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챕터11. 사냥가다 (1)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한편으론 말이 된다.
토지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업일체를 통해 재산증식의 방법이 토지 말고 다른 쪽으로 향하면, 충분히 토지겸병과 세습을 방어할 방책이 생길 법도 하다.
“허나...”
이직은 근본으로 돌아갔다.
이걸 인정한다는 건, 결국 왕도정치의 구현이 농업 말고도 다른 곳에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게 가능할 것인가.
특히나 상업이야 말로, 나라를 혼란하게 하는 돈놀이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유학자로서는... 선뜻 나서기 힘들다.
이직을 비롯한 노신들은 여말선초, 원말명초의 정신 나간 혼란기를 겪어봤다.
칼에 의한 혼란 말고, 돈에 의한 혼란도 함께 겪었다.
몽골제국은 초거대제국이었고, 21세기식으로 표현하면 그 당시엔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에 속해 움직였다.
저 먼 유럽의 물건이 고려까지 오고, 고려의 물건이 중앙아시아나 중동을 거쳐 유럽까지 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후신인 4대 칸국과 원나라가 분열하고 망하면서 물류가 끊어졌다.
한쪽에선 넘쳐나는데도, 다른 한쪽에선 없어서 굶어간다.
더불어 원나라의 화폐였던 교초의 가치가 몰락하면서, 같은 경제 생활권이던 고려 또한 초특급 인플레이션이 밀어닥쳤다.
대충 고려판 대공황 비슷한 게 밀려온 거지.
이 일을 겪은 노신들 입장에선, 상공업의 인정과 발달이라는 건 트라우마이자 노이로제를 일으킬 상황인 거다.
이직의 이야기를 들은 연오랑은 오히려 속으로 ‘아싸’를 외쳤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바로 그게 기업과 자본유학이 필요한 점이자, 기존의 상공업과 다른 점입니다.”
“...?”
이직은 쉽게 이해하지 못해 슬그머니 눈을 치켜떴다.
“기업은 전조 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필요한 겁니다.”
이 시대 유학자들이 생각하는 상업, 특히나 왕도정치에 방해가 되는 상업은 기껏 해봐야 부도덕한 매점매석과 사치품, 나라의 필수품을 구입하는 거다.
이 범주에 있어서 일반백성은 주가 아니다.
하지만 연오랑이 기업을 통해 꾀하는 건, 모든 부분에 있어서 조선 전체의 생산량, 경쟁력 증대다.
비싸고 고급스런 물건을 판다? 당장 그거 만들어봐야 누가 사냐? 상업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될 일이다.
그게 아니라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기업을 키우겠다는 거다.
먹을 게 부족해? 그럼 수산기업을 통해 해산물을 뿌리겠다. 건설기업을 통해서 둑과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생산량을 끌어올리겠다.
농기계가 부족해? 그럼 공작기업을 통해 농기계를 찍어내겠다. 축산기업을 통해 더 많은 우마를 제공한다.
의복이 부족해? 그럼 농산기업을 통해 더 좋은 작물을 키우고, 공작기업을 통해 더 나은 직물기계를 도입한다.
가옥이 부족해? 그럼 건설기업을 통해 더 많은 집을 짓고, 다리를 만들겠다. 등등.
노신들이 생각하는 상업과 거리가 있는, 백성을 타겟으로 놓고 철저히 조선의 내실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진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상공업이 증진되는 거다.
이런 기업을 효과적으로 키우려면, 자본유학이 주장하는 개념이 저절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고.
“전조 때 혼란이 밀어 닥친 건, 단적으로 말해서 나라의 생산력과 산업이 건강하지 못하고, 부가 오로지 소수에게만 쏠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통해 백성과 나라 전체가 부강해지면, 전조 때처럼 그리 쉽게 무너지겠습니까?”
21세기식으로 말하면 최소한의 수출입으로도 돌아가는 내수시장의 증대와, 초강력한 보호무역을 통해서 세계경제의 여파를 줄이겠다는 거다.
“어떻습니까. 유학적 왕도정치를 위한 방편이 꼭 농업만 있다고 보십니까?”
“으음...”
이직은 이런 방향으론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긴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겼다.
연오랑의 설명이 모두 실현된다면, 말 그대로 농업만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공의 기술과 기구로 농의 생산력을 끌어올리고, 상을 통해 잉여물산을 재분배하고, 사의 제도와 통제로 이 모든 걸 조절하는 것.”
