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챕터10. 출발하다 (4)
“똑같네. 우리도 처음엔 그랬지. 그때 어르신이 한 말이 뭔지 아냐?”
셋은 아기새 마냥 고개를 돌려 공유성을 바라봤고, 그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꼭 연오랑을 흉내 내는 것 같다.
“단단히 응어리진 한은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그저 공포로 한을 깨부수고, 자애로 쪼개진 한을 녹여야 한다. 하지만 쪼개진 한은 쉽게 녹지 않고 다시 뭉치기 마련이니, 끊임없이 경주傾注해라. 진사라면 그리해야 된다.”
“음...”
“...”
“흐음?”
대충 돌려 말했지만, 다들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화전민을 다루는 방법이라...”
“그래. 너희 십선비 놈들이 어르신의 큰 뜻을 따를 수나 있겠냐?”
“끄응...”
김숙자는 또 발끈해서 한마디 하려다가, 싸늘한 공유성의 눈빛에 냉큼 고개를 돌렸다.
공유성은 성격은 안 그러지만, 무표정하게 있으면 한기가 풀풀 날릴게 생겼으니까.
물론 김숙자는 속에서 열불이 터져 나왔다. 그놈의 진사. 진사. 진짜 사대부는 뭐고 가짜 사대부는 뭐란 말인가?
아무리 지금 사상계가 분열했다곤 하나, 세상에 사대부가 구별되는 게 말이나 되나?
다만 폭력에 굴복한 김숙자는 속마음을 밖으로 표할 순 없었다.
이들이 잡담을 하는 동안에도 청년들은 계속 몰아쳤고, 드디어 화전민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대충 보니 백명 정도? 이 정도면 화전민 마을 치고는 꽤 큰 마을이다.
“가죠.”
공유성을 따라 다들 마을 가까이로 이동했다.
꾀죄죄한 마을 사람들은 비 맞은 새처럼 오돌오돌 떨고 있고, 연오랑을 비롯한 청년들은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무서운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었다.
공유성이 말한 공포가 이걸 말하는 모양이다.
“누가 촌장이냐.”
연오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철푸덕. 웬 사내가 땅에 처박히듯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박았다.
보아하니 촌장인 모양인데, 오체투지하고 목숨을 맡긴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마을에 굴러다니는 의자 하나를 주워왔다.
정확히 말하면 의자와 탁자, 부서진 나무덩어리의 중간쯤 되는 물건이다.
탁탁. 연오랑은 사내 바로 앞에 의자를 놓고 앉고서는, 건방지게 칼집으로 사내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물론 그럴 때마다 사내는 움찔거렸고, 주변에 있던 이들은 아우성을 내질렀다.
“조용히 해라.”
“...”
작은 목소리지만 단번에 장내의 혼란은 가라앉았고.
“죄졌냐? 왜 무릎을 꿇고 있어? 편히 앉아. 인마.”
“...”
무서워 죽겠는데 말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촌장 사내는 지금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어쩔 줄 몰랐다.
화척? 화척치고는 다들 너무 멀쑥하게 생겼다. 상투를 틀고 갓을 쓴 걸 보아 화척은커녕 하나같이 양반처럼 보인다.
도적? 도적치고는 역시나 너무 멀쑥하고 군기가 살아있다. 들고 있는 칼과 활은, 무기에 젬병인 사내가 보기에도 잘 정련된 상등품이다.
군관? 그간 봐왔던 군관과는 차원이 다른 엄정함을 뿌리고, 군관치고는 너무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대체 이들은 누굴까? 왜 이러는 걸까? 뭘 원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머릿속을 맴도는 터라, 사내는 움직일 생각조차 못했다.
툭툭툭. 하지만 계속해서 칼집으로 두들기는 데 버틸 수가 있나.
촌장 사내는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고선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땅에 붙였다.
“불어.”
“...?”
“너희가 어디서 왔고, 왜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설명해 보라고.”
“...”
또 다시 침묵이 자리 잡자, 연오랑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선 뒤를 바라봤다.
연오랑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몰렸고, 그 시선을 받은 김숙자는 자기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 저 미친놈이 갑자기 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의아해서다.
“봉서와 마패 줘봐.”
“...!”
김숙자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떨었고, 촌장 사내도 같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 이거 봐라?’
