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챕터10. 정리하다 (3)
그 위세당당 하던 이들이 지금은 눈알이 빙빙 돌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다. 이들은 정말로 미치기 일보직전이다.
평생을 손짓으로 모든 걸 부리며 살아왔다. 그런 이들에게 사지가 묶여 땅에 파묻힌 경험은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대체 언제 죽이려는 거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아. 답답해 죽을 것 같다. 숨이 막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이 이상한 소리는 뭐지. 들짐승인가.’
고문은커녕 심문조차 하지 않았지만, 원초적인 죽음의 공포에 정신부터 무너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은 자유를 찾았지만, 정신은 새로운 공포를 마주했다.
이쪽은 밝고, 저쪽은 어둡다.
달빛이 이따금씩 내리 비추면, 반대편 어둠에서 인기척과 함께 얼굴의 반쪽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연오랑이 21세기의 영화에서 본, 조명과 그림자를 이용한 분위기 연출.
그게 아주 제대로 성공해서, 이들은 묵직하고 음습한 분위기에 휩쓸려 또 다른 공포에 짓눌렸다.
불가에서 말하는 지옥의 나찰이나 악귀가, 저 반대편 어둠에서 웅크리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으니까.
그 지옥의 나찰이 유황불과 함께 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누군지 아냐?”
“크큽. 연... 연오랑 장군이라 들었습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봉두난발을 하고서 손을 부들부들 떠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네 집안의 가장 중 하나일 거다.
“내가 어사와 함께 온 것도 아냐?”
“... 예.”
콜록콜록. 노인은 마른기침에 섞인 흙은 뱉어내며, 간신히 답을 했다.
“그럼 지금 네놈들의 처지를 알겠네?”
“...”
모두는 침묵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팽팽 돌아간다. 아니다. 이미 생각은 끝마치고도 남아서 다들 좌절했다.
연오랑은 이런 촌구석에 알려질 정도로 공을 세웠다. 당연히 조정에서 엄청난 상과 직위를 내렸을 거다. 그런 인물이 어사와 함께 와서 자신들을 때려잡았다.
결론은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구나.’라는 거다.
조정이 난리가 나서, 한 달이 넘도록 결론을 못 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건 조선의 상식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상황이니까.
이들은 고령이 한성에서 먼 곳이니 아직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거나, 어쩌면 연오랑이 밀명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다.
하여 이들의 오해와 착각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연오랑은 오해를 풀어주긴 커녕, 오히려 반대로 이용했다.
“너희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
“첫째. 이대로 조정으로 장계가 올라가, 너희 집안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
“크... 흐업!”
“커컥...”
익히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건만, 다들 가슴을 쥐어 잡고 신음을 흘렸다.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들의 수명이 반쯤 깎인 것 같다.
“둘째. 너희가 그동안 불법적으로 빼앗은 재산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쌓아온 재산 중 3분의 2를 넘기고, 이 일을 덮어두는 것.”
“...!”
한줄기 희망이 비춰서일까? 탐욕스런 이들답게, 죽음의 공포를 밀어내며 연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떤 게 이득일까? 조정에 보고가 올라간다면 과연 저 악귀의 제안보다 더 뜯길까? 그게 아니라면 버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문뜩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려는 찰나.
“버러지 같은 네놈들의 생각은 뻔하지. 과연 네놈들의 뒷배와 나의 뒷배. 뭐가 더 대단할까?”
“...”
다들 말없이 조용히 침을 집어삼켰다.
이미 오해와 착각에 빠지지 않았나. 또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는 거다.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 연오랑의 끈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설마 전하까지 이어졌을까? 그러면 나가리인데...
그런데 전하는 상왕전하와 달리 피를 보기 싫어하는 걸까. 그냥 처분하면 될 걸,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허나 연오랑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설령 네놈들을 모두 참수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가문을 박살내고 네놈들 혈족이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해주마. 어디 한 번 도박을 해볼 테냐?”
“...!”
“내가 널 끌어올리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네 발목을 잡는 건 어렵지 않다.”라는 말이 21세기에 있지 않은가. 15세기조선에도 통용된다.
