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7화 (57/538)

57. 챕터10. 정리하다 (4)

고령의 여러 마을주민에게 말을 꺼냈을 땐, 다들 “아니.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내 땅, 우리 마을도 아니잖아?” “난 요역기간이 끝났는데?”라는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지만.

십선비들에게서 뜯어온 재물을 일당으로 내걸자, 꼬꼬마 애들까지 뛰쳐나왔다.

그렇게 현에 확실히 도움이 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째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했다.

까닭인 즉. 네 집안의 노비는 물론이고, 애어른 할 거 없이 양반네들이 죄다 막노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살면서 망치와 삽을 잡아본 적도 없는 하얗고 고운 손이, 지금은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 상황은 모두에게 혼란을 일으켰다.

“대체 뭐지? 옥에 갇히고 곤장을 맞아도 부족할 자들이 왜 노역을 하고 있지?”라는 의문이 가득했다.

저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갔냐? 그건 아니다.

네 집안, 향리집안의 노비 대부분은 면천됐고, 억울하게 관노가 된 이들도 면천됐다.

이들이 소유하던 땅은 화전민에게 다시 되돌아갔고, 향리집안에 속했던 면천노비에게도 땅이 되돌아갔다.

주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보다 많은 땅과 노비를 연오랑 소유로 돌렸다. 그리곤 고령의 신생기업에게 무이자에 가까운 할부로 넘겼고.

일이 이렇게 됐다면 다음 수순은. "새 수령이 오네." "접대해야 되네." “난 인정 못해! 상소할 거야!” 등등.

평지풍파가 일어나 고을을 한바탕 흔들어야 되건만, “어. 다 잘 마무리 됐어. 이제 일하자. 일.”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넘어간다? 이게 말이나 되나.

다만 머리는 혼란스러웠지만 몸은 멈출 수 없다.

양반네들 사정은 씹고 즐기는 남일이지만, 눈앞에 있는 돈은 자기일이다. 남이 줍기 전에 얼른 주워야지.

연오랑은 10년대계를 진행하면서 전국에서 장인을 끌어 모았다.

천민 비스무리한 취급을 받는 장인에게 양반 버금가는 대접을 해주고, 돈 주고, 집 주고, 상급자가 되어 사원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줬다.

끝으로 비록 유학은 아니지만, 자식이 번듯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줬다.

이런 조건을 내거는데, 어느 장인이 마다할까?

비록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지만, 다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짐을 챙겼다.

현감이나 수령, 혹은 이들을 붙잡고 있던 지방호족의 반대?

“입 벌려. 돈 들어간다!”를 시전하여 뇌물과 두둑한 대가를 날려주니, 다들 쌍수를 들고 반겼다.

욕심 많은 이들은 다른 장인도 있다고 알아서 소개해줄 정도였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장인들은 서로의 지식을 교류하면서 시너지를 냈고, 연오랑에게 단단히 교육받은 청년기업가들은 이들의 지식을 분류,체계화 시켜서 보다 효과적인 메뉴얼, 이론과 교육법을 만들어냈다.

장인의 고고한 자존심? 자신만의 비법? 연오랑 앞에서 통할 리가 있나.

까부는 놈들은 호랑이 사냥에 끌고 갔고, 돌아온 후에는 다들 순한 양으로 변모했다.

21세기나 15세기나 진리는 하나다.

기술의 발전은 공돌이, 자본,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

공돌이 보다 더 많은 공돌이. 푼돈 보다 더 많은 연구비를 쑤셔 넣어 시간을 가속시켰다.

그렇게 장인들은 기업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 자신들의 이론을 현실로 만들었다.

건설기업도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온 대목장, 소목장, 석공, 토공, 목공등은 하동,광양,구례에 온갖 건물과 공장, 조선소, 석재,목재 다리, 자갈도로, 다진 흙도로까지 만들며 점점 능숙해졌다.

