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3화 (53/538)

53. 챕터10. 출발하다 (5)

“...”

“...”

“네 놈이 방구석에 앉아 “우리 학파가 정통 유학이다!”라고 건방을 떨 때. 나와 기업가들은 지리산 자락에 있던 모든 화전민, 화척을 양민으로 만들어 정착시켰다.”

“...!”

어쩐지. 화전민을 대하는 방식이 무척 익숙해 보였는데, 이런 이유가 있던 모양이다.

기업은 수십, 수백의 사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사람이 다 어디서 왔겠는가.

전문인력은 10년대계에 따라서 야금야금 모아왔다면, 단순인력은 이런 식으로 한 움큼씩 끌어왔다.

그저 호랑이만 때려잡으려고 지리산을 헤매고 다닌 게 아니었나 보다.

“넌 하동에 유독 사람이 많은 걸 느끼지도 못했지?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긴데, 하동,광양,구례가 다른 현보다 사람이 많으면 이유를 먼저 알아봐야 되는 거 아냐? 정신 좀 차려라. 헛똑똑이야. 네가 위정자가 되고 싶다면 말이야.”

“...”

연오랑의 빈정거림은 김숙자에게 큰 파문을 집어던졌다.

식사준비가 완료되고, 화전민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침묵이 이어질 정도로.

“하아...”

이 와중에 쓸데없이 왜 청어구이는 맛있는지... 김숙자는 자신의 미숙함에 다시금 한탄을 내뱉었다.

“...!”

그러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몰려와 소름이 돋는다.

“그래. 너희가 온 곳이 고령이라 이거지?”

“예. 나리.”

“좋군. 좋아.”

왠지 모르게 음흉하게 웃는 연오랑을 보며, 김숙자는 고민도 잊어버리고 몸을 떨었다.

일행의 목적지가 고령 아닌가. 분명 저기서도 뭔가 일이 터질 걸 직감했다.

똑똑한 미친놈이 저지르는 짓답게, 고령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게 분명하다.

*****

기업이 성장하면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 혹은 조직이 누구일까? 그것도 땡전 한 푼 들이지 않고 쏠쏠한 이득을 챙긴 사람은? 바로 행상이다.

원래 역사에서, 행상은 보부상으로 변모. 조정의 비호를 은근히 받으면서 강력한 내부규율을 가진 전국구 조직으로 성장한다.

다만 지금은 그냥 느슨한 정보공유단계의 떠돌이 상인 집단 모임쯤 됐다. 각 임방마다 조금씩 성향이 다르기도 하고.

애초에 행상이 성장하려면 시장이 생겨서 물건을 내다팔아야 하는데, 지금 조선은 한성 말고는 제대로 된 시장이 없으니까.

그랬던 임방에서 수상쩍은 소문이 돌았다.

하동이라는 촌구석에서 요상한 물건이 나왔는데, 그걸 가져다 팔면 꽤나 쏠쏠하다는 거다.

하여 행상들은 알음알음 하동으로 몰려왔고, 이내 곧 소문이 사실인 걸 깨달았다.

그리고... 딱 잘라서 말하긴 힘든데, 하여튼 뭔가 찬란한 미래가 보이는 걸 직감했다.

조선팔도 어디에 없는 거대한 수공업 공장. 기업.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곤 모든 걸 대량생산하는 괴상한 집단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이 대량생산, 대량유통이라는 건 15세기조선 기준이다. 21세기로 치면 동네 소기업, 1톤트럭 야채장사 수준도 못 된다.

그리하여 행상에게 있어서 하동,광양,구례의 기업은 거대한 꿀단지로 변해갔고, 조선팔도 모든 행상이 이곳을 주시하고 찾아왔다.

일이 이렇게 되면 당연히 조정의 감시망에 걸릴 수밖에 없다.

행상은 행장을 소지하는데, 행장에는 행상이 거래하는 물품이 적혀 있다. 이걸 토대로 세금을 내니까.

하지만 큰 지장은 없었다.

이것마저도 행상은 축소해서 신고했고, 관료들은 돈만 잘 들어오고 보고만 따박따박 잘하면 그만이지. 뭐 저런 자잘한 떠돌이들을 신경 쓰겠나.

더불어 행상은 연오랑과 거래한 게 아니고, 기업으로 변모한 수십개의 집안과 각자 거래했다.

하동에서 출발하긴 하는데, 그 과정에서 행상끼리도 거래가 이어지니... 뭐랄까. 21세기식으로 원산지 세탁이 일어난 거랄까?

물론 사정을 알아차린 하급관료도 있겠지만, 정작 보고서는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경직된 관료사회라는 게, 그렇고 그렇잖아?

