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5화 (55/538)

55. 챕터10. 정리하다 (2)

그렇게 태풍이 한차례 몰아치고 난 후. 사람들은 흩어졌다.

물론 그냥 떠난 건 아니고, 다들 “지금 대체 뭔 일이 벌어지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었다.

보아하니 어사?쯤 되는 인물이 나타나서 현감과 네 집안을 두들겨 팼다.

그럼 고신이라도 하든가, 아니면 증좌를 놓고 송사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왜 현감과 향리, 네 집안의 가장을 땅에 파묻었을까?

그것도 얼굴만 내놓고, 소리 지르지 못하게 입에 천조각을 쑤셔 넣고, 앞을 보지 못하게 눈까지 가리고서 말이다.

다들 이 알쏭달쏭한 문제를 집안으로 가져가, 밤이 세도록 입방아를 찧게 생겼다.

화전민들은 주인이 없어진 네 집안의 대저택에서 지내게 됐고, 원래 주인들은 차가운 옥방에 갇혀 통곡을 해댔다.

포졸들은 괜히 자기들에게 불똥이 떨어질 까봐 벌벌 떨었고, 향리 집안사람들 또한 어쩔 줄 몰라 벌벌 떨었다.

어사 김숙자는 연오랑이 붙여준 청년. 아니 소년들과 함께 현청의 공문서와 네 개 집안, 향리집안의 재산내역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감탄과 쌍욕이 터진다.

과연 탐관오리와 탐욕스런 지주답게, 덩굴줄기마냥 비리가 계속 튀어나왔다.

끝으로... 연오랑을 만나기 위해서 고령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 또한 충격을 받고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고령읍성 출신 양반집에 다들 모여서, 아예 마을 아낙들을 불러와 솥을 걸고 모닥불을 만들었다.

예정에도 없던 노숙을 하며 다들 “대체 이게 뭔 일이지? 앞으로 우리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주제로 토의를 시작했다.

모두에게 숙제를 내던진 연오랑. 그도 나름 바빴다.

연오랑은 공유성과 몇몇 장인들과 함께 강바람을 맞으며 농지를 살피고 있었으니까.

이제 황금빛으로 슬그머니 변하기 시작하는 넓은 대지. 바로 옆에 모래사장이 이어지는 강줄기가 들어왔다.

강가에 뭔 모래사장이냐 하겠지만, 15세기조선엔 이런 곳이 대부분이다.

강둑이라는 게 거의 없으니, 지류가 휘어지는 곳은 퇴적침식작용으로 인해서 이런 모래사장이 만들어진다.

“이거 생각보다 정말 욕심 많은 놈들입니다. 어르신.”

“네가 봐도 그러냐?”

“예.”

공유성은 네 가문에서 압수한 서류를 살피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고령은 대가천, 소가천, 안림천을 끼고 있어서 대충 둘러봐도 하나같이 풍작지대다.

이런 땅에서 고작 이 정도 밖에 소출이 나오지 않았다? 이놈들이 서류로 장난을 쳤거나, 아니면 수로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둘 다 일거다.

“이앙법을 행하는 곳은?”

“없습니다.”

“흐음...”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물이 풍족한 곳에서는 알아서 행할 법도 하건만, 발전 없는 부자 지주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없는 놈들은 자주화라는 명분하에, 뭐라도 해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데... 참 안타깝다.

“지호!”

“옙!”

저기 강가 한쪽에서 장인들과 함께 강을 살피고, 모래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청년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때? 둑을 만들 수 있겠냐?”

“예. 보니까 예전에 조사해 놓은 서류들이 있더군요. 전임 수령이 그래도 생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모래사장도 그리 깊지 않아서 조금만 파면 될 것 같습니다. 근처에 돌도 많고, 좋은 흙도 많아서 문제없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하기에는 조금...”

지호라 불린 청년. 건설기업 부장인 손지호는 강가 바로 옆에 위치한 논을 가리켰다.

저쪽에는 이제 곧 추수를 앞둔 논이 한 가득인데, 수로를 만들겠다고 다 파버리면 난리가 날거다.

“어차피 추수 끝나고 할 거다. 일단은 수로의 경로와 저수지의 위치만 정해봐라. 여기부터 고령읍성까지 이어지도록 계획해봐.”

“알겠습니다.”

손지호는 재깍 답을 하고선 다시 강가로 뛰어갔다.

