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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49화 (49/538)

49. 챕터10. 출발하다 (1)

어사는 나이도 한참 어린 연오랑이 비웃자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의 협박을 용케 알아듣고선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에게 사사했냐.”

“야은 길재 어른이오.”

김숙자는 “감히 길재 어른까지 모욕할거냐?”라는 눈빛을 뿌리며 눈을 부릅떴고.

“오...?”

“길재 어른?”

“거짓말 하는 거 아냐?”

청년들은 김숙자를 다시 봤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실없는 짓을 하는 걸 봐선 영... 별거 없는 인물처럼 보였는데, 어째 배경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그저 먼 산을 보면서 연신 머리를 굴렸다.

‘길재라...? 설마 그 길재?’

역사를 잘 모르는 연오랑이 알 정도면 진짜 네임드 인물이 아니냐. 이 시대에도 그렇고 21세기에도 그렇고.

고려삼은高麗三隱이라고, 고려의 세 충신을 말할 때 꼽히는 사람 아닌가.

뭐. 이숭인과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 하지만, 어쨌든 인물은 인물이지.

“이색, 정몽주, 이숭인하고 함께 했던 그 길재 어른?”

“그렇소!”

김숙자는 연오랑이 그래도 길재를 알아준 게 기쁜 걸까? 어째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금 노려봤다.

길재의 빽이 있으면 함부로 못 건들 거라고 생각 했나 본데... 착각을 아주 제대로 했다.

“이거이거. 근본 있는 십선비였네?”

연오랑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김숙자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길재의 제자면 골수 중에 골수 아냐? 이거 데리고 다녀야겠는데? 길재는 얼마 전에 죽었잖아?’

길재가 죽은 건 이 시대엔 나름 큰 사건이라서, 연오랑도 소문은 들었다.

그런 길재의 제자가 여기에 나타났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면 세종이 보내는 메시지일까.

거기에 그가 알기론, 길재는 자주화의 흐름에 오히려 더욱 굳건하게 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했던 인물이다.

근본성리학. 유학ver.4.0에 속하는 사람이랄까? 그런 인물의 제자라...

어찌됐건 좋은 기회다. 이놈도 나중에 분명히 길재처럼 고향으로 내려가 후학을 양성할 게 분명하다.

이놈을 뜯어 고치면 먼 미래에 생겨날 십선비 학파 하나를 잘라버릴 수 있지 않을까?

“어이 십선비 나리. 우리와 함께 가야겠다. 반문은 받지 않는다.”

“...!”

김숙자는 “뭔 개소리냐?”하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어느새 윤현과 연전위가 히죽 웃으며 그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조용히 질질 끌고 갔다.

“칼잡이. 넌 이름이 뭐냐.”

“양원경이오.”

“소속은?”

“내금위요.”

하긴 어사의 호위로 올 정도면 내금위에 속해있는 게 맞을 거다. 왕명을 받아 움직이는 어사를 국왕친위군이 호위해야지.

“오... 내금위? 칼질 좀 하는 양반이었네. 고향은?”

“의주요.”

‘의주라?’

연오랑은 그의 말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어째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봉을 잡은 것 같다.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운이 따라주네?”

“...?”

양원경은 뭔 말인지 못 알아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연오랑은 무시하고 질문을 이어갔다.

“고향이 의주면 토관이었나?”

“그렇소.”

“흐음...”

연오랑은 양원경을 흡사 마소 살피듯, 유심히 흘겨봤다. 그 눈길이 꺼림칙해서 양원경은 못 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토관은 북변에 설치된 지방군, 지방행정 조직인데... 변경지방의 토착 유력층을 포섭해서 지방 지배와 군사 조직의 강화를 꾀하고, 밖으로는 이민족과의 연결을 방지하려는 회유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됐다.

조금 과장하면 소규모 지방자치 정부 비슷한 거다. 물론 이는 곧 사라지고 중앙조정의 지배를 받는 향리로 대체된다.

중요한 건, 내금위에 속했다는 건 칼질뿐만 아니라 집안도 나쁘지 않다는 거지.

원래 역사에서 평안도, 함경도는 조선에서 차별받는 지역이었다.

차별의 이유? 북변 사람은 성리학을 모르는 금수네, 이민족과 붙어먹는 놈들이네, 고려를 추종하는 놈들이니 등용하면 안 되네, 태조가 서북민은 등용하지 말라고 했네. 조사의, 이징옥, 이시애의 난 등을 일으킨 반동분자네. 등등.