어차피 관직은 적고 노리는 사람은 많다. 미래의 경쟁자를 날려버리는 일에 반대할 양반은 아무도 없을 거다.
“보아하니 답을 정한 모양이군. 가져와라.”
“옙!”
대체 어둠 속에 또 누가 숨어 있던 걸까?
모두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부르르 떨었고, 저편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공유성은 지필묵과 미리 적어놓은 계약서를 가져왔다.
“읽어보고 수결手決해라.”
“... 큽.”
“흐흑...”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건만, 그렇다고 속이 편한 건 아니다. 피땀을 흘려서, 아니 피땀을 빼앗아서 모은 재산 아닌가.
그게 이 종이 한 장이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 관용에 감사해라.”
“...”
거하게 뜯어먹어놓고 저게 할 소리인가? 하지만... 또 말은 되는 터라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여기가 조선인 걸 다행인 줄 알아. 대마도였다면 이런 귀찮은 짓은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헙...!”
끝까지 내지른 협박에, 한 점 남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얼른 털어냈다.
질질 끌기에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수명이 10년씩 깎인 노인네들은 당장이라도 쉬고 싶었다.
현감일행을 보내고 난 후. 연오랑은 무거운 분위기를 풀고, 편하게 땅바닥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봤다.
21세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별이 빛나는 하늘.
오염되지 않고, 인공 불빛의 방해를 받지 않은 천연의 밤하늘이다.
익숙해진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보면 여기가 15세기라는 걸 다시금 일깨워주는 자극제다.
‘후... 끝났나?’
거하게 사기를 쳤는데 어찌됐건 잘 끝났다.
조정에 알린다고? 애초에 어사 자체가 구라인데, 알렸다가 뭔 꼴을 당하려고.
하던 일이 망가지고 욕이나 안 처먹으면 다행이다.
안 그래도 한성에 가서 또 한번 큼지막한 거래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발목을 잡혔다가는 대계가 어지러워진다.
하여 나름 잔머리를 굴려가며 분위기를 잡아봤는데, 계획대로 잘 풀린 것 같다.
나중에 진실을 알아도 이제 딴말도 못한다.
자신들의 치부를 자신들이 꺼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고령이 발전하면, 지들도 손해는 대충 벌충할 수 있겠지.
“유성.”
“예. 어르신.”
“현감은 죽다 살아났으니, 기업설립에 방해는커녕 적극 협조할 거다. 너무 쥐어틀지 말고 포섭해봐라.”
“넵.”
“운 좋게 향리들도 함께 정리됐으니, 지적地籍정리도 쉬워질 거다. 나중에 뒷말 나오지 않게, 지호랑 같이 후딱 해치워버려. 나머지 마을주민이 소유한 개인농토는 돈으로 처리하고 나중에 개간한 농토를 주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운이 좋았다. 향리까지 싹 얽혀있을 줄이야. 걸림돌이 제풀에 사라진 꼴이다.
원래 역사에서, 조선의 향리는 참 애매한 존재다.
태조와 태종이 대귀족들은 다 정리했지만, 고려 때도 지방 관아에서 일하던 실무자들이 있었을 거다.
조정에서 이들을 가만 놔뒀을까? 아니지. 계속 두들겨 패야지.
고려 때부터 실무를 담당하던 중간관리자니, 양반으로 만들어 중앙조정으로 흡수시켜 관인으로 만든다?
그랬다간 고려 때처럼 관인과 권력층이 너무 늘어난다. 안 그래도 관직은 적은데, 이놈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수 없다.
또한 과거도 보지 않은 놈들은 같은 관인으로 취급한다? 양반 사대부들이 잘도 받아들이겠다.
나중에는 향리들에게 녹봉을 안준다고 했지? 이런 이유도 깔려 있는 거다.
그러면서 은근히 독이든 사과를 던졌다.
정식 관원은 아니지만 관원의 역할을 내줬다. 본래 하던 일을 계속 하게 해줬다.
윗대가리가 예전에는 권문세족이었다면 지금은 수령으로 바뀐 거지.
이게 독인 이유는 양반관료로 진출할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
중앙집권과 양반사대부의 지위,권력독점을 위해서,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를 걷어찼다. 미래의 경쟁자를 날려버린 거지.
