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60화 (60/538)

60. 챕터10. 정리하다 (7)

“무슨 말인지 이해했냐?”

“...”

대답은커녕, 어째 가벼운 침묵이 맴돌았다.

“에혀. 됐다. 공부 좀 해라. 인마.”

행상들은 한소리 들었음에도, 당최 뭔 말인지 몰라서 멀뚱멀뚱 바라만 봤다.

그냥 돈이나 조금 더 벌려고 기업을 만들려고 했는데?

“조정”이니 “기득권층”이니 “계급”이니 “명분”이니... 뭔가 어렵고 알아듣기 힘든 단어가 나열되니 머리가 뜨거워진다.

말 그대로 말이 아니라 단어의 나열로 밖에 안 들렸다. 연오랑을 무슨 귀신 보듯 바라본다.

연오랑은 이럴 줄 알았기에 그냥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었다.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행상들이 멋도 모르고 그냥 “일단 지르고 보자! 돈 벌어야지! 가즈아!”라고 막무가내로 움직였다가는 산통 다 깨진다.

그걸 두고 볼 수는 없으니, 이렇게 강력하게 경고를 날리는 수밖에.

반대로 청년은 입을 쩍 벌리고, 계시라도 받은 사람마냥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병든 닭도 아니고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만, 녀석은 사랑에 빠진 사람마냥 쳐다보는 게 아닌가.

“왜. 뭐. 눈알 빠지겠다?”

“조... 존경합니다. 연 장군님!”

“알면 됐다.”

시건방지고 오만방자한 반응이건만, 이 또한 멋져 보이는지 청년은 예의도 잊고 박수를 쳤다.

“그럼 저희는 뭘 해야 합니까?”

“상행은 지금처럼 소규모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대신 임방은 목장. 더 많은 목장을 만들어라. 조선팔도가 짐승 똥냄새에 질식하도록 말이야.”

“...?”

“너희가 주력할 일은 토끼, 염소, 사슴농장을 구축하고, 요동과 여진에서 말과 가축을 사오는 거다. 거지같은 여진놈들의 유일한 재산을 전부 털어라.”

“...!”

연오랑은 “조선을 말박이의 나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드러냈다.

논의가 끝나고 행상들이 돌아가자, 이자경은 조심스럽게 그를 따로 불렀다.

이 자식이 왜 이러나 싶어서, 따라 가보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펼쳐졌다.

‘이 새끼가 뒤질라고...’

겁도 없이, 이자경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구라를 친게 아닌가.

연오랑은 사정없이 눈을 부라렸고, 이자경은 “앗. 뜨거라.”하는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몸을 베베 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이 안내한 곳. 조용한 양반집 마루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노인이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너무 그러지 말게나. 자네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어려운 부탁을 했네. 집안어른의 부탁을 쉽게 떨칠 수 있었겠는가.”

“...”

노인은 이자경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를 타일렀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걸 보니, 정체는 뻔하지 않나.

연오랑이 씹어댔던 인물. 성산부원군. 이직이다.

‘후...’

예상 밖의 상황이지만,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흔들리면 안 되지.

차라리 잘됐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언제가 됐건 이런 일을 한번쯤 겪어야 했으니까.

차라리 지금처럼 조용하고, 아무도 모르게 경험하는 게 낫지.

“처음 뵙겠습니다. 대감어른.”

“편히 앉게. 소문만 무성한 인물을 보니 내가 더 놀랍구만. 거참. 자네... 연씨가 맞긴 맞군. 대장군감이로세. 허허.”

“...”

‘쓰벌... 또 아는 눈치잖아?’

연오랑은 눈치 보지 않고 마루에 떡하니 걸터앉아서, 이직을 슬그머니 살폈다.

이 양반도 개국공신이니, 조부와 아버지를 아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저렇게 묘한 눈을 하고서 연오랑을 보는 것 아니겠나.

아마도 ‘연씨가문에서 어떻게 이런 낮도깨비 같은 놈이 튀어나왔을꼬.’라고 생각하겠지.

“조용히 책 읽느라, 세월 가는 것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만...”