“...”
“이게 자본유학에서 말하는 사업일체의 본질입니다. 어느 하나가 우선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엮여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 바탕에는 농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
“근본을 따져보시지요. 농본주의를 통해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겁니까. 아니면 왕도정치를 위해서 농본주의를 택한 겁니까?”
“허허...”
선후가 뒤바뀐 게 아니냐고, 매섭게 찌르고 들어갔다.
백성들이 걱정 없이 먹고살 길이 생긴다면, 그로 인해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면...
그 수단이 쟁기질이든, 물질이든, 못질이든 상관있을까?
“허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가...”
“예. 그 부분은 저도 생각해 둔 방책이...”
그렇게. 둘은 밤늦게까지 진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직은 자본유학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걸 깨닫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연오랑은 근본유학자를 상대할 예행연습을 하듯 문답을 이어갔다.
이자경은 그 중간에 껴서, 심부름꾼이 되어 찻물을 연신 날랐다.
연오랑에게 두들겨 맞기 싫어서라도 손발을 열심히 놀렸다.
*****
연오랑이 할 일은 끝났다. 나머지는 실무진이 알아서 이끌어 가면 그만.
이제 고령에 온 두 번째 목적을 챙길 시간이다.
며칠 후. 연오랑은 연전위만 데리고 새벽부터 움직였다. 목적지는 고령 서북쪽의 수륜마을.
찾는데 오래 걸릴 줄 알았지만, 고령 뉴타운 건설로 인근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이지 않았나.
물어물어 알아보니 수륜마을에 있단다.
“그런데 어르신. 수륜마을에는 왜 가는 겁니까?”
“네 친구 찾으러 간다.”
“친구요?”
평생을 황해도에 살다가, 강진에 잠깐 머물다가 하동으로 왔다. 그런데 이곳 고령에 친구가 웬 말인가?
연전위는 소마냥 눈을 끔뻑거렸고, 연오랑은 피식 웃었다.
이 자식 생긴 것 답지 않게 귀여운 척을 하고 있네.
“그런 게 있어. 인마. 고민해봐.”
연오랑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던져주곤 계속 나아갔다. 정답을 찾을 수나 있겠냐. 그냥 약 올리는 거다.
수륜마을로 가는 길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고령 북쪽으로 흘러내려오는 대가천을 따라서 쭉 올라가면, 그곳이 바로 수륜마을이다.
연오랑에게 홀딱 반한 이자경이 그곳 출신 아닌가.
방귀 꽤나 뀌던 집안답게 수륜마을 사정은 꿰고 있었다. 그래서 연오랑이 개떡같이 설명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일러 준거지.
마을 입구에 있는 큼지막한 느티나무를 지나, 죄다 빠져나가서 몇 없는 농부들에게 먼지를 먹여주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늪지와 갈대밭을 지나 도착한 곳.
“흐음.”
“오...”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고, 연전위는 처음 본 광경에 감탄을 내질렀다.
둘의 눈앞에 저 멀리 보이는 건, 딱 봐도 더럽게 험해 보이는 바위산.
가야산 끝자락에 도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말이죠. 제가 아는 사람이 여기에 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농담이다. 넘어가라. 좀.”
연오랑은 대충 손을 내저으며 말을 몰았다.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연전위 이 자식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굉장한 수다쟁이다.
그가 “장수캐릭터”를 만들 때 성격까지 신경 썼겠는가. 애초에 성격항목은 에디터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덩치처럼 묵직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애처럼 굴지 누가 알았겠냐.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니, 이런 반응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15세기 조선사람 중에서 조선팔도를 유람하고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녀석이 일전에 떠돌았다지만 그땐 생존을 위협받으면서 숨어 다닌 거고, 지금은 정반대 아니냐. 가는 곳마다 신기하고 생경하겠지.
연전위는 말 그대로 촌놈티를 수다로 벗는 중이다.
“저기군.”
“집이 맞나요?”
“맞겠지. 폐가에 울타리를 쳐 놨겠냐.”
연오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대충 예상은 했다지만, 이렇게 거지꼴일 줄이야. 집이 아니라 무슨 움막이 따로 없다.
초가집도 아니고, 지붕은 그냥 나무쪼가리를 대충 겹쳐서 올려놨다. 저걸로 비나 피할 수 있을까?
