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챕터9. 보고받다 (7)
대농토만 가지고 부를 축적하는, 토지기반의 지주양반을 공략하는 건 쉽다.
어떤 형태든 기업을 키워서 사원을 끌어 모은다. 사원이 되어 얻는 이득이 소작농으로 일하는 것보다 커지면, 당연히 소작을 때려 치고 사원이 되지 않겠냐?
도시집중화와 농촌공동화 현상의 마이너버전이 15세기에 맞춰 마개조되어 진행되는 것.
그럼? 당연히 노는 땅이 생기고 토지기반의 양반은 수익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때 기업양반이 등장해서 싼값에 후려쳐서 농토를 사들인다.
이걸 계속 반복하면, 결국 노비로 굴릴 정도의 농토만 소유하게 되는 거다.
만약 노비를 늘려서 땅을 일구려고 하면 냉큼 중앙조정에 “이 자식이 감히 역모를 꾸미고 있습니다.”라고 사기고발을 해버리면 된다.
중앙조정은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일단 두들겨 패서 땅을 빼앗으면 이득 아닌가.
지금의 태종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만약 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면 세종도 충분히 그럴 거고.
연오랑은 하동에 이 짓을 저질렀고, 하동의 양반집안은 “어어? 이러면 나가린데?”하고 눈치를 살피다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냉큼 달라붙어 기업으로 변모했다.
그리곤 연오랑에게 배운 짓을 똑같이 광양과 구례에 시전 했고, 그 두 지방의 양반들도 냉큼 와서 다 같이 기업으로 변모했다.
물론 3현에도 고집부리고 버티는 양반가문이 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극소수고 영향력도 없다.
몇 안 되는 노비로 굴릴 수 있는 땅 말고는 다 빼앗겼고, 그도 아니면 오기와 자존심으로 좋은 땅을 내팽개쳐서, 농부들에게 욕만 처먹고 있다.
가문이 생산하는 쌀? 안 사주면 그만이다. 애초에 생산량이 적어서 잉여량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
원래 역사에서도, 지금도 양반가문의 가장 큰 수입이 되는 고리대금? 기업에서 훨씬 낮은 저리로 빌려준다.
기업가문은 이것저것 동네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데, 양반가문은 아무것도 안하고 잘난 척만 한다.
민심이 당연히 안 좋아지니, 자리보전을 하기에도 급급했다.
이런 사례가 있기에, 연오랑은 기업양반이 자리 잡는 게 가능하다고 봤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말이지. 이 동네가 살기 좋은 것 같아? 아니면 나쁜 것 같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너 칼잡이. 네가 말해봐라. 어사는 골수 사대부라서 자존심 상해서 대답 못할 거 같으니까.”
“...흡.”
“끄응...”
칼잡이라 불린 사내. 어사의 호위는 연오랑의 갑작스런 물음에 어사의 눈치를 살피며 쉽게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이 곧 정답 아닌가.
“크크. 거봐. 너도 솔직히 여기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지? 그럼 상상해봐라. 모든 조선팔도가 이렇게 변하면 얼마나 살기 좋겠냐?”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소!”
어사는 자기도 모르게 발끈하며 소리쳤지만.
“니들이 방해만 안하면 금방 된다.”
연오랑은 그저 한마디로 비웃어주며 그를 침몰시켰다.
“뭐... 솔직히 오래 걸리긴 할 거야. 이 조그만 동네를 바꾸는데 10년이나 걸렸는데 조선팔도를 바꾸는 건 오래 걸리겠지. 하지만 눈덩이를 굴리는 건, 처음이 어렵지 나중에는 쉽다고.”
“...”
“안 그래도 자주화란 이름으로 다들 꿈틀거리고 있잖아? 기업화는 그들에게 있어 지표이자 지름길이지. 조금만 지나면 굳이 우리의 도움 없이도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날걸? 돈의 가치를 인정하는 순간, 모두가 돈에 환장하게 되어 있어.”
“...”
“아.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지. 자본유학자. 기업가가 되면 필연적으로 이윤을 탐한단 말이지? 그럼 결국 땅을 빼앗을 거란 말이지.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해. 아예 토지개혁이라도 해볼까? 흐음... 그럼 이건 오히려 골수 놈들이 더 난리를 피우겠는데? 흐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꼴을 보게 되겠구만.”