하여 시간이 흐르자 지방에는 점점 양반계급이 많아지고, 이들은 양민과 양반사이에 어중간하게 낀 중인계급으로 굳혀지게 된다.
뭐... 조선후기쯤 되면 향리가 또 다른 지방 세력으로 변하기도 하고.
그렇다면 지금 향리의 위치는 과연 어딜까?
중인이라는 개념조차 나오지도 않았다.
아직은 덜 두들겨 맞아서, 자생할 토지를 두둑이 가진 부자가 많다.
중앙의 힘을 등에 업은 수령이 막강하긴 한데, 그렇다고 수령이 마음대로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또 자주화라는 이름으로 산발적인 반항과 반란이 몇 번 일어난 탓에, 수령도 함부로 전횡을 일삼지 못했다.
조정에서야 일 터지고 난 후에 때려잡으면 그만일지 몰라도, 그 전에 수령은 이미 뒤진 목숨이니까.
하여 지방의 권력을 수령. 양반. 향리로 대표되는 지방호족. 이 셋이 복잡하고 은근하게 나눠먹고 있는 상태다.
*****
고령은 작은현이지만 나름 중요한 곳이다.
게임 미디블워에서 고령과 성주에 만들 수 있는 자원이 도자기와 약초가 있었다. 게임에 적용됐을 정도면, 실제로도 진짜 유명했다는 거지.
확실한 캐시카우가 될 재원이 있고, 중앙의 관심도 적고, 현을 좌지우지하는 큰 가문도 없고,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다.
이거 뭔가 돈 냄새가 나지 않는가? 하여 연오랑이 직접 왔다.
자기기업과 약초기업을 설립하는 건 당연한 거고, 더 중요한 일. 10년대계 페이즈2를 위한 실험고을. 이른바 조선판 뉴타운을 건설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운 좋게 십선비들의 삽질로 인해서, 고령의 민심을 얻고 쓸만한 노동력을 공짜로 부릴 수 있게 됐네? 뉴타운 건설이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거지.
하여 할 일없이 노닥거리던 백성들은 모조리 불려나와, 고령현 서쪽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화전민이 숨어살던 그 숲을, 우악스럽게 때려 부셨다.
환경보호? 15세기에 그런 게 있겠냐. 이 시대의 산과 숲은 구경하고 산책하는 곳이 아니다.
일용한 양식을 주는 보물단지인 동시에 맹수의 은신처이자 마을의 확장을 막는 장벽이다.
그런데도 왜 개간하지 않았냐고? 하긴 했지. 쥐 눈곱만큼 야금야금, 깨작깨작 하는 것에 그쳤다.
배경, 의지, 자본을 가지고 화끈하게 뒤집어엎어야 하는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냐.
여기도 마찬가지다.
고령의 여러 마을주민에게 말을 꺼냈을 땐, 다들 “아니.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내 땅, 우리 마을도 아니잖아?” “난 요역기간이 끝났는데?”라는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지만.
십선비들에게서 뜯어온 재물을 일당으로 내걸자, 꼬꼬마 애들까지 뛰쳐나왔다.
그렇게 현에 확실히 도움이 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째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했다.
까닭인 즉. 네 집안의 노비는 물론이고, 애어른 할 거 없이 양반네들이 죄다 막노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살면서 망치와 삽을 잡아본 적도 없는 하얗고 고운 손이, 지금은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 상황은 모두에게 혼란을 일으켰다.
“대체 뭐지? 옥에 갇히고 곤장을 맞아도 부족할 자들이 왜 노역을 하고 있지?”라는 의문이 가득했다.
저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갔냐? 그건 아니다.
네 집안, 향리집안의 노비 대부분은 공짜로 면천됐고, 억울하게 관노가 된 이들도 면천됐다.
이들이 소유하던 땅은 화전민에게 다시 되돌아갔고, 향리집안에 속했던 면천노비에게도 땅이 되돌아갔다.
주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보다 많은 땅과 노비를 연오랑 소유로 돌렸다. 그리곤 고령의 신생기업에게 무이자에 가까운 할부로 넘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