그 갈고 닦은 실력을 고령 뉴타운에 쏟아냈다.

“...허?”

“이게...?”

“놀랍습니까?”

“...! ...!”

공유성의 물음에 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을 꼬박 새도록 관아에 붙들려 종이냄새만 맡던 김숙자와 양원경.

바람이라도 쐬려고 구경나온 둘은 일개미처럼 정신없이 움직이는 공사판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이렇게 분업, 체계화된 공사현장을 본 적이나 있겠냐.

이들이 경험한 공사라는 건, 기껏해야 집을 짓거나, 무너진 성벽을 대충 보수하거나, 개울에 징검다리나 놓는 정도였겠지.

단적으로 지금은 녹로나 거중기도 없는 시대 아니냐.

이와 비교하려면, 조정에서 직접 각 잡고 하는 대규모 공사와 견줘야 할 거다.

게다가 이 모든 걸 돈도 안 주는 요역으로 했으니,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됐겠냐. 분위기부터 다르지.

윤현은 몇몇 청년과 고령의 포졸, 사냥꾼을 데리고 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한동안 이 근방의 들짐승은 떼죽음을 당할 거다.

벌목팀은 온갖 양손톱, 도끼, 대형대패, 축력식 벌목기 등으로 나무를 잘라냈다. 과실수, 밀원수 등의 수익성 좋은 나무는 조심스럽게 뿌리까지 뽑아 따로 모았다.

수거팀은 숲에 널려 있는 온갖 약초, 상품성 있는 풀과 관목, 열매등을 쓸어왔다.

공작팀은 잘라낸 나무를 건축자재가 될 목재로 만들었고, 당장 공사에 필요한 외발수레, 이륜수레, 거중기, 삽자루, 곡괭이자루, 쟁기자루 등등을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나머지 잔가지와 부산물을 긁어모아, 또 뭔가를 만들고 있다.

장비에 끼워 넣을 쇠? 전부 하동에서 만들어 왔지. 괜히 짐마차 수십대를 끌고 왔겠는가.

개간팀은 고령의 모든 마을에서 끌고 온 우마로 사정없이 땅을 파헤치고, 나무밑동을 뽑아냈다.

힘쓰기 힘든 꼬마들은 자갈과 돌멩이를 챙겨서 따로 옮겼는데, 애들은 일이 아니라 무슨 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반대편에선 벌써부터 토지를 측량하고, 얇고 긴 밧줄로 이리저리 터를 잡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머리를 담당하는 팀장의 지시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데, 이 팀장은 하동에서 온 건설기업 부장, 과장급 장인이었다.

이들을 보고 누가 천한 장인이라고 생각할까.

사람 부리는 게 익숙하고 차림새도 범상치 않아서, 하나같이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뒤론 병아리마냥 졸래졸래 따라다니면서 뭔가를 적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곳 고령출신의 한미한 양반자제들, 자본유학에 심취한 청년들이다.

본의 아니게 연수와 현장실습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데, 이들의 열의는 따스한 가을 햇살마저 몰아낼 정도 뜨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개척, 개간하고 있는 땅은 곧 이들의 땅이 될 거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집안이 망할 판국이라서, 기업이라는 생경한 조직, 체계에 도전했다.

대대로 익혀온 유학을 접어두고, 자본유학이라는 괴상한 학문을 받아들일 정도로 각오를 바짝 세웠다.

각자가 양봉, 약초재배, 과실수재배, 건설, 농산기업, 축산기업을 설립할 예정이니, 눈에 불을 켜고서 배워야 하지 않겠냐.

“저긴 뭔가?”

“새 마을을 지을 겁니다. 화전민과 해방노비들은 살 곳도 없지 않습니까?”

“허... 대충 보니 저건 대로大路같은데, 저렇게 크게 짓나?”

딱 봐도 밧줄을 나란히 길게 늘어놨는데, 그 폭이 엄청나다. 수레 두 대가 뭔가. 한 대여섯대는 지나가게 생겼다.

