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64화 (64/538)

64. 챕터11. 사냥가다 (4)

21세기 그가 가야산에 박아 넣은 백호. 녀석은 이벤트 몬스터답게 꽤나 공을 들여서 잡게 설정해 놨다.

“연전위 이벤트”가 오리지날 시나리오 이벤트의 수정 및 신장수 삽입이 목적이었다면, “식인 백호사냥 이벤트”는 단일개체 괴수의 구현과 신부대 추가였다.

즉. 본래 게임모드라면, 여러 도시를 점령해 특별한 재료를 수집하고, 그 재료를 통해 사냥에 필요한 아이템을 제작하고, 맹수사냥에 특화된 병종을 뽑아 훈련시켜야 했다.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나서 백호사냥 이벤트에 돌입.

식인 백호는 흡사 RPG게임의 보스몬스터마냥, 온갖 잡스러운 작은 맹수 부대를 소환해 플레이어를 괴롭힌다.

그 놈들을 다 때려 잡고나면, 페이즈2에 돌입. 등장한 백호 괴수를 사냥하는 게 끝이다.

하지만 현실이 됐다면? 싹 사라져야지. 백호 따위가 어딜 작은 호랑이나 늑대를 소환해? 그게 말이 되면 판타지지 조선이겠냐?

백호 또한 게임 상의 말도 안 되는 스펙은 다 날아가고, 그저 현실적인 호랑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괴리감이 생겼다. 21세기 그가 박아 놓은 백호의 크기와, 이 흔적이 말해주는 백호의 크기가 너무 다르니까.

물론 지금도 대호는 분명하지만, 게임 설정을 따라가려면 대호가 아니라 대대대호쯤 되어야 하니까.

‘잠깐만... 이거 내가 너무 일찍 와서 이런 건가?’

연오랑은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짐승의 1년과 사람의 1년. 이게 같을 리가 있나. 평균수명자체가 몇 배는 차이 나는데?

당연히 성장기 호랑이의 1년은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 대충 따져도 몸무게가 몇십키로는 차이나지 않을까?

‘잘된 건가? 아닌 건가?’

연조운을 너무 빨리 만나는 바람에 녀석이 창술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백호 또한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어린 녀석이 아닐까?

시간이 지났다면 백호는 현실적으로 클 수 있는 최대치까지 자랐을 거다.

조선사람이 봤으면, 말 그대로 영물이라고 부를만한 초거대 전설호랑이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런 놈하고 싸워도 질 것 같진 않다만... 재미 좀 보자고 이제 와서 “더 큰 다음에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가는 진짜 미친놈 소리 듣는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남들이 들었으면 정신 나갈 소리를 속으로 하면서, 연오랑은 가볍게 혀를 찼다.

“찾았냐?”

“예. 어르신.”

연조운은 눈에 불을 켜고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이 가야산의 왕이다. 산의 왕이 겁내는 거 봤나. “내가 여기 있다!”라고 과시라도 하듯, 지 흔적을 마구잡이로 흘려 놨다.

다른 맹수라면 이걸 보고서 겁먹고 영역에 침범하지 않겠지만, 이들은 사냥꾼이란 말이지.

잘 차려진 밥상을 찾아 가는 꼴이다.

“앞장서라.”

“옙!”

연조운은 정말로 복수의 시간이 다가오는 걸 느끼며, 피가 끓어올라 힘차게 발을 놀렸다.

가야산은 바위산이라, 잘 가다가 뜬금없이 바윗돌이 튀어나와 길을 막거나, 반대로 칼로 푹 찌른 것 마냥 움푹 파여 협곡을 만들었다.

이런 곳은 사람이 지나가는 것보다 짐승이 지나가는 게 더 힘들다.

발만 4개인 짐승 놈들이, 어딜 감히 사다리나 밧줄 같은 걸 쓸 수 있겠나.

저기 먼 티베트 산양이나 설표 같은 녀석들이야 이런 바위산을 넘나들 수 있다지만, 한반도 짐승은 그런 짓을 못 한다. 그게 설령 호랑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여 흔적을 쫓아 호랑이를 추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딱 봐도 놈이 지나갈 법한 지형을 찾아 따라가면 되니까.

문제는... 문제까진 아니고 귀찮은 건, 짐승길을 따라 가다보니 추적을 하는 건지, 벌목을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15세기조선은 산길, 혹은 21세기에 등산로라고 부르는 길이 없다. 만약 있다면 그냥 산을 타넘어 다른 마을로 가는 길이 있는 정도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지. 이 시대 사람들이 산의 정상에 왜 올라 가냐? 가다가 무슨 변을 당하려고?

