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챕터10. 출발하다 (3)
“유성 형님.”
“왜?”
“크음...”
양원경과 함께 쪼로록 다가간 연전위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지난 몇 달간 겪은 일은 그의 인생 전체보다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잠깐 떠돌기 전엔, 평생을 그저 작은 마을에서 철만 두들기며 살던 평범한 조선인 아니던가.
대마도 정벌과 하동에서의 경험은 별천지나 다름없으니, 공유성을 대하는 것도 어색할 수밖에.
그런 연전위를 보며 공유성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결국 피식 웃음소리를 내며 이를 내보이고 말았다.
“하하. 뭔데.”
“지금 뭐하는 건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하긴. 너도 이제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지.”
“네에...”
연오랑은 연전위에게 다른 건 안 시키고, 양손검술이 손에 익을 때까지 수련만 시켰다.
구경하고 대충 돌아보긴 했다만,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턱이 있나.
“자. 기업은 돈이 되는 물건을 찾아서, 그 물건을 관리,집산,보정,대량생산하는 게 목적이다. 이해했냐?”
“예.”
“이해했네.”
뜬금없이 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모르겠다만, 옆에 있던 양원경도 냉큼 답을 했다.
말없이 물끄러미, 대답을 종용하고 있는 공유성의 눈길을 느꼈으니까.
“지금 하는 작업이 그 기초다. 우린 이 지방에서 유명한 게 뭔지 모른다. 하지만 좋은 표본이 있지. 뭘 거 같냐?”
“글쎄요?”
“...”
둘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고, 공유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공물이다. 나라에 바치는 물건이니 당연히 이 지방의 특산물 아니겠냐? 그럼 그 특산물을 다루는 사람도 많다는 뜻이니, 그들을 이용하면 특산물을 생산하는 기업을 쉽게 만들 수 있지.”
“오...”
“그렇군!”
둘은 ‘왜 이렇게 당연한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감탄사를 내뱉었다.
원래 역사에서, 당나라의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제도는 동아시아 전체로 뻗어나갔고,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천이 이뤄졌다.
지금 조선의 세금을 가볍게 정리하면 전세田稅와 역役, 공납이다.
전세는 땅에서 나는 작물을 수취하는 것, 역은 군역, 요역같이 몸으로 때우는 것, 공납은 토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거다.
나중엔 전부 다 문제가 되지만, 공납은 방납의 폐단이라는 문제로 나타난다.
더 이상 공물로 바칠 게 없는데, 원칙대로 자꾸 바치라고 하면 백성들만 죽어나는 거지.
“지금은 하는 작업은 공물의 명단을 보고서 이 지역에 진짜로 공물이 있는지, 이게 상품성이 있는 지 확인하는 작업이지. 더불어 돈이 될 만한 게 또 있을까 알아보는 거고.”
“오호.”
“흐음.”
연전위는 그저 놀라워서 감탄을, 양원경은 전혀 색다른 관점에서 공납을 해석하는 걸 보며 신기함을 표했다.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하는 약간의 자책과 함께.
그런 양원경의 눈빛을 알아차린 걸까? 공유성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기죽을 거 없습니다. 양 호위. 솔직히 말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문제는 배경과 자금과 의지의 유무죠.”
“배경, 자금, 의지라...”
‘쉽지 않은 일이야.’
양원경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천한 일을 한다고 욕해도 상관없어!”라는 강인한 의지와 “내가 이렇게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건데?”라는 든든한 배경과 “난 이 정도 돈은 다 날려도 상관없어.”라는 두둑한 자금.
이 세 가지를 전부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건에 맞는 사람은 이미 가질 거 다 가진 사람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돼? 내가 왜?”라는 귀찮음과 의심이 먼저 들 거다.
“그럼... 저기 저 노인은 누군가?”
“아. 의원이자 약초꾼이자 약재상이시죠. 겸사겸사 선생이기도 하고.”
“아하.”
“...?”
연전위는 몇 번 본적이 있어 냉큼 이해했고, 양원경은 또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행은 대충 세어도 백명이 넘어간다. 양원경이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친분을 가졌겠는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저 노인과 노인 주변에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년들의 정체는 당연히 몰랐다.
“저 어린 아이들도 의원인가?”
