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9화 (59/538)

59. 챕터10. 정리하다 (6)

“성주 이가?”

연오랑은 잘 몰라서 주변을 둘러보자, 오히려 행상들이 “그걸 몰라?”라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진짜 유명한 집안인가 본데... 그래봐야 연씨보다 높겠는가. 연오랑은 슬쩍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집안에 유명한 사람이 누군데?”

이 시대는 21세기와 달리 친족의 범위가 엄청 넓다.

농담이 아니라 8촌까지도 죄다 알고지내고 친족으로 인정하는 터라, 유명한 사람으로 대충 집안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 어르신이 제 당숙이십니다.”

“...”

부원군이면 엄청 높은 사람인데, 영 모르겠다.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부원군이면 보고서가 올라왔을 텐데...’

연오랑의 묘한 표정을 읽어서일까? 청년이 오히려 “뭐지? 이 미친놈은? 정말 모르는 건가?”하는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더 유명한 사람 없어? 전조 때 사람이라도.”

연오랑의 무례한 말에, 청년은 끙끙 앓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성산부원군보다 유명한 사람을 찾다보니,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입에 담아야 했기 때문.

“... 전조 때의 이인임 어른이 계십니다.”

“오호?”

연오랑은 그제야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인임은 알지. 21세기 미디어에 단골로 등장하는 네임드 아닌가.

‘뭐야. 이 자식은.’

대답을 듣자 의구심이 불쑥 피어올랐다.

이인임이 태조에게 두들겨 맞고 박살났어도, 다른 형제들은 조선관료로 남아서 집안은 살아남았을 텐데? 아무리 먼 방계친척이라고 해도 뼈대 있는 사대부집안 아닌가.

“너네 집 망했냐? 나름 근본 있는 집안이 왜 기업을 차리려고 하는 거냐?”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게 무슨 함정처럼 느껴져서, 날카롭게 되물었다.

연오랑의 기세를 백면서생이 맞받아칠 수 있나.

녀석은 활활 타오르는 연오랑의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냉큼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휴우... 그게...”

사정은 뭐... 흔하디흔한 양반집 이야기다.

이인임 집안에 이런저런 고위관료가 많긴 했지만, 어찌됐건 태조에게 찍혀서 잔뜩 쪼그라들었다.

방계도 죄다 떨어져 나가, 옛 권세는 잊어버린 지 오래. 녀석은 그 떨어져 나간 집안이니 더 볼품없다.

다만 썩어도 준치라고 수륜마을의 터줏대감은 녀석 집안이라 했다.

문제는 집안에 자손이 없어서 서자임에도 장자 취급을 받았는데, 진짜 적장자 아기가 태어났네?

해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괜히 집안에 풍파를 일으키기 싫어서 일부러 밖으로 나돌았단다.

서자라서 관직도 못 올라가는 데 이제 뭘 해야 할까?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쩌다 행상과 어울리게 됐고, 금단의 빨간책. “자본유학론”을 알게 되어 푹 빠지게 됐다.

그리곤 아예 집안을 나와 버렸다.

지저분한 집안싸움을 포기한 탓에, 집안 어른들도 별말 안하고 돈을 두둑하게 쥐어서 보내줬고.

“흐음. 그래서 성주 이씨 본가하고는 관계없다?”

“예. 뭐... 예전하고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원래 역사에서 이직은 세종의 세자책봉에 반대했다가 유배를 당한다. 다만 지금은 유배를 당하기 전에 먼저 사직하고, 성주에 와 있다고 했다.

‘음... 버리자니 조금 아까운데?’

남이 만들어준 길을 가는 건 쉽지만, 자기가 새로운 길을 찾아 만들어가는 건 어렵다.

그것도 유학을 배운 녀석이 자본유학론을 알아서 습득했고, 현실을 박살내는 획기적인 제안을 거론해? 나름 상재가 있는 녀석이다.

“다들 앉아라.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거. 차 좀 가져와라.”

“옙! 장군님.”

연오랑의 부름에 현청에서 일하는 노비들이 재깍 움직였다.

그는 현청을 자기 마음대로 임시본부 삼아 쓰고 있는데,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당장 현감과 향리들이 자기 자식뻘인 소년들에게 불려가 타박 받고 있지 않나.

글 쓰는 거나 유학의 이치야 상대가 안 되겠지만, 돈과 사람을 분류하고 부리는 일은 소년들이 더 잘한다. 그거 못하면 기업을 키우지도 못했지.

아마 현감과 향리는 속으로 “뭐 이런 애들이 다 있지? 꽁꽁 숨긴 비리재산을 어떻게 다 찾아냈지?”라고 경악하고 있지 않을까?

“자. 혀를 놀려봐라.”

