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챕터11. 사냥가다 (3)
자신의 아들에게 “내겐 동료들이 있었다. 나중에 찾아봐라.”라고 전해줄 정도로 말이다.
감동을 안 먹으면 사람이 아니지.
물론 이건 엄청난 오해지만, 연오랑이 오해를 풀어주겠냐? 오히려 이용할 놈이다. 더불어 연조운에게도 나쁠 거 하나 없다.
“거거. 그러지 말라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라.”
“...?”
연오랑은 재깍 손짓했고, 연전위는 냉큼 몸을 날려 짐을 챙겨왔다.
어째 이자식도 살짝 눈이 물컹한 게, 같이 감동을 먹은 것 같다.
뭐... 이걸 예상하고 좀 과하게 쇼를 했지만, 마냥 쇼는 아니다.
연오랑도 이 녀석들의 가정사에 왠지 모를 부채를 느꼈으니까. 그가 배경설정을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아닌가? 그랬으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겠지.’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우울한 상념을 날려 보낸다.
게임이 현실이 될 줄 누가 알았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뭐.
녀석은 두 사람과 같은 복장으로 변신했다.
한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이 나갔다.
거의 21세기의 전투복과 비슷한 형태였으니까. 21세기 전투화를 닮은 연오랑 보병군화에 바지 밑단을 쑤셔 넣은 터라, 더욱 그렇게 보인다.
여기에 알록달록 위장무늬만 입히면 진짜 전투복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위장무늬는 돈이 많이 든단 말이지. 그냥 검정색으로 통일할까?’
가장 값싼 건 처음 만들어진 면포 그대로 쓰는 건데, 그럼 밝은 누런색. 아이보리? 연베이지?색의 옷이 된다. 위장효과가 전혀 없잖아?
그나마 검은색이 위장도 잘되고, 값도 싸게 먹지 않을까? 정확히는 광택 있는 검은색보다 먹색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염색기업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어.”
이미 이쪽도 손을 써놓긴 했지만 제대로 해봐야겠다.
“예?”
“아니다.”
연오랑은 손을 쓱쓱 저어가며 상념을 다른 상념으로 덮었다.
“저... 어르신 이렇게 입는 게 맞습니까?”
“오냐. 맞다.”
상념을 날리는 연조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 과연 전설장수다운 떡대다.
떡대 3명이 똑같이 차려 입고 있으니, 그냥 보고만 있어도 위압감이 팍팍 몰려온다.
“무기 챙겨라.”
“옙!”
연오랑과 연전위는 말 등에 싣고 온 무기를 차곡차곡 자기 몸에 부착했다. 그래. 부착이라는 말이 정확하다.
등에는 각궁과 큼지막한 전통을 매고, 21세기의 엑스밴드 비슷하게 만든 가죽끈을 걸쳤다.
등 뒤로 향한 가죽끈에는 가죽고리가 여러개 달려 있는데, 거기에 연오랑 사냥창. 흉악하게 생긴 투창이 5개씩 꽂혀 있었다.
그 옆으로는 21세기의 크로스백 비슷한 배낭을 차고, 안에 밧줄과 그물을 우겨넣었다.
배낭 끝엔 21세기 토마호크 도끼를 2배로 뻥튀기 해놓은 것처럼 생긴 도끼가 매달려 흔들거렸다.
허리춤에는 장도를 차고, 21세기의 건빵바지마냥 허벅지에 붙여놓은 주머니에는 회칼만큼 큼직한 단도를 수납했다.
그리고? 손에는 2미터가 조금 넘는 기창을 쥐었지.
“저걸 다 걸쳐 메고 뛸 수나 있겠나?”싶겠지만 전설장수를 무시 하냐? 전설장수는 생긴 건만 인간이지, 인간을 초월한 돌연변이다.
연조운은 이렇게 우악스럽게 무장한 게 처음이라서, 더듬거리며 둘을 따라했다.
그러면서도 시커멓게 생긴 활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다.
‘음...?’
연오랑은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이상해 눈을 찌푸렸다.
뭔 진 모르겠지만 뭔가 분명 빠졌다. ‘뭐지?’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살펴보니... 어째 녀석은 창이 없네?
‘설마...?’
“너 사냥할 때 항상 활로 했냐?”
“예. 어르신?”
녀석은 “그럼 사냥을 활로 하지, 손으로 하냐?”라는 의아한 눈빛을 살짝 뿌렸다.
당연한 말에 의심을 품으니 이상하게 바라보는데...