“아뇨. 이제 배우는 녀석들이죠.”
“음...”
‘그런 것치고는 꽤 많은데?’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전부 제자라? 노익장이 대단하다 싶었다. 이 시대는 도제식 교육이 당연한 거라서, 양원경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이상합니까?”
“제자 치곤 많아서 말일세.”
“글쎄요. 저흰 제자라는 말을 안 써서... 그냥 학생이라 부릅니다. 잡학근본 아닙니까. 그리고 하동에 가면 저런 아이들이 한가득입니다. 많다니요? 제대로 돌아본 거 맞습니까?”
“크큼.”
오히려 공유성이 양원경에게 힐난하듯 눈을 흘기는 게 아닌가. 양원경은 괜히 자기가 뜨끔해서 눈을 피했다.
아니... 약초꾼과 의원을 향교의 서생마냥 왕창 가르치고 있는지 누가 알았나. 집이 몇 채인데 그걸 다 돌아보냐.
하동이 작다고는 하지만, 며칠 사이에 다 돌아볼 정도로 작은 건 아니다. 더불어 기업은 하동,구례,광양에 퍼져있어서 세세히 살피는 건 더 힘들었고.
하지만 그 표정을 오해한 걸까? 공유성은 원래의 표정. 싸늘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바뀌어 입을 열었다.
“설마. 양 호위도 십선비라서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양원경은 체면도 잊고 냉큼 손사래를 쳤다.
십선비. 이젠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들은 말 아닌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도 남았다.
어사 김숙자는 시도 때도 없이 얻어맞았는데, 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십선비라서.
“공자가...”라고 입을 열면, “2천년전에 뒤진 중국놈은 왜 꺼내냐!”라고 처맞았고, “성현...”이라고 하면. “거 뒤진 중국놈은 자꾸 왜 꺼내냐니까? 여기가 조선이냐 중국이냐!”라고 처맞았고.
“경전에...”라고 하면 “2천년 전의 원본을 네가 봤어? 진시황이 다 불태워서, 경전. 그거 다 나중에 만든 거라니까?”라고 처맞았다.
논리를 무논리로 일관한다.
뭔 말만하면 “중국이나 조선이냐.”를 따져 묻는데, 이건 뭐라고 답해도 얻어맞는 무적의 이분법 아닌가.
김숙자는 근본성리학인 유학ver4.0을 신봉하는 터라, “난 길재의 제자라네. 엣헴.엣헴.”이러면서 거드름을 떨긴 커녕, 이젠 지쳐서 대들지 못했다.
물론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유성 형님. 약재가 돈이 됩니까?”
“당연하지. 명이 망하고 통교가 끊어진 게 몇 년이냐. 지금 당재가 찔끔찔끔 들어오는 중인데, 그거로는 조선팔도의 약방과 의방을 다 감당할 수 없지.”
“오...”
“게다가 조정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을 보수해서 향약집성방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그럼 조선팔도에 나는 약재는 다 알려지게 될 테니, 당연히 먼저 선점해야지.”
“그렇군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둘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칼질 혹은 망치질하며 살아온 두 사람에게, 공유성의 대답은 그야말로 안계를 넓혀주는 현답이다.
“저 나무도요?”
“그럼. 저건 잘 기르면 기름이 많이 나오지. 꿀도 많이 나온다. 어지간한 양반집은 다 하나씩 기를 걸?”
양원경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괜히 또 부끄러워서 고개를 내저었다. 안타깝지만 모르는 나무다.
“쉬나무라고 양반집에서 등잔기름으로 쓰려고 다들 한그루씩은 기르는 나무지.”
“...”
‘역시 칼잡이답게 공부는 안 해봤군?’이라는 표정이 역력해서, 양원경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씩 배워나갔고, 공유성의 손길에 이끌려 여기저기 끌려 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숲 저편을 뚫고 몇몇 청년이 빠르게 달려왔다. 뭔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 반응이 이상하다.
청년들은 다들 히죽 웃으며 무기를 챙겨들고, 몇몇은 말에 올라타는 게 아닌가.
“뭡니까 형님? 도적이라도 나타났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공유성은 그저 피식 웃었고, 영규와 영명은 얼른 어사에게 옷을 입히고선 일행 앞에 대령했다.