오히려 연오랑이 놀랐다.
그가 지금껏 때려잡고 회유한 화전민, 화척, 도적떼가 몇인가.
그런 이들 중에서 이 정도로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눈치 빠른 사람은 처음 봤다.
보통은 일단 붙잡히면 “살려주십쇼. 나리.”이러면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만, 그냥 흔하디흔한 도망노비나 농민은 아닌 것 같다.
모두의 시선과 기대가 몰려 있는데 김숙자가 버틸 수가 있나. 결국은 짐을 뒤져 봉서와 마패를 벌벌 떨면서 건넸다.
“확인해라. 근데 보면 알긴 하냐?”
“... 예.”
“호오?”
연오랑은 시험 삼아 후려쳤는데, 촌장 사내는 봉서를 조심스럽게 읽더니 눈빛이 달라지는 게 아닌가.
“말해봐.”
“예. 어사 나리.”
어사는 아니지만 뭐 어떠냐. 일만 잘 풀리면 그만이지.
사내는 그간 사정을 조근조근 풀기 시작했고, 숲 건너편에 있던 나머지 일행도 마차를 끌고 마을로 다가왔다.
화전민의 사정? 별거 있나. 매번 듣고 또 들었던,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탐관오리와 탐욕스러운 양반가문. 이 둘의 야합. 고리대금을 갚지 못해 땅을 빼앗기고 노비가 된 불쌍한 농민. 그리고 이걸 참지 못해 결국 도망친 이야기.
안타깝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조선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평범하고 서글픈 이야기다.
여기에 특별한 양념을 추가. 사내는 양민임에도 영특해서 양반의 시기질투로 꽤나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노비가 됐다.
하지만 촌장 사내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고, 인근 양반집안의 노비를 싹 데리고 단체로 도주했다. 거짓으로 노비로 만들었다는 증좌도 함께 훔쳐서.
이 마을은 화전민 치고는 특이하게, 모두가 한 고을에서 도망친 노비들이라는 거다.
“그렇군. 잘 들었다.”
연오랑은 감흥 없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고선, 다시금 칼집으로 툭툭 때리며 일어서라고 눈치를 줬다.
“유성아. 밥 먹자. 청어절임이나 먹이자.”
“알겠습니다.”
“현. 전위. 오면서 봤던 개울에 데려가서 깨끗하게 씻겨라. 냄새난다.”
“옙! 넵!”
이런 일이 어째 한두번이 아니었던 걸까? 유성의 지휘 하에 모두는 하나가 되어 바로바로 움직였다.
살벌한 눈빛을 뿌리는 청년들은 반강제로 마을 사람들을 죄다 끌고 갔고, 나머지 일행은 마차에서 집기들을 꺼내 식사를 준비했다.
연오랑 야전식기라 이름 붙인 21세기의 캠핑용 코펠.
이게 있으면 귀찮게 큼지막한 가마솥, 번철(조선판 프라이팬)같은 건 필요 없단 말씀.
일행은 자기집 마냥 반쯤 무너진 초가집을 뒤져 식량과 조리도구를 찾았고, 이윽고 생선 굽는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바쁘게 움직일 때.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두 사람. 김숙자와 양원경은 연오랑의 손짓에 재깍 다가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왠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아무거나 주워서 앉아.”
“...”
냉큼 돌무더기와 장작을 챙겨와 쭈그려 앉았다.
“야. 십선비로서 지금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냐?”
“...”
또 다시 연오랑의 “나라를 망치는 십선비 이론.” 잔소리가 시작되자, 김숙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나 지금은 분위기가 조금 진지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할 말 없어? 변명이라도 해봐.”
“...”
‘내가 한 일도 아닌데, 왜 내가 변명을 해?’라는 말이 목젖을 때렸지만, 침잠한 연오랑의 눈빛에 침과 함께 꿀꺽 되삼켰다.
“원경. 유학이 언제 생겨났냐.”
“그... 춘추전국시대... 말하는 겁니까?”
양원경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답했고, 연오랑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선 씁쓸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 무려 2천년전. 지구환경보호를 위해서 중국놈들이 서로 칼빵을 놓던 시절에 생긴 학문이지. 사대부라는 놈들이 근본도 없이 그저 금수마냥 탐닉하고 부패했다. 그걸 막기 위한 온갖 사상과 이론이 튀어나왔고, 유학은 귀족들이 자기수양으로 완성된 철인哲人이 되면 혼란한 전국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봤지.”
