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챕터10. 정리하다 (5)
다들 바쁘게 돌아다닐 때. 연오랑도 바빴다.
10년대계를 실행하면서 연오랑은 돈이 될게 분명한 도자기를 생산하려 했다.
다만 이건 기술과 자본의 문제보다 원자재의 문제가 더 컸다. 질 좋은 고령토가 나오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가마를 포기할까? 그럴 리가 있나. 페이즈2가 진행되면 전국에 자기기업을 만들 생각이니, 가마를 미리 만들어 보면서 최적의 규격과 표준을 찾아야지.
게다가 가마를 조금만 개량하면, 바로 철과 금속을 뽑아내는 용광로란 말씀.
그래서 이런저런 실험용 가마를 만들었는데, 막상 써먹을 곳이 애매했다.
해서 가마로 할 수 있는 걸 다해봤다. 혹시 아나? 로또라도 터질지.
숯, 먹, 옹기, 기와, 벽돌, 21세기의 타일, 바닥에 까는 전돌, 흙으로 만든 파이프 등을 만들며 놀았다.
그러다 집중한 게 바로 옹기다.
사실 연오랑은 당연히 이 시대에 옹기가 있을 줄 알았다. 21세기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독 항아리 말이다.
그런데 어째 없다. 정확히 말하면 옹기가 있긴 있는데,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자줏빛 항아리가 아니었다.
뭔 누런 토기를 가지고 옹기라고 하니 기가 막혔지.
해서 이것저것 실험해 기억 속 옹기를 완성. 어려울 것도 없었다. 값싼 유약을 바르고, 몇 번 더 구워내니까 완성되더라고.
이제 만들었으니 팔아먹어야 하는데, 이게 상품성이 있으려면 무조건 많이 찍어내야 했다.
그런데 도자기에 비해 옹기는 덩치가 크다보니까, 작은 가마에는 몇 개 들어가지도 않더라고.
그 결과 탄생한 게 바로 초거대가마다.
비스듬한 산중턱을 가로지르면서, 애벌레 모양처럼 가마를 길게 만들었다.
그 안은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토기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가장 밑에서 불을 지피기 시작하면 긴 가마의 옆구리에 군데군데 뚫린 구멍으로 땔감과 바람을 불어 넣어 온도를 높였다.
이렇게 열풍이 한 번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가마전체를 달구면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온도를 확 올릴 수가 있지.
신기할 것도 없다. 장인을 구하면서 고려 때의 기술을 이리저리 뒤져보니, 이미 이런 식의 대형가마를 썼더라고.
게다가 중국출신 항왜에게 물어보니, 중국 경덕진에도 이와 비슷한 걸 썼다고 했다. 송나라 때부터 이런 대형가마를 썼다나 뭐라나.
이어서 시너지효과가 발생했다.
청어절임법은 슬슬 완성되는데, 앞으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청어를 뭐로 담을까?
원래 유럽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무통에 도전했다. 그런데... 나무통도 만드는 게 쉽지 않다.
통을 만든 다음에 수분을 쫙 빼면서, 속안을 훈제하듯 그을리면서 말려야 했다. 이 과정을 반복해서 완성하려면, 거의 반년에서 일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위스키, 브랜디를 숙성할 때 쓰는 오크통 만드는 작업과 거의 흡사하다.
더불어 대항해시대 때 물통 만드는 방법과도 흡사하고.
아무튼 21세기에서 본 영화나 잡지식으로 시도해 봤는데, 처음에는 당연히 실패.
온갖 장인들을 다 동원해서 머리를 싸매며 겨우 완성하고 나니, 나무통이나 옹기나 가격이 엇비슷해졌다.
그러다가 초거대가마에서 옹기가 쏟아져 나오자, 이것저것 따지면 나무통이 더 비싸져 버렸다.
성능? 보관능력은 엇비슷. 가격, 생산기간은 옹기가, 내구도와 무게는 나무통이 더 나았다. 그래서 그냥 둘 다 써먹고 있지. 뭐.
아무튼. 그렇게 초거대가마를 만든 연오랑이 보기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어설픈 가마는 아주 문제다.
관요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고작 작은 가마 3개가 끝이다. 썩을... 이게 진짜 나라에서 관리하는 가마가 맞나 싶다.
가마는 언제 썼을지 모를 정도로 잔뜩 갈라져 구멍이 송송 나 있다.
주변은 잡풀이 잔뜩 자라서 이게 공방인지 무덤인지도 모르겠고, 쓰다 남은 목탄과 부서진 파편이 널려 있었다. 하도 오래전에 널브러져서 흙먼지가 잔뜩 쌓인 채로 말이다.
