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챕터10. 출발하다 (2)
“알다시피 조정의 사옹원에서 사기장沙器匠을 모으고, 관요官窯를 체계화 시키고 있다.”
관요는 도자기를 구워내는 가마터이자 관영조직이다.
사옹원은 도자기번조를 맡은 중앙기관으로, 이 아래에 한성에 위치한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에 위치한 외공장外工匠이 있다.
조선은 이들을 이용해서 관아에 필요한 물품을 공납의 형식으로 조달 받았다.
그러니 보다 빠르게, 조정이 왜인포로로 정신을 못 차릴 때. 관요로 빨려 들어갈 실력 좋은 장인을 먼저 낚아채야 한다.
“우리가 느려터진 조정에게 지는 게 말이 되냐? 자잘한 장인들은 넘기더라도 실력 좋은 이는 반드시 포섭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원노비 중에선 분명이 능력이 있는 자가 있을 터, 천금을 아끼지 말고 사들여 사원으로 만들어라. 부안, 고창, 진안은 전조 때부터 도요陶窯로 유명했던 곳. 혼란의 시기를 겪으면서 도자기를 버리고 노비나 농부가 된 이들이 부지기수겠지만, 그 기술이 전부 사라지진 않았을 거다. 반드시 찾아라.”
고려의 사찰에 속해 있던 노비를 조정에서 싹 빼앗아서 양민이나 공노비로 만들었는데, 이 수가 수만명이다.
당연히 온갖 업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니, 그 중 실력 있는 이들을 찾아서 쏙쏙 챙겨야 한다.
나이를 먹었어도 저들 중에선 분명히, 그 유명한 고려청자를 만들던 장인이 있을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하윤중 부장. 너도 이환과 마찬가지다. 경상도 김해, 합천, 동래를 돌면서 자기기업을 만들어라.”
“넵!”
드디어 모든 청년이 떠나가고, 부장들이 도착하기 무섭게 두 무리는 양쪽으로 쪼개졌다.
한쪽은 전라도 남해로 한쪽은 경상도 남해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두 일행이 모두 떠나고 난 후. 남아 있던 청년이 다가왔다.
떠날 사람들에게 다시금 주지시켰으니, 이젠 남아 있을 사람들에게 확답을 받아야 할 시간.
“박영진 부장.”
“옙.”
“왜인들을 잘 가르쳐라. 건설기업은 이제 곧 할 일이 많아질 거다. 특히나 조선말을 최대한 빨리 익힐 수 있도록 노력하고. 행상을 통해서 각 지방의 특산물과 공물에 대해서는 계속 알아보고.”
“넵! 걱정마십쇼.”
“그리고 앞으로 많은 고을에서 기술을 배우러 올 터, 늦지 않게 숙소를 완성해 놔라.”
“걱정 마십쇼. 남을 정도로 팍팍 지어놓겠습니다. 왜인포로들도 기술을 익혀야 하니, 차라리 잘 됐습니다.”
“오냐.”
건설기업 부장이자, 연오랑의 비서2를 담당하는 박영진은 재깍 대답하고선 자리를 비켜줬다.
“곽영수 부장. 앞으로 수산기업이 수도 없이 생길 거다. 의심을 품지 마라. 해안가의 양반가문은 지금도 알게 모르게 차별 받고 있으니 반드시 우리 손을 잡을 거다. 그러니 뭘 해야겠나?”
“최대한 빨리 어선을 개조하고, 그물 만드는 장인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른 조선소가 만들어질 테니, 조교와 교관들도 미리 준비해 놓겠습니다. 왜인포로들을 더 빨리 가르쳐야겠군요.”
연오랑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짜식들.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잘 가르쳤구만.’
연오랑은 속으로 자화자찬을 날렸다.
곽영수는 조선기업을 책임지고 있는데, 조선기업은 공작,수산,임산기업과 다 얽혀 있어서 규모로 따지면 기업 중에서 가장 거대했다. 사원만 삼백명이 넘어가니까.
녀석은 광양 곽씨 집안의 장자로 연오랑과 동갑인데, 특이하게 양반 집안 주제에 조선업에 종사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원래 대목장에서 시작해 조선업으로 발을 넓힌 녀석의 조부와 아버지가, 조선이 건국될 때 공을 세워 양반 집안이 된 거다.