저게 만약 도로를 만들려고 표시해 둔 거라면 놀라울 따름. 저렇게 큰 도로는 한성에도 없다.

“뭐. 문제 있습니까? 나라법에 이런 촌구석 지방도로에 대한 법은 없을 텐데요? 게다가 요즘 법이 하도 왔다갔다해서 말이죠. 근데 이런 건 또 왜 십선비답게 대명률을 안 따르는 겁니까? 중국에는 대로가 많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끄응...”

“풉.”

과연 연오랑 부하답게, 말 한마디로 여러번 두들겨 팬다.

또 다시 무적의 양자택일 방패를 쓰자, 김숙자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물론 지켜보던 양원경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뭐... 지금 당장 제대로 된 도로를 만들어 봐야 쓸모도 없고. 그냥 양 옆으로 배수로만 파고, 돌부리나 치워서 평평하게 다지는 정도로 그칠 겁니다.”

“그래도 엄청 크군... 왕도보다 크지 않소?”

“왕도가 작은 겁니다. 양 호위. 앞으로 차차 변해가야죠.”

둘은 자신만만, 오만천만한 공유성의 말에 뜨억! 입을 쩍 벌렸다.

왕도는 왕이나 명나라 사신이 오가는 도로를 말했는데, 당연히 의주에서 한성까지 이어지는 큰 도로다.

아마 조선에서 가장 관리를 잘한 큰 도로인데, 지금은 뭐... 사신이 오가질 않으니, 엉망이 되었겠지.

그런데 그것도 작고 부족하다? 과연 조선 최고의 미친놈 부하답게 배포하나는 끝내준다.

이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마을이 완성되고 십몇년쯤 지나고 나면, 저 대로 양옆으로는 상점이 죽죽 늘어서게 될 거다.

이 시대에는 없는 상설시장이 만들어지는 거지. 그 옆으로는 식사와 잠자리를 할 수 있는 객주와 주막이 줄줄이 생길 거고.

21세기의 휴게소와 전통시장을 결합한 형태랄까? 조선시대에는 충분히 뉴타운이라 부를만한 곳이다.

거참. 웃기지 않나. 시장과 객주, 주막이 무슨 로스트테크롤로지도 아니고. 고려 때만해도 큰 도시에는 시장이 널려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시장이라 부를 만한 곳은 한성과 개성 밖에 없는 게 지금의 조선 아니냐.

어찌됐건 다시 본래 모습을 찾아가면 진통을 겪게 될 거다.

근데 지방은 시장이 없는데 물건을 어떻게 파냐고? 행상은 노점상 형태로 팔거나, 방문판매 비슷한 방식으로 팔았다.

21세기 미디어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모! 셔터 내려!”할 때. 그 주막? 지금은 당연히 없지.

유동인구라고 부를 게 없는데, 숙박과 취식이 가능한 가게가 생기겠냐.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 중,후기에나 가야 생겨난다.

예외적으로 한성에는 주막 비스무리한 게 있을 거다. 거긴 전국에서 올라오는 유동인구가 있으니까.

그럼 여행객은 전부 노숙하느냐? 그건 아니다. 행상은 그냥 푼돈 내고 일반 가정집에서 대충 묵었고, 양반은 양반집에서 묵었다.

21세기 미디어에서 맨날 “이리오너라!”라고, 아무 집에나 가서 문을 두들기잖아? 그건 실제로 있는 일이다.

“생돈 날리는 게 아니냐?”하겠지만, 체면치레와 실리를 둘 다 잡는 기회다.

체면 하면 양반사대부의 근본 아닌가. 인맥과 학맥으로 어지럽게 얽혀 있는 양반사회에서, 같은 양반을 무시하는 건 결국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다.

또한 낯선 사람을 만나서 다른 지방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 특히나 한성의 소식을 들으면 금상첨화고.