봉수대가 있긴 하지만 그건 예외적인 거고.

약초꾼이나 사냥꾼도 산기슭과 산중턱을 어슬렁거리면서 뭐든 챙기지, 굳이 기를 쓰고 산꼭대기까지 오르지 않는다.

하여 이들은 없는 길을 우격다짐으로 만들며 호랑이 발자국과 호랑이 똥, 나무에 묻은 흰 털을 찾아 쫒아가는 중이다.

흰털이라서 잘 보일 줄 알았는데 웬 걸.

햇빛에 파묻힌 털은 오히려 먼지나 거미줄, 풀잎쪼가리로 보여서 찾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도 다른 흔적이 한가득이라서 추적은 어렵지 않다.

“후...”

“하.”

“헙...”

셋의 입에서 단내가 절로 풍겨 나온다.

전설장수인 이들이 이럴 정도면, 어지간한 사람은 이미 지쳐서 나가 떨어졌을 거다.

거리야 얼마 되지도 않지만, 온통 바위산을 타넘는 일이 어디 쉬울까.

‘망할 놈의 새끼. 잡히면 정말 가만 안 놔둔다.’

연오랑은 속으로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댔다.

지리산에선 아무리 험지라도 전마를 타고 어떻게든 돌아다녔는데, 여긴 말을 타기는커녕 사람조차 손발로 기어가야할 판국이다.

보통 산의 양지바른 곳은 덜 험하고, 그늘진 곳은 더 험하다.

모든 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늘진 곳은 눈이 높게 쌓였다가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져 내리곤 했다.

그냥 무너져 내리면 상관없는데 얼음으로 변한 눈덩이가 무너지면, 그 아래에 있던 암석과 흙도 같이 섞여서 무너진다.

그래서 죄다 도끼나 칼로 내리친 것 마냥 칼날바위와 칼날흙밭이 되어 걸어 다니기가 지랄 맞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백호는 그런 땅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고 있지 않나.

이렇게 온 사방이 날카로우니, 녀석의 털이 민들레 꽃잎마냥 사방팔방 날리고 있었다.

“발바닥이 어지간히 두꺼운 모양이야.”

“음...”

연전위는 연조운의 말에 발에 차이는 뾰족한 돌을 발로 툭툭 건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연오랑이 준 보병군화를 신고 있어서 다행이지, 그냥 짚신이나 가죽신을 신고 왔으면 발바닥에 구멍이 나지 않았을까?

“그래도 백호가 저 봉우리에 사는 건 확실해.”

연조운은 저쪽. 누렇고 회색빛의 바위가 아닌, 짙은 녹빛과 검은빛을 띄는 봉우리를 가리켰다.

이곳과 비교하면 저쪽은 천상이나 다름없다.

능선을 따라 살짝 높이 치솟은 봉우리. 저기가 바로 동성봉이니까.

“왜?”

“여긴 어지간한 짐승도 못 사는 땅인데, 백호가 왜 돌아다니겠어? 저 산 아래까지 내려가서 사냥하고, 지름길이나 마찬가지인 이 바위산을 뚫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음.”

일리가 있다 싶어서, 연전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든 늑대든, 곰이든 짐승은 대부분 토굴이나 동굴에서 살지. 그래야 포식자를 피하기도 쉽고 날씨의 영향도 덜 받으니까. 하지만 이 지역에 그런 곳이 있겠어?”

연조운은 그늘져서 시커멓게 죽어 있는 땅을 가리켰다.

수십, 수백년동안 응달로 살아온 지대는 제대로 된 식물이 자라기 힘들고, 땅도 얼음과 물기가 많아서 늪지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심지어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는데도, 이곳저곳에 얼음이 얼어붙었고 바윗돌 끝에는 고드름이 살짝 맺혀 있었다.

아무리 호랑이가 가죽이 두터워도, 여기서 토굴을 파고 살다가는 얼어 죽을 거다.

겨울에는 키를 넘길 정도로 눈이 쌓일 테니까.

이왕 멈춰선 김에 간단히 요기를 했다.

요기라고 해봐야 육포를 뜯어먹고 물을 마시는 게 끝이다.

냄새를 죽이기 위해서 날붙이와 옷에 죄다 흙과 풀잎을 짓이겨 발라놨는데, 인공적인 음식냄새를 풍길 수야 있나.

연오랑은 다시금 21세기의 자신을 욕하며, 신경질적으로 육포를 뜯어먹었다.