‘역시... 세종 형. 한발 늦었네? 내가 더 빠른 모양이야.’
저기 한성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을 세종느님에게 승리의 미소를 날려준다.
“이게 관요라고?”
“예... 장군.”
일전의 공포가 아직 가시질 않은 걸까?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현감은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나태하고 탐욕스런 현감은 지금까지 직접 공방에 와본 적이 없다.
그저 시키면 그만이지, 뭘 이런 데까지 찾아보겠나.
하지만 와서 직접 보니, 자기가 봐도 상태가 엉망이다. 제발이 저려서 안절부절 못할 수밖에.
“거참. 조정에서 공물 보내라고 안했어? 지금까지 어떻게 만든 거야?”
“그게... 어떻게든 만들었는데...”
“쯧쯧. 됐다.”
연오랑은 더 들어봐야 의미가 없어서, 그저 손을 내저었다.
대답을 들어서 뭐할까. 저 거지같은 가마로 어떻게든 대충 만들었겠지.
오히려 잘됐다. 저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정에 납품할 자기를 만들었다는 건, 반대로 장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 아니겠나.
조정에서 사옹원을 중심으로 경공장, 외공장을 만들어 공물로 받는다고 했다.
문제는 이들은 농사일이 본업이고, 농한기에 관아에 속해 공역을 했다.
효율은 당연히 떨어지고, 농사가 본업이라서 기술이 점점 퇴보하지.
경공장은 전문장인이라서 당장은 괜찮은데, 이쪽은 노비가 대다수다.
그럼? 노비는 온갖 잡일을 다 하다 보니, 마찬가지로 기술의 퇴보가 일어난다.
원래 역사에선, 세종이 이들을 전부 분류 및 체계화 시켜서 경공장과 외공장의 조직을 척척 만들어갔다.
그래. 역시 우리의 세종느님이시다.
도공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의 수공업 장인을 죄다 관영수공업으로 빨아들인다.
도자기 분야에 있어서는 이른바 분원관요를 만들어서 전국에 가마터를 만들었고.
물론 조선 중,후기에 가면 이런 관영수공업은 죄다 몰락하고 민간수공업으로 전환되지.
지금은? 명이 없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자주화, 은근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단적으로 향약집성방은 세종 후기 때나 만들어져야 하는데, 벌써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지 않나.
그러니 다른 분야와 달리 이쪽은 넋을 놓고 기다릴 시간이 없다.
연오랑은 장인들, 공인들을 모아서 전국에 공작기업을 마구 세우는 게 대계획인데, 이 대계획의 가장 큰 경쟁자가 바로 우리의 그레이트 킹갓 세종느님이니까.
감히 불세출의 천재 세종과 한판 해야 되지만, 연오랑은 쫄지 않았다.
세종은 집권한지 이제 고작 1년차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고, 아무리 천재라도 이 일에만 집중할 수 없다.
게다가 멀고먼 지방 촌구석 고을이 세종의 뜻을 알아차리고 재깍재깍 움직일 리가 없다.
완벽하게 위에서부터 쫘쫘좍. 내려오는 중앙집권화도 덜 됐고, 시대를 막론하고 공무원의 특성은 복지부동, 무사안일 아닌가.
그러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는데... 여기 와서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조 영감. 어때?”
“다 부수고 새로 만드는 게 낫겠습니다. 어르신.”
“거. 노인네가 애한테 어르신이라고 부르면 이상하다니까.”
“흐...”
노인은 연오랑의 타박에 그저 히죽 웃고 말았다.
머리칼이 새하얗게 센 노인이 연오랑에게 어르신이라 부르는 게, 퍽 괴상하지만 어쩌겠나. 노인은 이게 좋다는 데.
‘순진한 건지, 영악한 건지... 둘 다겠지.’
지금까지 살면서 받은 대접보다, 요 몇년사이 연오랑에게 받은 대접이 더 강렬할 테니, 이렇게 넙죽넙죽 아부를 날리고 있다.
조 영감은 옹기기업의 과장으로, 이곳 가마터를 확인하고 자기기업 설립의 실무를 도와주러 온 장인이다.
기업의 설립과 운용,관리는 양반, 호족자제들이 하지만, 자기를 직접 만드는 장인은 같은 장인끼리 말을 섞어 봐야하는 법.
항아리 옹기나 도자기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둘 다 흙을 빚어서 가마에 넣고 구워서 만드는 거니까.
차이라고는 온도, 흙, 예술성, 유약의 차이? 물론 이 차이가 좀 크긴 하지만... 어쨌든! 첫발을 떼기도 전부터 문제가 많다.