“흐음... 이 근방은 전부다 그놈들 땅이지?”

“예.”

탐욕스런 놈들답게 좋은 땅을 다 차지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차라리 잘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고령의 논밭을 죄다 정리할 기회다.

21세기에 기업형 농업이 쉽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토지소유권문제다.

예컨대 A지역의 땅이 있다면 그 땅을 잘게 쪼개서 a,b,c,d,e. 등의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

또 a라는 사람이 A지역에 찔금, B지역에 찔금, C지역에 찔금. 이렇게 소유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니 한 사람이 하나의 인접지역을 전부 소유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이 문제는 웃기게도, 15세기조선에도 엇비슷하게 적용됐다.

대농장을 가지고 있던 고려귀족들을 두들겨 패면서, 그 땅이 잘게 쪼개져 정신없게 분배되었으니까.

네모반듯하게 논밭을 만들면 좋다. 달구지가 돌아다닐 정도로 논두렁이 넓으면 좋다.

농수로가 반듯반듯하게 이어지면 좋다. 저수지가 있으면 좋다.

이 당연한 사실을 누가 모를까? 하지만 이러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농토의 손실이 일어난다.

누구 한명도 손해보길 싫어하니, 뭘 하려고 해도 진행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이를 깔끔하게 해결하려면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강력한 위세와, 손해를 벌충해줄 재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곳 고령을 대입하면? 여기까지 계획하지 않았지만, 좋은 카드가 들어왔으니 써먹어야지.

시범과 성과를 보이고 나면, 주변 고을에서 죄다 따라하고 싶어질 거다.

“반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괜히 억지로 진행하면 여러모로 부담될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글쎄요... 일단 강가 인근은 전부 네 집안과 향리들 것이라서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읍성 근처의 자잘한 토지는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투자금과 기업설립을 조건으로 정리하는 게 좋겠지? 돈이야 뭐 십선비놈들 집안을 털면 될 거고.”

“예.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간 쭉 해먹은 걸 생각하면 보상은 충분히 될 것 같습니다.”

공유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오랑이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역시나 마음에 안 드는 십선비들을 제대로 조져야 할 것 같다.

“양원경은 어떠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단 의주출신이니 다른 양반하고는 거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문관도 아니고 무관이니까요.”

“그건 다행이군.”

둘은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공유성은 연오랑의 밀명을 받아 양원경을 주시하며, 은근슬쩍 자본유학을 설파했다.

그가 부스러기나 마찬가지인 어사 호위에게 괜히 호의를 보였겠는가.

다 연오랑이 시켜서 한 일이고, “이번 기회에 의주에 씨를 제대로 뿌려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접근한 거다.

천만다행으로 양원경은 유학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자본유학을 신선하게 봤지, 대놓고 거부하거나 못마땅해 하지 않았다.

어사 김숙자하고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정확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보아하니 의주에서도 나름 괜찮은 집안일 거다. 내금위에 오르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녀석을 잘 엮으면 의주의 중심을 파고들 수 있다. 이번에 모인 행상들에게 따로 의뢰해서 알아봐라.”

“알겠습니다.”

‘의주라... 하. 쓰불. 거기는 또 언제 가보려나.’

연오랑은 저 먼, 21세기에도 가보지도 못한 북쪽 땅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흐흥. 이거 봐라. 웃기는 놈들이네. 이러면 내가 속을 줄 알았나. 어림도 없지. 나쁜 놈들.”

“...”

소년은 어설프게 조작되어 있는 문서를 비웃어줬다.

10년 전과 오늘이 크게 다를 게 없는 촌구석에서, 서류 조작을 해봐야 얼마나 잘하겠는가.

그것도 감시해야 할 수령과 향리가 대척점에 있는 양반가문과 한통속이라면 말이다.

또한 이곳 고령현에서 돌아다니는 돈과 하동,광양,구례에서 도는 돈의 양은 대충 계산해도 10배 이상 차이난다.

하동이 기록적인 발전을 이룩했는데도 티가 적게 나는 이유?

외부로 돈이 흘러가지 않고 모두 내부로 재투자가 이뤄졌고, 현감들이 기업과 한통속이 되어 수익을 줄여서 보고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업이 생산하는 물품에 대한 세금을, 어떤 항목에 포함시켜서 걷어야 할지도 애매했으니까.