자주화란 이름아래 온갖 문제가 터지고 있어서, 조정이나 지방이나 다들 과로사하기 직전이다. 조정은 또 조정 나름대로 내부에서 치고패고 싸우고 있고.

일거리가 늘어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행상들이 수상한 짓거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지켜보는 거지.

그렇다면 행상만 이득을 보았을까? 아니다.

연오랑은 행상을 정보원 비슷하게 취급해서, 전국의 정보를 수집했다.

실력 있는 장인을 포섭해 오는 것도, 전국 각지의 특산물을 알아오는 것도, 저 먼 의주나 북변에서 온갖 가축을 사오는 것도.

그리고. “자본유학론.”이라는 시뻘건 책을 알음알음 전국으로 뿌리는 것도 행상의 일이었다.

행상은 어차피 돌아다니는데 공돈을 벌 수 있는 추가의뢰를 받아서 좋고, 연오랑은 외주를 줘서 싸고 빠르게 필요한 물건과 사람을 구한거지.

이 과정은 10년대계의 한축을 담당하며 몇 해에 걸쳐 이어졌고, 기업과 행상은 점점 끈끈해졌다.

본의 아니게, 원래 역사에서의 끈끈한 보부상 조직의 결성은 이미 물 건너갔다.

하여 이곳 고령의 임방은 바쁘고, 복잡하고, 난잡했다.

원래 장사치들이 모이는 곳이니 의례 이렇지만, 오늘은 더욱 시끄러웠다.

까닭은 하나. 이 시대의 라이징 스타. 연오랑이 이곳 고령에 행차하겠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행상들만 모인 게 아니다.

자본유학론에 심취한 청년 서생들.

자주화에 눈을 떠서, 기업체를 만들어 보려 하는 한미한 양반가문의 자제들.

현실에 부딪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서얼들.

끝으로 소문만 무성한 주인공과 인사를 나누고... 이 이단자, 돌연변이, 철부지, 비렁뱅이들을 비웃고 깔보기 위해 행차한 보수적인 양반지주가문의 사람들까지.

좁디좁은 한 채짜리 집 안마당에, 백여명이 넘는 사람이 우글거리고 있다. 당연히 난장판일 수밖에.

그 때. 쾅!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박살내듯,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외쳤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저기 한쪽에 위치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헉헉. 이씨. 호씨. 성씨. 송씨 집안의 사람을 잡아두라는 명이오!”

“...?”

믿고 끝도 없는 헛소리에 모두의 입은 잠깐 다물어졌다. 말한 4개의 집안은 고령의 터줏대감들 아닌가.

“뭔 소리야. 그게?”

“명은 무슨. 누가 명을 내려?”

“어떻게 되는 거야? 왜 혼자 왔어?”

순식간에 난장판이 다시금 벌어졌고, 행상들은 은밀히 눈을 맞추고선 재빨리 움직였다.

명을 내린 사람? 당연히 연오랑이지. 연오랑을 마중 나갔던 사내가 돌아온 거니까.

그렇다면 사정이야 어찌됐건 일단 장단을 맞춰주는 게 이득. 이렇게라도 이쁜 짓을 해야 뭐라도 더 받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샤샤샥! 하나같이 몸을 날려 십여명의 자제들 팔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놔... 놔라. 이놈들아!”

“무엄하다! 커컥...”

“뒤져. 이 돼지보다 못한 새끼야.”

“그 동안 네놈 비위맞춰주는 게 얼마나 짜증났는지 아냐?”

난투극이 벌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행상들은 이 자리에 있던 네 가문의 자제를 붙잡았고, 그들에게 쌓인 게 많았던 한미한 양반자제들이 재깍 달려들었다.

양반체면도 잊어버리고, 짚신을 벗어 싸대기를 후려치며 욕을 내뱉었다.

보아하니 연오랑이 뭔가 일을 벌릴 거 같은데, 이들 또한 그 틈에 껴서 그간 분풀이라도 하려는 속셈이다.

“오... 온다!”

“저기!”

일련의 난장판이 끝날 때쯤 되자, 저 멀리 마을 어귀에서 먼지구름이 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우르르. 작게나마 땅이 흔들리는 게, 말 수십필이 일제히 달려오는 게 분명했다.

“오...!”

“과연. 과연! 왜구를 때려잡은 장군이로세!”

먼지구름을 피우며 묵직하고 웅장하게 등장하는 게, 과연 소문으로만 듣고 상상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한달 전. 잡색군에 속해 대마도에 다녀왔던 이들은 조선팔도 각지의 고향으로 흩어졌다.