“허허. 그랬나? 재밌는 책을 구해서 말일세. 연씨 가문이 글재주도 있는 줄은 몰랐군.”

이직은 그리 말을 하고선, 슬그머니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이자경의 손 떼가 잔뜩 묻은 자본유학론이다.

한방씩 주고받는다.

연오랑이 ‘태종에게 찍혔으면 집에나 처박혀 있지, 왜 여기까지 왔냐?’라고 까자, ‘너 때문에 왔다. 네가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잖냐.’라고 받아치는 게 아닌가.

둘이 뭔가 친분이 있는 것 같으면서, 또 알게 모르게 날선 공방을 날려대니... 중간에 낀 이자경만 죽을 맛이다.

녀석이 연씨가 어떤 가문인지 알기나 하겠냐.

나이 지극히 먹은 이들 아니고서야, 공신인 걸 모를 정도로 연씨는 존재감이 없었다.

이직처럼 연씨를 아는 이들이 보기엔, 연오랑은 진짜 돌연변이지.

‘으음... 이직. 이직. 부원군이면 분명 보고 했을 텐데.’

연오랑은 맹렬히 머리를 굴려 기억을 더듬었다.

21세기 기억은 당연히 아니다. 21세기의 그는 이직이 누군지도 모른다.

최근 조정 동향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뒤적이며, 이직이 어느 성향인지 떠올려봤다.

‘아...! 버전4.0에서 버전4.6로 성향이 바뀌었다. 지금은 개혁적 중립성향.’

끝내. 보고서 말미의 짤막한 결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거 말인가? 흐음...”

연오랑의 선공에 이직은 책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연오랑 앞에서, 허세나 위압 같은 건 통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가 보기엔, 뭐랄까... 분위기를 잡고 주도권을 쥐려는 침묵이 아니라, 진짜로 고민에 빠진 눈빛으로 보였다.

그리고 연오랑의 생각이 맞았다.

이직은 자본유학론을 읽고 나름 놀라고, 분노하고, 후회하고, 한탄했으니까.

이직은 무려 고려를 쥐고 흔들었던 이인임의 조카다.

고려 우왕 때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되었고, 조선 건국에 일조하면서 공신이 되었으며, 1차 왕자의 난 때에는 겨우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그 후 태종에게 용서받고 복권되었다가,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사직하고 낙향했다.

많은 노신老臣들이 그러하듯,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지.

거기에 원래 역사와 다르게, 운석핵꿀밤의 여파를 직격으로 맞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종에게 왜 죽을 뻔했는가. 정도전과 함께 유학의 이상론을 주장하던 계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생을 추구하던 이상이 명나라멸망, 천명실종사건, 운석핵꿀밤과 함께 날아갔다.

사람이 상상치도 못한 충격을 받게 되면, 더욱더 매몰되어 골수분자로 변하든가, 아니면 반대로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반대편으로 몰두하게 된다.

이직은 용케 중간에서 멈춘 인물로, 이상론적인 ver4.0계열에서 개혁적인 ver4.6으로 서서히 변모해갔다.

이 정도로 심지를 굳게 잡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

그런 변화를 겪은 인물이 보기에 자본유학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정말로 애매하다.

“맞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나, 지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존재하지. 참으로 논란이 많을 거다.”

“...”

어찌 보면 뻔한 답변일지도 모르지만, 연오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욕을 안한 게 어디냐. 개혁적 중립성향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어떤 부분이 그러합니까? 역시 사업일체와 자본입니까?”

“음...”

이직은 조용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을 지탱하는 건 성리학이고, 그 이상론에는 강력한 농본주의가 있다고 했다.

근본성리학자들이 주장하는 이상향. 인의가 구현되는 왕도정치를 위해서는 만백성이 편안하게 생활하는 게 필수조건이라 생각했다.

다만 농업만이 이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에, 토지국유, 경자유전, 토지의 균등분배, 중농억상 등의 시책이 줄줄이 이어지고, 이게 정치적 강령이 되어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감어른이 주장하시고, 정도전이 주장했던 개혁이 제대로 진행이나 되었습니까?”

“...”

거의 신념에 가깝게 굳어진 논리를 깨는 게 어려우면, 물타기로 넘어가야지.

