것이다.
멀쩡히 돌아다니는 어사가 대부분이지만, 어찌됐건 죽은 어사도 적지 않다.
그러니 미친놈이라고 소문난 연오랑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솔직히 말해서 신입 관리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뭐. 내가 니들을 약 올리려고 부른 건 아니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말이지.”
“...?”
“...!?”
연오랑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자, 두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 봤다.
“한번 감상을 들어보고 싶어서. 어때 내 개똥같은 이론은? 너희 십선비 양반놈이 듣기에는 어떻게 들리냐?”
“...”
십선비가 뭔 진 모르겠다만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아, 어사는 다시금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맹렬히 돌아간다.
연오랑이 떠벌린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서 놀라우면서도 과격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서늘해지면서도, 끓어오르는 게 있었으니까.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 개화자강開化自强. 이건 경전에도 나오는 말이니 유학자들이 입맛에 맞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대부들 입장에선 꽤나 신선한 면이 있다.
보국안민. 위국헌신. 이거야 그냥 들어도 좋은 말 아닌가. 나쁠 건 전혀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기도 하고.
문제는 이 다음 부분이다.
잡학근본雜學根本. 사업일체四業一體. 상무호국尙武護國. 무자공국武資貢國. 자본유학.
잡학근본을 내세운다는 건, 결국 유학을 끌어내리겠다는 뜻. 사업일체라는 건 사대부를 끌어내리고 천민,노비를 양민으로 올리겠다는 뜻.
상무호국은 사대부에게 완전한 군역을 부여하고 무를 숭상하게 만들겠다는 뜻. 뭘 어떻게 무를 숭상하겠다는 거지?
무자공국은 무를 키우고, 자본을 키워 왕과 나라에 바치겠다는 뜻. 세금을 더 내겠다는 건가?
자본유학은 이 모든 걸 위해선 결국 돈. 자본의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데... 과연 사대부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 이렇소.”
어사는 냉큼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고, 연오랑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사양반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군.”
“...”
“하지만 중요한 건 너희가 아니라 전하의 의중이지. 흠... 내가 보기엔 전하께선 좋아할 것 같단 말이지? 상왕전하는 특히나 그렇고.”
“끙...”
연오랑의 말에 어사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상왕전하. 태종은 세종에게 보위를 물려줬음에도 군권은 쥐고 있다. 아직 미숙한 세종을 도와주려는 것도 있고, 혹시나 까불지 모르는 지방호족을 때려잡기 위해서다.
그런 호족이 알아서 군역을 지고 국방세라 하여 이상한 세금을 자발적으로 내겠다고 한다.
물론 그걸 위해서 스스로 사농공상의 체제를 깨버리고서 상업, 공업을 하겠단다.
과연 상,공업 행위를 막고 농본주의를 밀어붙이는 게 이득인가, 아니면 기업을 키워서 돈을 벌고, 자발적으로 합류한 호족을 품에 안아 중앙집권화에 다가가는 게 이득인가.
체제의 유지가 이득인가, 변화의 흐름에 맞춰 새 제도를 도입하는 게 이득인가.
이게 왕권에 도움이 되는가, 나라에 도움이 되는가.
여기서 세종과 태종, 나아가 왕과 신하의 의견이 갈릴 것이다. 신하들 사이에서도 또 각자 사상이 다르니 분열이 일어날 테고.
또한 자주화의 이름하에, 이미 이와 비슷한 운동이 작게나마 벌어지고 있다. 이걸 기업이라는 큰 틀에 담을 수 있을까?
“뭐가 됐든 간에, 상왕전하나 전하 입장에선 솔직히 크게 나쁠 건 없단 말이지.”
“...”
“사업일체도 나쁘지 않을 거야.”
사농공상의 경계를 없앤다. 모두에게 군역과 세금을 부여한다? 당연히 세수가 늘어나니 좋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사대부의 신분이 내려앉으면 그만큼 왕권이 강화된다는 뜻. 반대로 천민,노비가 양인으로 편입되면 그만큼 왕권에 충성하는 백성이 늘어난다는 뜻.
더불어 말도 안 듣는 지방호족이 알아서 조정에 편입되어 중앙집권화에 일조한다.
다만 기업이라는 것을 통해 지방호족과 사대부가 주인이 되고, 백성이 사원이라는 형태로 예속된다는 건데... 이게 지금의 노비, 소작농보다 강력한 결속력을 보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 또 다시 왕과 신하, 신하와 신하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을 거다.
“문제는 잡학근본이라는 건데... 이건 내가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지.”
“...”
지금의 성리학. 유학은 십학이라 불리는 조정의 관직, 혹은 관직으로 임용되는 학문 중에서 최고를 달리는 학문이다.
과거시험이 오로지 문과,무과로만 이뤄지고, 나머지는 그냥 잡과로 퉁친다.
그랬던 성리학을 끌어내려서 잡학의 하나로 취급해 버린다? 이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무리 유학의 버전이 늘어나서 분파가 생겼다지만, 유학은 여전히 유학 아니냐.
그리고... 속물적으로 말하면 어찌됐건 이건 밥그릇 싸움이다. 쉽게 뺏길 수 없지.
“하지만 결국 네놈들은 기업으로 변모하는 새로운 사대부들에게 야금야금 먹힐 수밖에 없어. 십일을 굶으면 정승도 개밥그릇을 핥아먹는다고 했다. 돈 앞에서 장사壯士가 있을 거 같아? 다들 우리와 같은 기업가와 자본유학자로 변모할 거다.”
“...”
“스스로 고고하다고 자부하는 골수만 결국 남을 텐데, 그 놈들이 과연 힘을 쓸 수 있을까나...? 조정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게다가 조정에 더 많은 세금을 내며 고향을 발전시키는 기업가와 제자리걸음만 하는 이들. 누가 과연 백성에게 이득일까?”
“...”
연오랑의 신랄한 말에 어사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치에 맞지 않고, 도리에 맞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분명 저렇게 될 것 같다는 의심이 들어서다.
유학자들은 “돈! 그놈의 돈! 천박한 돈!” 이러면서 무시하는데, 그 통제력 막강하던 공산주의조차 자본주의에 무너지지 않았나.
유학과 접목되어 마개조된 자본주의 앞에서는, 제 아무리 정신승리의 최고봉을 달리는 골수 유학자들도 버틸 수 없을 거다.
끝까지 거부하는 놈들? 시대에 뒤쳐져서 짜부 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