울타리 또한 싸리나무를 대충 엮어서 던져놔서, 담장의 역할보단 그냥 “여기부터 집안임. 들어오지 마셈!”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만 사람 사는 건 맞는지, 빨랫줄 비슷한 줄에 고깃덩어리와 족제비, 토끼 가죽이 말라가고 있었다.
“누구요?”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가죽을 만지고 있어서 일까? 어두컴컴한 집안에서 봉두난발한 괴인이 기어 나왔다.
어젯밤에 진탕 술을 처먹었는지, 움직일 때마다 술 냄새가 확 밀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힐끔 보인 뒤편엔 술독이 찰랑거리고 있다.
“저 아래 수륜마을의 이씨 소개로 왔는데, 자네가 사냥을 그렇게 잘한다면서?”
“요샌 사냥을 쉬고 있습니다만...?”
녀석은 연오랑과 연전위의 모습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겠지.
자신만큼이나 덩치 큰 사람은 처음 봤을 거고, 조선에는 없는 괴상한 옷을 입고 있고, 딱 봐도 범상치 않은 덩치 큰 말을 타고 있다.
끝으로 안장에는 온갖 무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활. 화살수백대. 창. 투창. 밧줄. 그물. 괴상하게 생긴 망치. 등등. 아무리 봐도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
그런 인물이 느닷없이 떡하니 등장하니, 녀석의 눈동자는 의심으로 가득 찼다.
어째 연전위가 연오랑을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다.
‘흐흐. 살살 가 볼까나?’
“일단 씻고 오지? 냄새나는군.”
“...?”
“씻고 오라고. 밥이나 먹게.”
연오랑이 짐마로 끌고 온 말에서 쌀주머니를 꺼내자, 녀석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몸을 일으켰다.
“양반나리께서 앉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만...”
“십선비들하고 비교하지 마라.”
연오랑은 뭔 말인지 몰라서 눈에 물음표가 가득 피어오른 녀석을 뒤로하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다 무너져가는 평상에 엉덩이를 붙였다.
평상인지 통나무를 대충 잘라서 박은 건지 모를 물건이지만, 녀석 말대로 앉을 곳이라고는 여기 밖에 없다.
“... 어르신. 누굽니까?”
“네 친구라니까? 일단 밥부터 먹자.”
“예에...”
연전위는 조용히 다가와 캐물었고, 연오랑의 대답에 불퉁불퉁 입술을 내밀었다.
이 자식. 연오랑보다 나이도 한 살 많으면서 진짜 애처럼 군다.
녀석만 둘을 보고 놀랐겠냐? 당연히 연전위도 녀석을 보고 놀란 터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답을 찾아갔다.
그러면서도 손은 재빠르게 움직인다. 근처에 널려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서,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화덕에 불을 피웠다.
이젠 연오랑 야전식기에도 익숙해져서, 차곡차곡 쌓여 있는 식기를 꺼내 물을 부어 죽을 만들기 시작.
연오랑은 옆의 작은 화덕에 청어절임을 나무에 꽂아 직접 굽기 시작했다.
“허...”
대충 씻고 나온 녀석은 자기집 마냥 불을 피우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호오. 홀로 사냥꾼으로 산 게 맞긴 맞군?’
역시. 이 녀석도 보통은 아니다.
양반네로 보이는 둘을 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움이 없다. 이건 천성이 대범한 놈이든지, 아니면 이런 경험이 많든지 둘 중 하나.
녀석은 건방지게, 냄새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드릴 거라고는 이거 밖에 없습니다만...”
녀석은 도축한지 얼마 안 된 토끼고기를 내밀었다. 아직 상하진 않은 터라 구우면 그럭저럭 먹을 만 할 것 같다.
집안에서 넓적한 돌판을 가져와 화덕에 올렸다. 돌판에 기름기 가득한 게, 역시나 고기를 구워먹었나 보다.
이윽고 식사준비가 끝.
“오...!?”
녀석은 연전위가 건네준 식기와 쇠숫가락을 묘한 눈으로 살폈다.
녀석이 조선판 21세기 코펠을 언제 봤겠냐. 신기하겠지.
이내 한입 크게 머금고선 이번엔 감탄을 내질렀다.
유사MSG 맛이 어떠냐? 말린 다시마와 표고버섯의 조합은 혀를 춤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