‘왜 하필 가야산에 박아놨을까. 조금 더 만만한 산에 박아놨으면 얼마나 좋아.’

대상없을 욕을 퍼붓고선 하늘을 살핀다.

산 사면이라서 따스한 가을 햇살이 바로 쏟아지지 않지만, 고개를 한껏 치켜드니 왠지 따사로움이 만져진다.

‘아직 해는 멀쩡하고.’

하늘 꼭대기에 박혀 있는 걸로 보아 정오쯤 된 것 같다.

새벽부터 출발했으니 이제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이 됐다.

‘거리는...’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바라본다.

미세먼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15세기답게, 산 위에서 보니 저 멀리 수륜마을이 개미처럼 작게 눈에 들어왔다.

꽤 오래 걸었는데도, 실제 거리상으론 얼마 안 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등산을 할 때는 능선과 능선 사이에 만들어지는 자연협곡을 따라 산을 거슬러 오르거나, 아예 능선 하나를 올라탄 후에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거 없다.

능선이 있으면 그냥 능선을 타넘어 협곡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능선을 기어오르길 반복, 무식하고 우직하게 산봉우리를 향해 직진하고 있다.

이 정신 나간 백호가 그러고 있으니까.

그래서 실제 거리는 몇 킬로미터가 되지도 않지만, 시간은 반나절이나 걸리고 말았다.

“다 쉬었냐?”

“예.”

“가자.”

셋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연조운이 연전위보다 더 잘 따라왔다.

칼질이야 연오랑에게 배우고 대마도에서 왜구를 썰어본 연전위가 낫겠지만, 산에서 살아온 세월은 연조운이 더 많지 않나.

그 삶의 경험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나 보다.

말은 안했지만, 연조운은 속으로 놀란 가슴을 애써 눌렀다.

녀석이 홀로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이고, 혼자 산을 뒤지고 다니면서 맹수를 때려잡은 세월이 얼마인가.

나름 자신감이 있으니까, 남들이 “산군님. 산군님.”하는 백호를 혼자 사냥하려고 마음먹었지.

그런데 연오랑은 그런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산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양반 맞아? 대체 지금까지 뭐하고 산거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행은 끝내 동성봉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동시에 드디어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때리자 모두의 표정이 풀어진다.

산을 정복했다는 뿌듯함과 눈앞에 펼쳐지는 광대한 자연의 기운이 온몸으로 빨려 들어오는 듯 했다.

아마 21세기 사람들은 이 맛에 등산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기 무섭게, 시선은 아래로 향해 재깍 백호가 있을 법한 곳을 굽어본다.

연조운이 말했다시피 짐승이라도 집은 있다.

그냥 노숙하는 건 사람이나 짐승이나 둘 다 고역이다. 아무리 그래도 비는 피해야지 않겠냐.

그렇담 이 험난하고 지랄 맞은 바위산 꼭대기에 쉼터가 될 만한 곳이 얼마나 있을까? 저기 저쪽에 보이는 작은 바위구멍이 딱이다.

“저기 같지?”

“예.”

연오랑과 연전위는 기창을 들고, 연조운은 뒤에서 활에 화살을 걸고 뒤따랐다.

순식간에 바위구멍까지 접근해서, 쥐 죽은 듯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구멍은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그렇다고 구멍이라고 하기에는 또 너무 컸다.

사람이 서서 들어가기에는 힘들지만, 짐승이 들어가기에 딱 좋은 크기랄까?

속이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겠지만, 백호가 들어가고도 남을 거 같다.

툭툭툭. “...”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서,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여기 맞지?”

“예! 확실합니다.”

연조운은 주변을 살피더니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온통 백호 흔적이 가득하고, 바위구멍 쪽으로 발자국이 마구 찍혀 있다.

파이고 마른 흔적이 제각각인 걸로 봐서, 백호가 한두번 드나든 게 아니다.

주변의 나무에는 발톱자국이 가득하다. 이건 영역표시를 위해서 남긴 게 아니라, 발톱을 갈기 위해서 만들어진 흔적이다.

또한 방금 전에 둥지를 나선 것 마냥, 나무 한쪽에는 오줌을 싼 흔적이 흥건하게 남아 있다.

드디어 백호의 은신처를 찾았으니, 연조운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가슴이 벌렁거렸다.

혹시나 둥지에 백호가 있을까봐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역시나 없다.

연오랑은 주위에 널려 있는 나뭇가지 중에 잘 마른 걸 하나 찾아냈다. 부싯돌로 잡풀을 태워 불길을 만들고, 솔방울을 짓이겨 송진으로 범벅된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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