더불어 이렇게 대접함으로서 인맥을 넓힐 기회가 된다. 언제 어디서 도움을 받을지 누가 알아? 투자하는 거지.

또 이야기 좀 해보다가 괜찮다 싶으면 이른바 “식객, 문객”으로 삼을 수도 있고.

하여튼. 이곳 고령을 비롯해서, 조선팔도 교통의 요지에 뉴타운이 생겨나고, 기업이 활성화되어 각 뉴타운이 연결되면? 전에 없을 격변이 일어날 거다.

문제라면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는 대충 정해져 있고, 그런 곳은 진작부터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점.

또한 교통의 요지는 군사요충지와 거의 비례하니, 이 또한 중앙조정의 눈길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게 부담스러워서 연오랑은 큰 고을을 공략하지 않고, 작은 변두리 고을부터 공략하는 거고.

몇 년에 걸쳐서 변두리 지방에 기업이 생기고 나면, 다들 알아서 변할 거다.

“...”

둘은 바보가 아닌 터라, 공유성이 말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표정이 바뀌었다.

김숙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고, 양원경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김숙자는 분명 십선비답게 뭐라 반박하고 싶긴 한데, 자기 눈으로 본 게 있어서 쉽게 말할 수가 없다.

예전이라면 분명 “성현.”어쩌고 할 텐데, 지금은 조금 망설여졌다.

그간 사건을 꽤 겪은 터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머리가 조금은 말랑말랑해졌기 때문이리라.

양원경? 나쁠 거 없지. 애초에 의주는 무역을 하면서 은근슬쩍 양반상인이 생겨나고 있으니까.

이렇게 기업을 통해 은근슬쩍 상업이 진흥되는 건, 그의 집안 입장에선 나쁜 게 아니다.

그렇게 웃는 양원경의 눈에 특이한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다. 특이하다기 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다.

저기. 화전민 촌장이 의원노인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게 아닌가.

“저 자...? 화전민 촌장 맞소?”

“아. 유진태 말입니까? 이야기를 해보니 꽤 똘똘하더군요. 양민출신이라서 십선비스럽지도 않고, 먹고살려고 머리를 꽤나 굴린 티가 나더군요. 그 좁은 화전에서 어떻게 먹고 살았나 했더니 약초를 내다 팔았다고 하더군요.”

“호...”

“...”

몰래 약초를 재배하고 그걸 쌀로 바꿔서 또 몰래 가져왔다? 그것 자체가 이미 그의 능력과 수완을 증명한다.

“저렇게 실력 좋은 약초꾼을 그저 노비로 부려먹었으니... 쯧쯧. 십선비들의 멍청함에 두손두발 다 들었습니다. 머리통을 까서 속을 보고 싶다니까요.”

“...”

“흡...”

어사 김숙자는 자기도 모르게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가는 걸 막았다. 괜히 자기 머리통이 도끼에 찍히는 느낌이 들어서다.

하여간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죄다 비수다.

농사야 말로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골수 십선비에게 통렬한 비판을 날려준다.

“그래서 뭐... 약초기업을 맡겨 볼까 합니다. 저치가 눈 뜨고 있으면 수령을 비롯해서 다들 딴마음을 먹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흐흐. 놈들의 똥 씹은 표정을 봐야하는데 말이죠.”

“...”

“...”

‘무서운 놈들.’

양원경와 김숙자는 자기도 모르게 이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놈들이 하는 짓을 보면 일석이조, 일석삼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면, 추수 때에 공사작업은 어떻게 하려는 거요?”

“사람이야 많지 않습니까?”

“...?”

당연하다는 듯이 되묻는 공유성을 보며, 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 어디 흔하나. 고령 말고 다른 고을도 죄다 추수하느라 일손이 없을 텐데,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걸까?

공유성은 둘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피식 웃었다.

“왜인포로 말입니다. 나라의 골치 덩어리를 치워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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