하여간 별 이유를 다 가져다 붙였는데, 이는 16세기 이후 사림이 득세하면서 제대로 심해졌다.

허나 속내를 까보면 간단하다. 밥그릇 싸움이다.

조선은 관직 자리가 얼마 없는데, 그 없는 자리를 삼남의 사림출신이 아닌 북변 출신에게 넘겨 줄 리가 없지.

사림이 몰락한 후엔 한성과 경기도 출신이 조정을 장악하는데, 그 때도 차별 받았다. 똑같은 이유를 들먹였지.

백성들 입장에서도 불만이 많았다.

가장 큰 건, 명나라 사신이 오갈 때마다 평안도가 거덜 난다는 것.

이게 얼마나 문제였냐면, 중앙조정으로 세금을 보내지 말고 평안도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을 정도다. 이러면 당연히 지방조직과 중앙조직이 따로 놀 수밖에.

거기에 여진족은 심심하면 쳐들어오고, 여진족을 막아야 한다면서 요역을 엄청 시키고, 이런저런 정책에서 후순위로 밀려서 차별 받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다른 지방 사람들이 자기들을 욕하면... 화가 안날 수가 있나.

그렇게 쌓아온 차별로 홍경래의 난이 터지고 뭐하고 해서, 조선중,후기의 북변 지방은 중앙조정과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시작점부터 다르다.

일단 차별의 첫 명분이 될,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지 않았다.

홍무제와 태조는 사이가 좋진 않지만... 어찌 보면 경쟁자이자, 신왕조 창업자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둘의 일생은 드라마틱하게 비슷했잖아?

그랬던 홍무제의 명이 내전으로 폭삭 망하고 천명을 잃어버렸다.

그걸 보면서 태조가 무슨 생각을 했겠냐. 심하게 열병을 앓고선, 거의 득도한 고승처럼 되어버렸다.

원래 역사와 다르게, 태종과의 관계조차도 좋게 해결하고 허허. 웃으며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그래서 서북민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언도 없었고, 북변이 미운털 박힐 일도 없었다.

게다가 명나라 사신이 오가지 않기 때문에, 평안도의 독자적인 세수권도 없어졌다.

세금이 중앙조정으로 흘러간다는 건, 중앙조정이 평안도를 따로 놓지 않고 직접 관리한다는 뜻.

하여, 원래 역사에서 벌어졌어야할 본격적인 차별의 역사는 시작조차 못했다.

하지만 북변은 여진족, 요동과 맞붙어 있어서 성리학적인 문화와 체제가 자리 잡지 못한 건 분명한 사실. 그래서 차별까진 아니어도 은근히 무시 받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놈을 미끼로 평안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해야겠군.’

“좋아. 너도 우리와 함께 간다. 불만 없지?”

불만이야 하늘을 치솟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있나.

양원경은 그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가 호위해야 할 어사는 저기 윤현과 연전위에게 끌려가 강제로 말에 타고 있으니까.

“영규. 영명.”

“옙!”

연오랑이 손짓하자, 말을 탄 청년 둘이 재빨리 다가왔다.

“너희는 어사를 관리해라. 진짜 사대부로 만들어봐.”

“흐흐. 굴려도 됩니까?”

연오랑에게 세뇌된 녀석들은 정말로 호랑이 간을 삶아 먹었는지, 어사를 패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당연한 거 아냐? 머릿속에 퀘퀘한 먼지 밖에 안 들어있을 테니까 털어내야지. 그래도 얼굴은 건들지 말고, 죽도록 굴려봐.”

“옙. 맡겨만 주십쇼. 어르신.”

둘은 기똥차게 대답을 하고선 얼른 자리를 옮겼다.

잠시간의 혼란과 정리가 끝나자, 저쪽에서 따로 모여 있던 청년들이 다가왔다. 이치들은 또한 연오랑 일행마냥 마차와 말 수십필과 함께 하고 있었다.

연오랑이 손짓하자, 양쪽 무리에 있던 청년들이 우르르 말을 타고서 달려왔다.

“김호영 부장.”

“옙.”

“전라도 남해와 서해를 돌면서 수산기업을 만들어라. 어렵지 않을 거다.”