“옙! 저희 계획은 말입니다.”

하동에서 가져온 찻잔과 차를 앞에 두고서, 청년과 행상은 열심히 입을 털었다.

조선판 투자설명회라고 할까? 연오랑은 괜히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속으로 웃으며 경청했다.

녀석의 계획은 거창하지만 단순했다.

운송기업을 만들어서 하동과 고령을 잇는 정기거래를 하고, 이곳 고령 뉴타운을 발판으로 경상도에 각지에 거래처를 만들겠다는 거다.

이걸 스스로 할 깜냥이 부족하니, 연오랑에게 투자금과 경영기술의 전수를 부탁한 거고.

‘요놈 봐라. 십선비는 확실히 아니군.’

21세기 사람이 보기엔 그야말로 단순명료한 계획이건만, 15세기조선에서 유학에 파묻힌 골수 십선비가 떠올릴 수 있는 계획이 아니다.

실행의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실행 그 자체에 용기가 더 필요한 일이다.

“다른 임방하고 이야기가 된 거냐?”

“몇몇은 관심을 표했고, 몇몇은 망설였습니다. 아마 저희가 성공하면 다들 움직일 겁니다.”

“음.”

연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장난스럽게 꺼낸 게 아닌 모양이다.

거래처라는 건 양쪽에서 주고받는 사람이 있어야 생긴다.

이쪽에서 운송기업이 생긴다고 해도, 행상마냥 노점 혹은 방문판매로 팔아서는 수익이 나오겠냐.

그 말은 다른 지역에도 뉴타운 비슷한 시장이 준비되고 있거나, 아니면 그 지역의 누군가가 물건을 받아서 자체적으로 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지.

이렇게 한발 앞서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행상조직 밖에 없다.

평범한 양반가문이나 양민이나, 하동에서 뭔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나 하겠냐.

그리고 이 녀석은 용케 다른 지역의 임방을 설득해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동업자를 위험천만한 도박판에 끌고 온 거나 다름없으니, 이 녀석이 그만큼 믿음을 줬다는 뜻.

‘생각보다 더 쓸만한 녀석인데?’

“좋은 계획이지만, 지금. 아니. 한동안은 불가능이다.”

“...어. 어째서?”

녀석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무너졌다.

“간단한 이치다. 이쪽에선 팔게 있지만, 저쪽에서 살게 없어.”

이 시대의 장사는 A지역에서 a물건을 가져다가 B지역에다 팔고, b물건을 사서 A, C지역에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거다.

문제는 a가 하동물건이면 b,c에 해당하는 물건이 없다.

있어봐야 특산품 약간? 그걸 누구 코에 붙이냐. 기념품 사오는 정도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녀석이 말하는 건 말 그대로 운송만 하는 건데, 그래서야 돈이 되겠냐.

그냥 물품대금으로 쌀이나 면포만 받아온다고? 그걸로 뭐할 건데? 쌓아둘 게 아니면 결국 그걸 또 팔아서 뭔가를 사와야 하는데, 사올 곳이라고는 또 하동밖에 없다.

이래서는 지금 행상의 활동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덩치만 조금 커진 거지.

“우선적으로 다른 지역에도 기업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래.”

조선은 극한의 자급자족사회라 하지 않았나.

자기가 쓰고 남은 잉여물품이 있어야 팔든지 말든지 하지. 잉여물품 자체가 나오질 않는데 뭘 파냐.

그렇다면 조정에선 필요한 물건을 어떻게 조달하냐고? 그래서 공물이 있잖냐. 직접 뜯어가는 거지.

그럼 일반백성은? 말해 뭐해. 그냥 없이 사는 거다. 평생 그렇게 살았는데, 갑자기 뭐 개과천선해서 잉여물품을 만들고 팔겠다고 나서겠냐.

“더 큰 문제는 조정에서 너흴 어떻게 생각하겠냐.”

“음...”

조정은 상업을 억제한다.

지금은 15세기. 조선 관료와 유학자가 생각하는 상인이란, 물건을 옮겨 팔며 시세차익을 얻는 자들이다.

매점매석은 패시브스킬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어떻게든 이윤을 남겨 먹으려고 온갖 조작을 하는 사기꾼이라는 인식이 자자했다.

이건 조선만 그런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식이 비슷하지.

그렇다고 상업의 이점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저 이점보다는 단점만 부각시킨다고 할까.

물론 지금은 사상계가 쪼개지고, 중국과의 교역이 끊기고, 자주화의 물결로 꿈틀거리고 있는 탓에... 대충 뭉개고 암묵적으로 모른척하는 거지. 대놓고 허락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기업은 어떨까? 자기들이 직접 생산하고, 직접 판매한다.