극강의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하는 조선에서, 이런 신나는 이벤트가 또 있겠어? 당연히 썰을 풀어야지.

그들은 누구나 그렇듯 허세와 과장을 한가득 담아 무용담을 풀어냈다. 이들의 최대 안줏거리가 뭐였겠는가?

아낌없이 사재를 풀어 무장한 의병.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공신의 자제.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로 무수한 왜구를 때려잡은 소년장수.

이 중 하나만 해도 엄지척인데, 이 모든 게 한 사람의 업적이라니? 발가락 엄지척으로도 부족하다.

대마도주를 때려잡은 이야기는 아직 퍼지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치지.

그리고 몇몇 백성들은 감탄과 당황을 동시에 겪었다. “아니. 이 연오랑 탈곡기를 만든 사람이 설마 그 연오랑이야?”라고 말이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인공이 등장.

“오...!”

“과연!”

누가 봐도 덩치 하나는 끝내주는 연오랑 아닌가. 뒤에 듬직하게 따라오는 연전위도 그렇고.

연오랑이 거침없이 말을 몰아 집안에 들어오자, 모두는 그저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다들 속으로 ‘소년장수라더니 사천왕의 현신과 다르지 않구나?’라고 생각했다.

“잡으라고 한 십선비놈들은?”

“...”

다짜고짜 하대를 하건만, 모두는 호랑이를 목도한 사람마냥 기세에 압도당했다.

“어딨냐고.”

“저... 저거 말씀이신지...?”

십선비가 뭔지 몰라 다들 당황했지만, 자본유학론을 읽어본 청년서생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러면서도 부들부들 떠는 꼴이 적잖게 놀란 모양새다.

연오랑은 봉두난발 꼴을 하고, 옷은 반쯤 벗겨진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딱 봐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된다.

“거참. 원한을 한둘에게 진 게 아니고만? 너희 모두는 당장 가서 저놈들 집안을 털어라. 집안사람들은 관아로 끌고 오고.”

“...?”

‘아니. 우린 병졸이 아닌데요? 그런 거 할 줄 몰라요.’라는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날아들었지만, 연오랑은 말없이 행상들을 노려봤다.

척하면 척. 행상은 한눈에 구별되지 않나. 딱 봐도 성깔있게 생겼다.

이들은 목숨 걸고 산을 타넘으며 조선팔도를 누비고 다닌다.

가는 도중에 뭔 일을 겪을지 모르니, 품속에 칼 하나씩은 숨기고 다니는 사람들.

그러니 이런 명령이 마냥 부담스럽지는 않을 거다.

“윤현. 유성. 영규. 영명. 너희가 각자 하나씩 맡아라. 애들은 셋씩 데려가라. 반항하면 패도된다. 뭐... 그래도 뼈는 부러뜨리지 말고.”

“옙!”

바람처럼 들이닥쳐선, 다시금 바람처럼 사라졌다.

연오랑과 함께 온 청년들은 사정없이 양반자제들을 두들겨 패며,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

“...”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비현실적이라서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다들 뭐랄까. 상식 밖의 사건이 연이어 터져서 일까? 방금 전까지 짚신으로 뺨싸대기를 날리던 이들마저도 넋을 놓고 지켜만 봤다.

“뭐하십니까?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안 닦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러다가 여러분들 옷이 젖습니다만?”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너희가 피를 본다?’라고 돌려 말하자, 다들 낯빛이 확 변해서 허둥거렸다.

“... 아!”

“그. 그. 그렇지?”

“이... 게 맞는 거지?”

모두는 흡사 허락을 바라는 것 마냥 윤현과 공유성을 바라봤고, 둘은 환하게 웃으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대의 거주지 분포는 21세기와 다르다.

현청이 있는 큰 마을, 보통 고을이라 부르는 도시가 중심에 위치해 있고, 방사형으로 작은 마을들이 퍼져나가 드문드문 위치했다.

마을과 마을 사이는 산, 농토, 숲, 늪지, 하천, 그냥 버려진 황무지 등이 있다.

이런 마을 묶음의 최소 단위가 이른바 현이고, 이 현보다 덩치가 큰 행정구역을 군, 도호부, 목, 부 등으로 불렀다. 21세기의 시,읍,면,리,의 구조와 비슷하지.

그런 측면에서 연오랑이 처음에 들렸던 곳은 고령현 외곽에 있던 마을이다.

비록 외진 곳이지만 서쪽으로 가면 합천, 함양을 거쳐 전라도로 넘어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한마디로 교통의 요지. 그래서 행상의 아지트인 임방이 그 마을에 위치해 있던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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