원래 양반집안이 아니어서 일까? 다른 녀석들보다 빠르게 연오랑에게 감회됐다.
박영진도 비슷한 처지다. 애초에 녀석은 양반도 아니었고, 그냥 조금 부유한 양민집안의 자제였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연오랑의 1대 제자? 1대 학생?쯤 되려나? 그래서인지 그 누구보다도 자본유학과 기업가라는 것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이놈들은 21세기에 던져놔도 한자리 해먹을 녀석들이지.’
“하나 더. 내가 곧 황해도로 넘어갈 예정이니, 미리미리 조선기업을 분할할 준비를 해놓도록.”
“옙!”
연오랑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곽영수를 보내고, 다음 청년을 불렀다.
“안윤강 부장. 우마는 계속 교접시키고... 우두에 걸린 소는 잘 관리하고 있지?”
“예...”
안윤강이라 불린 청년은 힘없게 답을 했다. 자기 딴에는 나름 반항하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우두에 걸린 소를 왜 그냥 내버려두고, 한술 더 떠서 왜 우두를 다른 소에도 더 옮기는 걸까?
우두에 걸리면 소의 배와 옆구리에 궤양이 생겨서, 보기 흉할 정도로 수포와 발진이 일어난다.
당연히 송아지에게 젖을 물릴 수도 없고 팔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소를 계속 더 만들라고? 자기 물건을 자기가 망가뜨린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 축산기업가로서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는 안윤강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수밖에.
연오랑이 쓸데없는 괴상한 짓을 벌여도 결국에는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는 걸 누누이 봤다.
하지만 이유를 안 알려주니, 안윤강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곧 쓸 일이 있을 거다. 아마 조선팔도를 뒤흔들게 될 걸?”
“그럴까요...?”
연오랑은 다 이해한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청년의 불안과 불만을 날려줬다.
이 시대에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두창을 막아낼 방법을 안다고?
종두법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바이러스와 백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인수공통전염병을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게임 미디블워를 통해서 알았고, 인터넷을 통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배웠다고? 그리고...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무시무시한 인체실험을 자행하면서 완성했다고?
뭐라고 설명해도 납득하지 못할 거다.
결론은 그저 결과로 보여주면 그뿐.
하지만 조선팔도를 뒤흔들고 연오랑의 이름이 사서에 박힐 대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넘어가야 할까?
미안하지만 연오랑은 그렇게 착한 인물이 아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철저히 이용해 먹어야 하는 법.
이 카드는 제대로 써먹어야 한다. 어떻게든 확실한 대가를 받아내야 하고.
“반드시 잘 관리하고 넉넉하게 전염시켜야 한다. 이 일에 우리 기업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
“예에...”
다시금 확답을 받고서 연오랑도 몸을 일으켰다.
전부 마무리 됐다. 이제 페이즈2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시간이다.
“가자.”
“옙!”
우렁찬 대답과 함께, 작게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대인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21세기와 15세기의 한반도 지형은 다르다.
21세기까지 오면서 간척을 얼마나 많이 했냐.
반대로 말하면 이 시대의 남,서해안은 복잡하기 짝이 없어서, 뱃길을 모르면 제대로 항해하기도 힘들 정도다.
또한 해안가뿐만 아니라 내륙도 상당히 다르다.
“아니 어차피 똑같은 땅인데 뭐가 달라?”라고 묻겠지만, 15세기에는 숲이 존재했다.
평지에 나무가 빽빽하게 박혀 있는 숲. 21세기에는 정말 보기 힘든 그런 숲이 널려 있는 게 지금 시대다.
왜 이러냐고? 빌어먹을 호랑이, 늑대, 표범, 곰. 한반도 맹수 4종세트 때문에 이 모양이 이 꼴이다.
중앙조정에서야 사람을 숫자로 보니, “화전 만들고 백성들 이주시켜서 쑤셔 넣어.”라고 강제하지만, 효과가 제대로 나올까.
열심히 개간하고 화전을 만들면 뭐할까. 어느 날 맹수가 나타나서 사람과 우마를 물고 간다고 생각해봐라.
21세기에는 고작 중범죄자가 자기 동네에 산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여긴 말도 안 통하는 맹수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불안해서 살수가 있나.