연오랑은 논리가 아니라 현실을 꼬집었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가슴에 멍울이 남은 이직을 사정없이 때렸다.

“벌써 한 세대나 지났는데 지금껏 토지개혁이 얼마나 이뤄졌습니까?”

고려의 잔재를 열심히 때려 부수고, 새나라 조선의 기틀을 잡은 건 맞다.

그러나 이상론자들이 주장하던, 완전히 새로운 나라.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이뤄지는 정의롭고, 멋들어진 개혁이 과연 이뤄졌을까?

그럴 리가 있나.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전법 토지개혁.

이건 기득권층의 반발로 경자유전에 의한 균등분배가 아니라, 수조권 재분배에 가까웠다. 양반사대부, 지방호족 모두 반대했지.

즉. 첫 단추부터 반쯤 실패한 거다.

“...”

“반쪽짜리 성과라 하나, 그게 과연 어르신들의 역량입니까. 아니면 태조대왕님과 상왕전하의 칼 덕택입니까.”

“흐음...”

이직은 오래전에 묻어뒀던 청년 태종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론적 개혁은 실패했는데, 어떻게 조선이 조금은 건강하게 바뀌었을까?

태조와 태종이 미친 듯이 썰어댔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기득권 말고도, 때려잡을 고려의 기득권이 너무 많아서, 그놈들만 패도 나라가 정상화가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 당장은 자영농의 비중이 최소 5할, 최대 7할까지 늘어났다.

정말 엄청나게 때려잡아서 양민으로 풀어낸 거지.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

“사업일체. 자본이 문제라 하셨습니까? 지금의 양반관리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이 자기 것을 놓는 걸 보신 적이 있습니까?”

“...”

이건 이직도 마찬가지인지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조선은 녹봉을 못 준다. 돈이 없으니까. 그래서 과전법이라고 해서,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줬다.

땅을 넘겨준 건 아니고, “이 땅에서 나는 소출을 네가 직접 걷어서, 네 녹봉으로 해라.”라는 거다.

문제는 고작 한 세대만에 이 과전이 수신전, 휼량전등으로 인해서 세습화가 진행되었고, 알아서 걷다보니 풍년, 흉년에 따라 들쑥날쑥해서 백성들만 고달파졌다.

당연히 알게 모르게 세습화로 이어졌고.

원래 역사에서도, 이 때문에 국가에서 직접 녹봉을 나눠주는 관수관급제로 전환된다.

“저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위선을 꼬집고 싶을 뿐입니다. 자본을 멀리한다는 유학자가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꼼수를 쓰는 건 정당화하고, 어째서 남의 허물은 죽도록 캐는 겁니까?”

“...”

모순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땅 말고는 먹고 살길이 없는데, 이 땅을 빼앗긴다? 죽었다 깨나도 막아야지. 자기 대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라고?

입신양명이 제일 목표지만, 가문의 보존과 번영 또한 최우선 목표 아닌가.

연오랑은 이걸 꼬집었다. 그럴 거면 그냥 돈. 자본을 인정하라고.

왜 그걸 인정 못하고 앞에선 정의로운 척, 뒤로는 꼼수를 부리면서 추잡해지나.

“토지에서 나오는 재산만 인정하면, 관리는 점점 늘고, 양반도 점점 느는데,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합니까? 백성들의 토지를 다 빼앗을 겁니까? 관리든 양반이든, 누구도 망하길 원하는 사람은 없고, 결국엔 어떻게든 토지를 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먼 훗날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전조의 귀족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건 오히려 연오랑이 확신한다. 조선후기까지 이 문제는 계속 이어지니까.

말기에 이르면 양반세도가가 고려의 문벌귀족마냥 엄청난 대토지를 소유하고 그러지 않나.

“그냥 인정하면 안 됩니까? 토지에만 붙들려 있어봐야 영원히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농업만이 전부가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관리나 양반들이 죽도록 토지에 목을 매겠습니까?”

“...”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관리와 양반, 호족들이 토지에 신경을 덜 쓰면, 오히려 이상적인 토지개혁이 더 쉬워질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으십니까?”

“...흠.”

이직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