“부장님. 어르신이 함께 오랍니다.”
“가자.”
뭔 진 모르겠지만 어사 김숙자는 살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숨을 헐떡거리며 양원경을 노려봤다.
누가 봐도 “배신자!”라고 부르짖는 눈빛이다.
물론 양원경은 “그러게 왜 십선비 짓을 하고 그러쇼?”라고 무언의 항변을 날렸고.
“너흰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와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괜히 나서서 귀찮게 굴지 말고.”
“옙!”
연오랑의 심드렁한 말에 다들 하나가 되어 답을 하고선, 조용히 청년들을 따라갔다.
셋은 궁금증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고, 이내 곧 해답을 절로 알아차렸다.
한참을 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저쪽에 이십여채의 가옥이 위치해 있는 게 아닌가.
‘화전민?’
‘도적?’
‘뭐지? 여기에 왜 마을이?’
셋은 하나같이 눈을 마주치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는 동안 연오랑은 빠르게 손짓하며 청년들을 흩뿌렸다. 말 한마디 없건만 다들 빠르게 흩어져선 마을을 포위하기 시작.
노련한 사냥꾼이자, 북변에서나 볼법한 정예병의 모습에 양원경은 절로 몸을 떨었다.
다들 한칼 하는 건 알았지만, 이런 모습까지 보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들이 과연 기업이라는 괴상한 조직을 앞세워, 이상한 장사를 하는 청년들이 맞나 싶다.
“뭐야. 조정에 장계가 안 올라갔냐? 내가 보낸 수신호가 뭔지 몰라?”
양원경의 어리숙한 모습은 오해를 사서, 괜히 연오랑에게 한소리 듣고 말았다.
옆에 있던 연전위조차 뭔지 알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양원경과 김숙자는 어안이 벙벙해서 멍 때리고 있었으니까.
“무슨 말씀인지...?”
“대마도 원정군 본대가 해산하고 장군들이 한성에 복귀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내가 알려준 수신호가 안 퍼졌어? 너 내금위라며,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놈이 이걸 몰라?”
연오랑은 그리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찔렀다가 정면을 가리키고,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손가락을 현란하게 펴길 반복했다.
“그게...”
“하여간 늙은 말은 물가에 데려다 줘도 물을 처먹을 줄을 모르네. 이건 늙은 말이 문제냐, 아니면 적어도 물은 먹을 줄 알고 기대했던 내가 문제냐? 답답하구만. 답답해.”
“끄응...”
“음...?”
연오랑의 한탄에 양원경은 뭐라 말하기 힘든 괴상한 표정을 지었고, 군문의 일을 모르는 김숙자는 이해를 못해서 눈치만 봤다.
‘늙은 말은 노장군들. 물은 연오랑이 가르쳐 준 군사지식이오.’ 양원경은 김숙자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했고, 김숙자는 눈을 부릅떴다가 냉큼 조신하게 변했다.
대마도 원정에 참가했던 고위무관들을 늙은 말로 까내리는 걸 보며, “과연 이놈은 미친놈이구나.”하는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긴 보통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어사를 이렇게나 갈구겠는가.
뭔 말을 해도 안 먹힐 걸 아는지라, 김숙자는 그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기를 잠시. 연오랑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선, 냉큼 말 위에 올라타 마을로 돌진했다.
“와아!”
“쳐라!”
그와 동시에 마을을 포위한 청년들이 마을을 향해 달려가면서 화살을 쏴댔다.
당연히 마을은 난리가 났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은 화들짝 놀라서 머리를 처박고 엉덩이를 흔들었고, 마을 안에서는 금세 고함소리와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앞에서는 흉흉한 장도를 빼든 이들이 달려들고, 사방에선 화살이 날아오는 데 정신을 차릴 수가 있나.
자세히 보면 화살이 죄다 땅이나 지붕에 박히는 걸 알았을 테지만, 죽기 직전인 마을 사람들은 그저 마을 중앙으로 도망칠 뿐이다.
“허...”
“음...?”
셋은 그 모습을 보며 뭐라 말하기 힘든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불쌍하네.’ ‘그런데 저래도 되나?’ ‘너무 한 거 아닌가?’ ‘이게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