“허허...”
‘이런 쓰벌.’
연오랑은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역시. 21세기의 그가 짜놓은 시나리오 이벤트보다, 더 이른 시간에 연조운과 만난 게 맞다.
시나리오 이벤트대로라면 연조운은 결국 가야산 동성봉에서 백호를 만난다.
하지만 사냥에 실패한다. 이유는 별거 없다. 화살로 잡기에는 백호가 너무 거대하고 가죽이 두꺼웠다.
하여 창으로 직접 상대하기로 마음먹고, 자기 마음대로 창술을 익히기 시작한다.
그런데 연오랑이 너무 빨리 오다보니까, 아직 거기까지 진행되지 않은 거지. 이 녀석은 동성봉에서 백호를 만나지도 못했으니까.
‘야. 너 무기를 잘못 들었어. 인마. 네 이름이 괜히 조운이겠냐? 창잡이가 활잡이 짓을 하고 있으면 되냐!’
연오랑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한탄을 애써 집어삼켰다.
21세기의 그가 “게임캐릭터 연조운”에게 부여한 특성은 세 가지다.
강인한 활력. 굳건한 신념. 질풍창의 후예.
강인한 활력은 무한한 활력의 하위호환. 굳건한 신념은 동일.
“질풍창의 후예”의 효과는 창 무기류 착용 시 공격력 200%증가. 장갑관통확률 100%증가다.
이걸 말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 배경설정을 붙였다.
- 질풍창의 후예는 수많은 세월동안 쌓아온 창술을 몸에 새기고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본능이 핏줄에 흐르고 있습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눈썰미를 타고 났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상대의 약점과 빈틈을 찾아내어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습니다.
이게 현실로 적용되면? 그냥 창에 재능이 있는 거고, 그냥 척 보면 감각적으로 “아. 저기가 약점이겠군?”하고 느끼는 거다.
이러니 이 자식이 창을 안 쓰고 활만 쐈겠지.
창에 재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고, 능력의 반쪽만 사용해도 충분히 사냥감을 잡고도 남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다.
“창 쓰는 법은 안 배웠지?”
“예.”
역시 빗나간다.
연조운은 또 다시 “당연한 걸 왜 물어? 창을 어디서, 왜 배워?”라고 묻는 듯 바라본다.
하긴 이 시대에 창술을 누가 배우냐. 군역을 치러야 창 쓰는 법을 배울 텐데, 그게 제대로 된 창질이냐.
게다가 누가 봐도 창처럼 보이는 물건을 들고 다니면, 이런저런 시비에 휩싸이는 건 당연하다.
나아가 조정이나 관아에선 이 녀석이 존재하는지도 모를걸? 그런데 군역은 무슨... 창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생활을 이어왔다.
‘아니다. 차라리 잘됐다. 처음부터 가르치는 게 낫지.’
살짝 실망했던 연오랑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게임이라면 이미 창술이 완성된 상태에서 합류해야 곧장 써먹기 편하겠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
엉망진창으로 자기마음대로 익혀서 나쁜 습관이 몸에 밴 것보다, 차라리 백지가 낫다.
“앞으로 창 쓰는 걸 배우자.”
“...?”
‘아니. 뜬금없이 창을 왜 배워?’ 녀석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그대로 떠올랐지만, 연오랑은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배워. 그냥. 배우다보면 재밌을 걸? 그 덩치로 뭐할래? 백호 잡으려면 활보다 창이 나아.”
“예? 예...”
녀석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짓다가, 백호라는 말이 나오자 눈에서 시뻘건 불꽃이 피어올랐다.
“가자!”
“옙!”
연오랑과 연전위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날렸고, 연조운은 “그냥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건가?”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함께 했다.
자다 일어났는데, 뜬금없이 은인이 찾아오지 않나. 그 은인이 백호가 어디 있는지 알지 않나. 끝으로 복수를 함께 하자고 하고 있다.
이 모든 게 고작 한시진도 안 되서 모두 벌어진 일.
하지만 연조운은 부정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딱 봐도 풍채 좋고, 칼질 잘할 것처럼 생긴 인물이, 널리 소문난 연오랑 말고 또 있을까? 없지.
굳이 자신을 속여가면서 연오랑이라고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 없지.
자신의 사정을 다 아는 인물이 연씨가문 말고 또 있을까? 없지.
그러니 연조운은 의심은 집어치우고 굳건하게 믿었다.