“...”
연오랑은 신난다는 듯, 히죽 웃으며 크게 기지개를 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전하의 의중이고, 우리 기업가가 전하께 충성을 보이기만 하면 전하께서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전하는 너희 같은 꼰대가 아니니까.”
암암. 세종느님을 어디 꼰대들과 비빌 수 있나.
그 양반은 유학을 머리에 품었음에도, 유학의 한계를 뚫고 나온 시대초월적인 천재란 말이지. 그게 아니고서야 훈민정음을 만들었겠냐.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던 인물인데... 지금처럼 주변정세가 혼란하고, 조선사상계가 카오스 상태라면 분명 천재답게 새로운 해답을 찾아가고 있을 거다.
그 해답으로 자본유학을 밀어 넣는 게, 연오랑의 시커먼 속내고.
흐흐. 사실 누구도 모르지만, 세종과 문종을 물들이는 음험한 작전은 이미 진행 중에 있다.
그럼 태종은 어떻게 볼까?
원래 역사에서도 태종은 그냥 유학자가 아니라 난세의 유학자로서 철저히 현실주의적인 인물이다.
그저 유학자가 예뻐서 양반세력을 밀어준 게 아니다.
그는 지방을 장악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하기 위해서, 새나라 조선을 만들 정치,경제 파트너로서 유학자, 양반과 손을 잡은 거다.
헌데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기존 파트너가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면서 지들끼리 싸우기 바쁘다.
이때 새로운 파트너가 되어줄 기업가가 등장한다면?
더욱이 이놈들은 지금껏 더럽게 말을 안 듣던 지방세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젠 알아서 왕과 조정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한다.
태종 입장에선 ‘정신 못 차리고 지들끼리 싸우기 바쁜 파트너를 갈아 치워볼까?’ ‘제2의 파트너로 삼아서 경각심을 줘봐?’ ‘적어도 돈놀이는 쟤들이 나을 거 같은데?’ 라고 고민하지 않을까.
태종 또한 원래 역사와 다르게 유학적 생각한계를 확장했잖아?
밀어주진 않더라도, 다짜고짜 패죽이진 않을 거다. 자신에게 뭐가 이득일지, 냉정하게 득실을 따져보고 있겠지.
“...”
“기대되는구만. 과연 너희 골수들이 자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까? 없을까?”
연오랑이 눈을 반개하며 맹수 같은 눈빛을 뿌리자, 어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먹잇감이 된 기분이다.
그 때. 그를 살려주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부르셨습니까.”
“어. 영진이 왔냐. 이쪽은 한성에서 오신 분이다. 우리 기업에 관심이 있다고 하시더군.”
“한성에서 말입니까?”
영진이라 불린 청년이 깜짝 놀라 눈을 번뜩이자, 어사와 칼잡이는 어쩔 줄 몰라서 몸을 비틀었다.
물론 연오랑은 그 모습을 보며 킬킬거리며 웃었고.
“거. 어설프게 훔쳐보지 말고 정확히 배워라. 전하께서도 우리 기업가에 대해서 제대로 아셔야 하니까. 너의 촉감으로 우리가 세운 기업의 허와실을 낱낱이 파악해봐. 혹시 알아? 우리가 모르는 약점이 있을지?”
연오랑은 허리를 굽혀, 어사에게 귓속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만약 거짓과 음해를 한다면, 내가 한성에 올라가는 날. 네 집안과 사돈의 팔촌까지 모조리 죽이겠다. 내가 왜구를 얼마나 썰었는지 알지? 난 사람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네 혈족을 몰살시키고 중국으로 떠나면 그만이다. 사실 그대로만 봐라.”
물론 살이 부들부들 떨리는 협박을 잊지 않고 날려준다.
왜구도살자라는 별칭 아닌 별칭이 이럴 때는 또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
며칠간 자잘한 정리 작업이 이어졌다.
왜인포로들은 생각지도 못한 후한대접을 받아 얼떨떨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대마도에서 살 때보다 더 잘 지내니, 안 좋을 게 뭐람.
비록 연오랑과 안 좋게 인연을 맺긴 했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이다. 나아가 이들은 대마도주와 가신무사에게 지배받던 사람들이라서, 딱히 애착이나 복수심도 없었고.