“그럼 새로 만들어야겠군. 터는?”
“터는 좋습니다. 몇 대를 걸쳐 이어온 가마터니까요. 흙도 좋구요. 산음보다 낫습니다.”
“거야 고령은 원래 유명했으니까.”
연오랑은 노인이 건네준 유백색 흙을 만지작거려봤다.
만진다고 뭘 알겠냐만... 그래도 확실히 일반 흙보다 부드럽고 미끈거린다.
산음(산청)은 하동 옆 동네로, 그쪽에서도 고령토가 나와서 옹기기업에서 사서 실험하곤 했는데... 뭔 진 모르겠다만 산음의 고령토와 느낌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기분 탓 일수도 있고, 진짜로 성분이 다를 수도 있고.
‘에이. 쓰벌.’
“억!”
괜히 짜증나서 옆에 있는 현감의 정강이를 때렸다.
이렇게 돈벌이가 널렸는데, 헛짓거리만 한 걸 생각하면... 안 때릴 수가 없다.
“컥컥컥.” 퍽퍽퍽. 몇 대 더 갈겨준다.
현감이 맞을 때마다, 뒤에 줄줄이 서 있는 꾀죄죄한 관노들이 움찔거렸다.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었던 상전이 저렇게 두들겨 맞는 걸 보면서 왠지 모를 쾌감과 두려움이 같이 밀려온 탓이다.
“관노는 전부 면천이다. 알지? 대금은 네가 뜯어먹은 걸로 해결할거다. 네가 뒤지기 싫으면 서류정리는 알아서 잘 해야 할 거고. 어차피 장인 중에서 면천해서 문제되는 역적 자식도 없잖아?”
“예? 아... 예예.”
애초에 그런 배경이 있는 관노는 장인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장인을 빼간다고 해서 공물에는 지장 없을 거다. 조정에서 필요한 물품을 알려오면 만들어 준다. 우린 매일 같이 자기를 찍어 낼 거니까.”
“...에?”
현감은 ‘다행히 내가 사서 보내지 않아도 되겠구나.’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현감만 그랬을까. 뒤에 있는 관노와 자기장인들도 다들 웅성거렸다.
“매일매일 자기를 굽는다고?” “그럼 뭐 먹고 사나?”라는 물음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는 몇몇을 제외하곤 전문 직업이라는 게 딱히 없다.
웃기지 않나? 일단 농부는 패시브 직업이다.
자기장인? 농사짓고 남는 시간에 자기를 만든다. 약초꾼? 농사짓고 남는 시간에 산을 탄다. 기타 온갖 수공업장인? 다 마찬가지다.
일반 백성들도 똑같다. 농사짓고 밤에 집에 가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쓰는 거다.
심지어 어부도 그렇다. 농사짓고 남는 시간에 고기를 잡는다.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듯, 극한의 자급자족을 보여주는 게 조선이다.
그나마 자주화의 물결로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있는데, 기업에 비하면 애들 장난수준이지.
“뭘 놀라.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다들 잘 들어라.”
“...!”
연오랑과 기업 실무자들은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신문물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자기기업 설립을 처리하고 나서도 바쁘게 움직인다.
다음으로 만날 사람들은 행상들.
거참. 나름 먹물 먹은 양반, 호족들도 움직임이 굼뜬데, 어째 떠돌이나 다름없는 행상이 먼저 움직였다.
이 자식들은 행상조직을 제대로 된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도움을 청했다.
그것도 신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21세기로 치면 택배나 운송업체, 중국으로 치면 표국, 저기 멀리 있는 중동으로 치면 조선판 카라반을 만들겠다는 거지.
이게 뜻하는 게 뭐냐? 농본주의 조선 기조를 깨부수는 첨병이 되겠다는 뜻 아닌가.
누군지 몰라도, 미래를 보는 눈이 있는 녀석이다. 아니면 그냥 잘 찍었거나.
어찌됐건 껍질을 깨고 나왔으니 얼굴은 봐야지.
“누구 생각이냐?”
“저... 접니다. 연 장군님.”
“흐음.”
역시 창의적인 생각은 머리가 말랑말랑해야 잘 나오는 걸까? 수염도 나지 않은 청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네가 대표라고?”
“예? 예...”
연오랑은 다시금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고, 다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성깔있고 경력 있는 행상을 다 누르고 이 녀석이 대표가 되었다고?
“너. 뭐. 있는 집 자손이냐?”
“... 수륜마을에 사는 이가의 서자. 이자경입니다. 성주 이가의 방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