게다가 연오랑이 누구냐. 이미 조선팔도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인물 아니냐. 그런 인물이 복수를 함께하는데, 그 어떤 망설임이 있을쏘냐.
연조운은 고된 기다림과 고통을 끝낼 각오를 다지며, 힘차게 발을 놀렸다.
*****
연오랑이 이 시대에 와서 새삼 느끼는 건데, 조선에는 사슴이 참 많은 것 같다.
동물학자가 아니니 사슴의 종류는 정확히 모르겠다만, 아무튼 많았다.
초창기에 목장을 만들면서 “사슴농장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서 사슴농장을 만들었으니까.
하긴 21세기에 희귀보호종에 속하는 고라니가 유독 한반도에만 넘쳐나지 않냐.
사슴도 고라니 친구니까 뭐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호랑이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아무르호랑이의 주 먹이가 아무래도 사슴이니까.
이런 뜬금없는 생각을 왜 하냐고?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셋은 다 파먹고 남은 사슴 사체를 발견했다.
연오랑은 묵묵히 지켜만 봤고, 연조운은 흡사 연전위에게 설명하듯 입을 놀렸다.
둘은 산을 타면서 연신 대화를 나누더니 나름 친해졌나 보다.
딱 봐도 둘은 뭔가 닮지 않았나. 덩치도 그렇고, 살아온 날도 그렇고, 연오랑과의 인연도 그렇고.
이 모든 건 21세기 그가 전설장수를 생성하면서 벌어진 일이지만, 현실에 사는 이들이 느끼기에는 뭐랄까... 운명, 혹은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 뭐 이런 걸로 느낄 수밖에.
불교가 널리 퍼지고 미신이 횡횡하는 시대답게, 녀석들은 정말로 ‘전생에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전설장수가 또 튀어나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된다.
아무튼 나이도 비슷하니 당장 친구를 먹는 건 당연한 수순.
연오랑은 이걸 의도치는 않았지만... 나쁠 거 없잖아? 저렇게 친해지면 좋은 거지 뭐.
하여 ‘사냥꾼 연조운이 얼마나 실력 있나?’를 테스트 하듯,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조선팔도에서 호랑이를 제일 많이 잡아본 연오랑 아니냐. 척하면 척. 대충 보면 견적이 나온다.
“여기. 이 발자국을 봐봐.”
“음.”
연조운은 큼지막한, 어쩌면 귀여워 보이는 발자국을 가리켰다.
아래의 둥근 자국과 그 위에 박힌 네 개의 작은 둥근 자국. 21세기에는 저걸 애들 도장처럼 만들어 찍어댔겠지?
발자국간의 거리를 살펴 보폭을 살피고, 발자국 자체의 크기, 짓눌린 흙의 깊이를 모두 종합해 백호의 덩치를 어림짐작해 본다.
대호는 맞지만 초대형은 아닌 것 같다.
“커. 아무리 못해도 1장 가까이 될 것 같아.”
연조운은 그리 말을 하고선,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역시 연오랑의 기준과 미숙한 호랑이 사냥꾼 연조운 입장은 다른 모양이다.
녀석에겐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로 큰 호랑이인가 보다.
발자국이 찍힌 흙의 마른 정도, 사슴사체가 썩은 정도, 주변 나뭇가지와 덩굴에 엉켜있는 하얀털의 마른 정도.
장난하듯 발톱으로 나무를 긁어놓은 흔적. 나무껍질과 층층이 박힌 섬유질이 마른 정도.
연조운은 수집가라도 된 것 마냥, 백호가 남겨놓은 흔적을 하나하나 찾아냈고. 연전위는 “오...” 홀로 감탄을 날리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다.
‘흐음...’
다만 연오랑은 쪼개진 소나무껍질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수가 영역을 만들어 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영역은 지들끼리 나름 꽤 견고하다.
영역을 침범하는 건 싸우자는 것과 다르지 않고, 맹수끼리의 싸움은 피해야 하는 일이지 찾아가며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지들이 무슨 싸움꾼도 아니고, 상처를 입으면 치료도 못하고 죽거나 다친다. 맹수는 본능적으로 그걸 알고서 최대한 자기가 안 다치려고 노력한다.
소나무를 움푹 파낸 이 흔적은, “나 이만큼 세다. 덤비지 마라.”라고 다른 맹수에게 경고와 협박을 날리는 장치라는 거지.
‘그런데 왜 작은 것 같지?’
연오랑은 발톱으로 긁은 흔적을 매만져봤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된 옛 기억을 더듬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