그저 연오랑의 부하 선생들과 함께 열심히 조선말을 익히느라 바빴다.
중국인포로도 마찬가지. 그치들은 고향으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조선에서 사는 걸 반겼다.
왜냐고 물어보니, 그쪽도 난장판이라나 뭐라나. 지금 가봐야 좋은 꼴을 못 본다고 했다.
마음이 편했다면 몸도 편했다.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게 아니라, 대마도에서 해왔던 일을 그대로 하는 거니까.
조선공은 배를 만들고 어선을 관리하고, 공방에서 일하던 장인들은 보다 수준 높은 공작기업에서 일을 배우고, 집을 만들던 이는 목장에게 일을 배운다.
다만 글을 아는 하급관료 이백여명은 따로 일을 배웠다.
저수지를 만들고, 보를 쌓고, 도로를 닦고, 집을 만드는 일. 건설기업을 이끄는 청년 기업가에게 속성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건설기업이야 말로 앞으로 페이즈2에 있어서 중추를 담당할 기업 아닌가. 공짜로 중간관리자가 수백명이나 생겼으니, 마구 굴려야지.
기업은 알아서들 잘 굴러가고, 조정에선 아직도 연락이 없다.
연오랑이 세운 공적이면, 당장이라도 궁으로 불러서 어사주라도 한잔 때려도 부족하지 않아?
그런데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공적을 분류하는 것 자체도 골치 아픈 모양이다.
하긴 이번에 공을 세운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잡색군, 정군이야 뭐 대충 어떻게든 처리한다고 해도, 무관만 수백명이 공을 세웠다.
그놈들 하나하나가 다 양반출신. 예전처럼 다 주자니 예산이 거덜 나게 생겼고, 안 주자니 사기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 골치 꽤나 아플 거다.
앞으로 대략 두달 안에 황해도로 이주하겠다는 말을 했는데도, 마을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연오랑이 항상 “이사 갈 거다.”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닌 터라, “드디어 올게 왔구나.” 하는 모양새다.
어사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철저히 파헤치겠다는 듯이, 하동일대를 열심히 쑤시고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아무리 봐도 수상하여 연오랑에게 보고가 올라왔지만, 그냥 다 보여주라고 말해뒀다.
이렇게 모두 정리가 마무리 되자, 슬슬 또 움직일 시간이 됐다.
조정이 정신을 못 차릴 때. 후다닥 일을 처리해야지.
“자. 그럼 준비는 다 끝났냐?”
“예. 어르신.”
연오랑의 말에 청년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디 싸움터라도 나가는지, 안장에는 기창과 장도가 박혀 있고, 등에는 활과 전통을 매고 있다.
그 뒤로는 짐마 2마리가 끄는 수레가 수십대. 각 기업에서 생산한 온갖 물품과 앞으로 광양과 하동의 캐쉬카우가 될 청어절임까지 꽉꽉 채워 놨다.
심지어 저 뒤에는 벌통 여러개가 겹겹이 쌓여 있다.
길이 험할 게 분명할 터, 청어절임 항아리를 적재할 특수 마차까지 제작해 놨단 말씀.
마차를 끄는 마부는 각 기업에서 뽑아온 수십명의 장인들. 이번 일은 그냥 장사나 하러 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연오랑 일행 말고도 비슷한 규모의 무리가 두 개나 더 있었다.
“그런데 어사를 그냥 놔둬도 되겠습니까? 저희가 떠나면...”
청년은 말을 흐렸고, 연오랑은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분명 또 딴소리를 하거나 이상한 짓거리를 할 거라는 뜻이리라.
“윤현. 연전위. 데려와라.”
“옙! 넵!”
어려울 거 있냐. 가기 전에 협박을 한 번 더 내질러 주면 그만 아니겠냐.
일행이 떠나는 건 꽤나 진풍경인지라, 어사도 마을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명을 내리기 무섭게 반쯤 끌려왔다. 물론 곁다리로 칼잡이도 같이 왔고.
“생각해보니까 네 이름을 몰라서 말이지. 이름을 알아야 네 집안을 족칠 수 있을 거 아냐? 너. 이름이 뭐냐?”
“...김숙자요.”
“숙자? 뭔 여자이름 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