비록 그 물건이라는 게 온갖 잡다한 게 다 있지만, 거래의 형태로 보면 농부가 쌀을 생산해서 파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여 연오랑은 거침없이 기업설립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기업의 개념과 형태는 조정, 혹은 유학자가 생각하는 상인, 상업에서 살짝 벗어나 있으니까.

업종을 불문하고 주문생산이 당연한 시대에, 뜬금없이 대규모 기성품이 풀린 느낌이랄까? 이걸 어떤 직업형태와 존재로 규정해야할까?

“그런데 너희의 움직임에 때문에, 조정의 눈이 우리에게 쏠릴 수 있다.”

문제는 녀석의 운송기업은 조정이 생각하는 상인의 개념에 딱 들어맞는다.

그럼? 당연히 파헤치고 조사할 거고, 그 끝에 기업이라는 생경한 조직이 존재하는 걸 알아차린다.

그래서는 절대 안 되지. 기업이 알려지는 건 상관없지만, 상업을 빌미삼아 기업을 걸고넘어지기 시작하면 난감해진다.

이걸 우려해서, 연오랑은 조정과 끈이 약한 촌구석과 변두리지역을 공략하고 있지 않나.

연오랑은 기업을 통해 조선 자체의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게 최우선 목표이지, 벌써부터 쓸데없는 유통기업을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다.

“지금은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시간이 흘러 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난다고 치자.

드디어 각 마을, 고을에서 자급자족을 하고도 남는 잉여물품, 혹은 특산품이 생겨났다.

이 남는 물건은 어쩌지? 뭘 어째. 내다 팔아야지.

그때가 되면 이미 조선팔도 온 고을에서 당장 상인과 운송기업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을 치게 될 거고, 행상은 준비하고 있다가 시류에 발을 맞춰서 움직이면 그만이다.

“조심스럽게. 살얼음판을 걷듯 움직여야 한다. 우린 단순히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조선사회를 흔들고 기존 기득권을 위협할 단초를 만들고 있으니까.”

연오랑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무섭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었다.

여기 모인 행상들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지 않게, 강력하게 경고를 날렸다.

상인, 공인의 성장은 무얼 의미할까? 당연히 새로운 계층의 탄생이다.

원래 역사의 조선후기에도 그랬고, 수많은 외국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유럽에서 부르주아, 자유무역도시, 길드라는 게 괜히 생겼나. 돈이 모이면서 상인과 장인의 지위가 올라가 귀족을 압박했다.

그리곤 피터지게 싸우는 거지. 권력과 신분이라는 밥그릇을 놓고 말이다.

연오랑은 이걸 알고 있으니, 당연히 치트키를 써서 비켜 가야지.

상업으로 인해 새로운 신분이 생긴다고? 그런 일이 없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그래서 기업을 만들었다.

기득권층인 양반, 지방호족이 기업의 탈을 쓴 상인,장인이 되면 문제없지.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안에서는 양반과 상인, 장인의 위치가 엇비슷하게 섞여버리고.

그럼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르겠지만...

먼 훗날 벌어질 싸움은 기득권 계급인 양반 vs 치고 올라오는 상인,장인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같은 기득권층인 기업가양반 vs 지주양반의 개싸움이 되는 거다.

이러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지.

“반란세력이니, 나라를 뒤엎는 역도니. 사기꾼이니. 나라 말아먹을 반동분자니.”하는 과격한 명분은 못 써먹는다.

오히려 명분이 반으로 쪼개져서 사상대립으로 이어지거나,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밥그릇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조정은 안 그래도 쪼개졌으니, 유학ver4.0에 가까운 이들은 반발할거고, 유학ver4.9에 가까운 이들은 환영할 거다.

왕은? 팝콘 먹으면서 구경하면 되고.

왕권을 위협할 혹은 귀찮게 할 신권이 알아서 반으로 쪼개지는 데, 그 사이에 껴서 열심히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면 되는 일 아닌가.

기업과 상업의 발전이 나라에 해가 되지 않도록, 두 세력을 이리저리 움직여 핸들링만 잘하면 그만이다.

상업의 억제? 그때쯤 되면 억제는커녕 장려해야 될 거다.

온 백성이 다 상인이 되겠다고 난장을 피울 거고, 당장 조선팔도 전체가 돈이라는 피가 돌지 않아서 괴사할 테니까.

아니면 반대로 사방이 막혀서 부글부글 끓다가 반란과 독립이라는 형태로 터지든가.

자주화라는 이름으로 터졌던 작은 종기들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될 거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려면, 먼저 기업이 완전히 뿌리 내려야 하고. 그 후로도 십몇년. 아니면 몇십년은 지나야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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