21세기에도 그렇지만 15세기에 배를 타는 건, 몇 배는 더 고되고 힘든 일이다.

하여 이 시대엔 수군과 어민을 천민 비슷한 걸로 취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의 어선과 물류체계, 보관체계를 가진 수산기업이 만들어진다?

이걸 마다할 어민은 아무도 없다. 돈을 떠나서 대접이 달라지는 대격변일 테니까.

“해안가 양반가문, 사족들은 내륙에 비해 낙후되고 무시당한 세월이 오래다. 거기에 왜구의 침입도 많이 받아 자존심과 배타성도 강하지. 반대로 그만큼 백성들과 친밀하다. 그러니 조금만 구슬리면 쉽게 기업을 만들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연오랑의 말에 수산기업 부장 중 한명인 호영이 재깍 고개를 숙였다.

원래 역사에선, 명은 해금정책을 실시했고 조선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와 더불어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실시했다. 섬을 죄다 비워놓고 내륙으로 이사 가라는 거다.

다만 이걸 태종만 실시한 건 아니다. 고려 때부터 왜구나 해적의 침탈에 방어하기가 힘들어서, 섬뿐만 아니라 해안가에서도 꾸준히 진행되곤 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울까.

중앙조정에서야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건데 뭐가 어려워?”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정작 거기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집이고 땅이고 다 버리고 근거지를 옮기라는 것 아닌가.

양민들도 그렇지만, 토호나 양반가문도 꾸준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시간이 흘러 이제야 겨우 살만해 지는 동안, 조정에선 딱히 도움도 안줬다.

그러니 조정의 시책이고 자시고, 돈을 벌 수 있다면 뭐가 됐든 환영할 거다. 이념과 이상보다는 현실에 더 충실한 변두리 양반집안이니까.

“오강민 부장. 남해와 서해의 사복시 목장을 잘 살펴봐라. 분명 사정이 좋지 않은 곳이 태반일 터, 적당한 대가를 주고 구입할 수 있는 곳은 구입해라. 구입하기 힘들면 흔들어보고.”

“흐흐. 알겠습니다.”

축산기업의 오강민 부장은 속뜻을 알아듣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전라도 목장의 역사는 무려 통일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

그 유명한 해상왕 장보고는 대규모 기병을 육성했는데, 서남해안의 목장에서 기른 말로 만들어진 거다.

이런 목장들은 폐쇄되었다가 부활했다가를 반복하며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앞으로 수산기업이 해안가에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사람이 안 살던 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 목장터가 밀려날 게 분명한 일. 그러니 혼란을 틈타 이득을 취해야지.

뜯어 올 수 있으면 뜯어오고, 힘들면 더욱더 흔들어야지 않겠나.

“김민철 부장. 너도 호영과 마찬가지다. 경상도 남해와 동해를 돌면서 수산기업을 만들고, 동래(부산), 울산, 청하(포항)일대를 돌면서 고래사냥을 해본 어부가 있는지 알아봐라. 있으면 끌어들이고.”

“옙.”

“또 동래에는 왜관에 있던 왜인포로가 잡혀 있는 걸로 안다. 왜인 중에서 고래사냥에 능한 이가 있을지 모르니 한번 알아봐라. 그쪽은 내 이름이 나름 알려 졌을 터, 문제가 되지 않으면 맘껏 팔아도 된다. 돈이 필요하면 알아서 처리하고.”

“알겠습니다!”

수산기업 부장인 민철 역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일을 처리하라는 속뜻을 냉큼 알아들었다.

“성이환 부장.”

“옙!”

“전라도 부안, 고창, 진안에 가서 도공을 모으는 일. 자신 있나?”

“물론입니다!”

청년은 이번에 새롭게 기업을 만드는 계획을 책임지는 터라, 말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서 목청을 높였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기업은 어찌됐건 한 집안, 가문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번에 만드는 기업은 오롯이 청년과 또래들이 중심이 되어 설계해야하니, 그 무게에 어깨가 쳐질 지경이다.

어떤 기업이냐고? 하동에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업종. 바로 도자기를 만드는 자기기업이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유명하지 않나. 중국 도자기도 유명하지만, 그만큼이나 유명한 게 바로 한반도 도자기다.

일본 얘들이 특히나 환장하는 게 바로 도자기 아닌가. 이런 캐쉬카우를 놓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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