이와 똑같은 이치로, 원래 역사에서 4군6진을 개척하고도 그 땅을 조선땅으로 만드는 데 백년 넘게 걸렸다.
거긴 맹수 대신에 여진족이 와서 깽판을 쳐댔으니까.
그런 숲을 옆에 두고 연오랑 일행은 잠시 멈춰 서서 작업하고 있었다. 이걸 작업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수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전위야. 이게 뭐하는 거냐?”
“저도 잘 몰라요. 원경 형님. 그냥 구경 중입니다.”
칼잡이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걸까? 어사의 호위 양원경은 윤현, 연전위와 꽤나 친해졌다.
연전위는 덩치는 천하장사 못지않은데, 알고 보니 은근히 수다쟁이 아닌가.
윤현은 연오랑의 오른팔이나 다름없고, 한편으론 연전위의 직속 선배? 스승? 비슷한 역할을 하는 터라, 양원경도 어느 틈에 둘 사이에 껴서 함께 지냈다.
어사의 처지와 정반대로, 양원경은 꽤나 즐겁고 재밌는 여정을 보내는 거지.
따지고 보면, 일찍이 무과에 합격한 내금위 출신이 올해 막 과거에 합격한 벼락치기 어사의 졸개로 있는 꼴 아닌가.
그런 판국에 눈치도 없지. 자신이 길재의 제자라고 “엣헴.엣헴.”거리면서 거들먹거리고, 또 한편으론 양원경이 북변출신이라고 은근히 내려 보던 게 어사 김숙자다.
말은 안했지만 양원경이 그를 모시는 게 좋았을까? 싫었을까?
하여 속편한 양원경과 반대로 어사 김숙자는 시도 때도 없이 구박받고, 욕먹고, 가끔씩 훈련을 빙자한 체벌을 받았다.
보라. 남들은 다 일하는 데 바쁜데, 어사는 저쪽에서 혼자 마보 비슷한 걸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 옆에선 영규와 영명이라 불리는 두 청년이 시시때때로 질문을 던지고, 자세가 틀어질 때마다 엉덩이와 허벅지를 칼집으로 두들겨 패고 있다.
처음에는 일행의 무도함과 우악스러움에 양원경과 김숙자 모두 반발했다. 아니. 어사를 이렇게 취급하는 망나니들이 어딨어?
하지만 연오랑의 등장에 꼬리만 강아지처럼 쪼그라들었다.
특히나 양원경이 그러했다. 그는 토관으로 나름 싸움질 좀 해봤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연오랑의 싸늘한, 아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분노에 차서 이글거리는 여진야인의 불타는 눈도 봤다. 희열과 결의에 찬 동료 무관의 단단한 눈빛도 봤다. 매일 같이 사냥하며 피와 가까이 해온 사냥꾼의 매서운 눈빛도 봤다.
하지만 연오랑은 그 어떤 칼잡이의 눈빛과도 달랐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도 연오랑이 대마도에서 왜구 수백을 홀로 썰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이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연오랑이 “사람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라고 했던 말. 그건 결코 허세나 과장이 아니었다.
이러니... 설명하기 힘든 이질감과 불쾌함에 양원경은 속에서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양원경이 느낀 이 기분.
이건 21세기 사람으로서 15세기 사람을 보는 연오랑 자신의 속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노련한 훈련관” 특성의 “공포유발” 효과 때문인지는 연오랑 자신도 몰랐다. 양원경은 당연히 모르고.
아무튼 반항하려던 칼잡이 양원경이 재깍 입을 다물고 고개를 바짝 숙이자, 양원경만 믿고 뻗대고 있던 김숙자가 어떻게 됐을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저게 어딜 봐서 어사일까. 하의만 대충 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꼴이 풋내기 신병이나 다름없다.
지난 일을 애써 지우려는 듯, 양원경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혼자 있는 공유성에게 다가갔다.
연오랑에게 물어보기에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기 때문.
공유성은 이제 막 약관이 된, 냉랭한 분위기를 뿌리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칼질도, 사람 부리는 것도 훌륭했다.
어떻게 아냐고? 양원경이 직접 칼을 맞대면서 확인했으니까.
그는 일행의 청년들을 단 한명도 시원하게 이기지 못했다. ‘내금위 체면을 내가 다 떨어뜨린 건가?’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