아무튼. 어떻게든 알뜰살뜰, 아득바득 돈을 끌어 모으고 분배해서 최적의 투자를 하는 게 기업가의 본분 아닌가.

치열한 돈놀이를 하던 소년들 입장에선, 정체한 고령의 자금흐름을 파악하는 건 누워서 떡먹기다.

더군다나 화전민 촌장이 빼돌린 증거서류 및 증거품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못 찾으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다.

“이런 건 애들 장난이란 말이지. 흥흥.”

김숙자는 자신의 옆에 앉아서, 궁시렁거리며 욕을 하는 소년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지가 애면서 어디서 애를 들먹이는가. 웃기는 노릇이다.

상투도 틀지 않은 어린 녀석인데, 하는 짓은 김숙자를 괴롭히던 청년들을 똑 닮았다.

하긴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다 같이 수학한 사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허어... 정말 모르겠군.’

다만 다른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김숙자보다 소년의 계산이 더 빠르고, 정리도 깔끔했으니까. 이 녀석만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아이들까지 모두다.

생전 처음 보는 낙서 같은 걸 숫자라고 쓰고 있고, 생전 처음 보는 산판算板을 연신 튕기며 계산했다.

이 시대에도 주판의 원형인 산판이 존재했는데, 쓰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주판을 사용하는 독특한 행상을 만나지 못했으면, 연오랑은 이 시대엔 주판이 없다고 착각했을 정도다.

그런데 주판을 구해서 살펴보니, 어째 그의 기억과 다른 게 아닌가. 해서 연오랑은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21세기 주판을 새로 만들어 보급했다.

물론 그가 처음 본 게 중국식 주판이고, 그의 기억 속 주판이 일본식 주판 1·4식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뭐 어찌됐건... 이제부턴 일본식 주판이 아니라 연오랑 주판으로 알려지지 않을까?

아무튼. 김숙자가 아라비아 숫자와 산술기호를 가리키며 “이건 뭐냐?”고 물어보니, “아니. 과거에 합격했다면서 이것도 몰라요?”라며 순진무구한 반문이 날아왔다.

소년입장에선 다 같이 배우고, 집안 형들도 다 아는 내용이니, 남들도 다 알거라고 생각한 거지만... 김숙자 입장에선 생전 처음 보는 것들 아닌가.

괜히 비수에 찔린 것 마냥 가슴이 아팠다.

연오랑이 말했던 자본유학 중에서 잡학근본, 개화자강.

그 말이 마냥 허황되고, 쓸모없는 게 아닌 걸 새삼 자각한 거다.

당장 한자의 숫자쓰기보다 새로운 숫자체계가 훨씬 편했으니까.

‘정말로 내가 못 보는 게 있는 걸까?’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김숙자는 속으로 고심과 고민이 심해졌다.

‘그래봐야 산학이다. 유학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라는 자부심과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녀석보다 내가 못할 수가 있나?’라는 자괴감.

‘그래도... 결국 나랏일을 하려면 숫자를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결국 나도 배워야 하나?’라는 현실적인 고민까지.

딴 생각에 빠진 김숙자는 어린 소년의 말없는 타박을 받으며, 억지로 손을 놀렸다.

어찌됐건 간에 당장 오늘밤까지 모든 비리를 파악해 놓으라고, 연오랑이 엄포를 놨으니까.

이젠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다.

*****

어두컴컴한 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져 대지는 막 만들어진 숯처럼 검게 번들거렸다.

밤을 밀어내는 작은 희망. 넓적한 돌덩이 위엔 묘한 향기를 내는 등잔이 일렁거리고, 등잔 뒤에는 납작한 나무판으로 가림판을 만들어 불빛을 잘라냈다.

한쪽은 은은히 밝고 반대쪽은 어두침침한 장소로, 사람들이 끌려왔다.

상투는 풀어헤쳐서 봉두난발을 하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됐고, 입술은 바싹 말라 찢어졌고, 수염은 흙과 침이 뒤섞여 뭉쳐 있다.

발가벗은 상체는 주름살마다 흙이 끼어 부스럭거렸고, 대충 걸쳐 입은 하의에선 땅벌레와 풀뿌리가 떨어졌다.

그렇다. 이들은 난데없이 끌려와, 난데없이 땅에 묻혀 있던 이들. 고령을 좀먹던 기생충 권력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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