“...”
뜬금없는 역사이야기에 머리가 어지럽다.
물론 연오랑의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단어선택 때문이기도 하고.
“십선비야. 2천년이다. 2천년.”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2백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사람이 바뀌지 않는 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냐.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유학이 문제인거냐, 아니면 유학을 아무리 때려 박아도 사람의 본성을 이길 수가 없는 거냐?”
“으...”
김숙자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또 나왔다. 저 무적의 양자택일 무논리.
유학이 문제라고 하면 십선비라고 인정하는 꼴. 사람의 본성을 이길 수 없다고 하면, “그럼 대체 유학이 왜 필요한가?” 라는 결론이 나온다.
“할 말 없지?”
“그게...”
물론 할 말이야 많다.
유학과 성리학이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 무논리를 깨지 못하면 계속 그랬던 것처럼 얻어맞을 거다.
“설마 개인의 일탈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런 것도 있지만...”
“에혀. 십선비놈. 쯧쯧. 그게 위정자로서 할 말이냐? 개인의 일탈을 막는 게 위정자가 할 일 아니냐? 이 자식은 지가 녹봉도둑인 걸, 제 입으로 인정하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풉...”
김숙자는 자기도 모르게 손사래를 쳤고, 양원경은 이 대담이 웃겨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분명 뭔가 이상한 막논리 같은데... 어째 가만히 보면 또 말이 된단 말이지.
과거에 급제한 양반이, 칼질의 고수인 연오랑에게 말싸움으로 지는 꼴은 언제 봐도 웃겼다.
“너 속으로 그래도 사람은 교화되고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에혀.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다 부질없다. 십선비야. 누구나 불쌍한 걸 보면 측은지심이 생기고, 누구나 남이 가진 걸 탐하는 욕구가 생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인데 나눌 수 있냐? 선과 악은 공존하며, 사람이 기호에 따라 직접 선택하는 게 맞다고 보지 않냐?”
“음...”
“오...?”
꽤나 진지한 내용에 김숙자는 눈썹이 꿈틀거렸고, 양원경은 연오랑이 이런 소리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서 감탄을 내뱉었다.
연오랑이 마냥 헛소리만 나불거리는 맹탕은 아닌 걸, 다시금 깨닫는다.
“유학에선 모두의 성품을 함양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데, 왜 너희 골수 십선비들은 천성과 귀천이 존재하는 것처럼 구는 거냐? 너희 말대로 라면 귀한 족속인 양반이 어째서 천한 짓을 범하고, 천한 족속인 천민이 어째서 귀한 짓을 할까?”
“...”
“대체 유학을 따르는 너희가 말하는, 귀한족속과 천한족속의 차별과 구별의 기준은 뭐냐?”
“허...”
“으음?”
연오랑의 유학을 꼬은 신분론 재해석에 김숙자는 입을 쩍 벌렸고, 양원경은 알쏭달쏭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있다. 십선비야. 유학은 개인의 일탈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데, 나라를 통치하고 경영할 수 있겠냐? 나라란 수백만명의 개인으로 이뤄진 존재인데, 이걸 정신수양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함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
“뜬구름 잡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면 니들만 한자리씩 해먹으려고 일부러 어려운 소리만 하는 거냐?”
“음...”
“호오.”
“그래서 내가 너희 골수 유학자들을 십선비, 위선자라 부르는 거다. 네놈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채울 땐 언제든 유학을 가져다 붙이거나 버리고, 유학으로 해결되기 힘든 모순은 애써 무시하거나, 경전을 아전인수, 견강부회해서 제멋대로 써먹지. 십선비야. 그러니까 가짜 사대부 아니냐?”
“...”
“...”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에, 김숙자는 자기도 모르게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너는 자본유학을 천한 장사를 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명분. 혹은 철부지 애새끼들의 시답잖은 정신놀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밥 처먹으면서 고민해봐라.”
“...”
“너희 학파가 “실천”을 중요시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말하는 이용후생, 경세치용과 무엇이 다를까? 둘 중 누가 더 백성에게 도움이 되고, 나라를 통치하는데 이로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