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챕터11. 사냥가다 (6)
“조운!”
덩치만큼이나 걸음걸이 또한 크지 않나. 녀석은 몇 발자국 뛰지도 않았는데 성큼 연조운이 올라탄 나무에 다가갔다.
네발 짐승이 뛰어올라봐야 얼마나 오르겠나 싶겠지만, 백호는 그런 의문을 박살내기라도 하듯 나무껍질을 마구 작살내며 연조운이 있는 곳까지 뛰어 올랐다.
“합!”
이럴 때를 대비해서 허리춤에 밧줄을 묶어 놨지 않나.
연조운은 겁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굳건한 신념”의 보호를 받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만... 녀석은 두려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고, 냉철하게 판단하고 몸을 날렸다.
쉐엑! 도끼날만큼이나 거대한 백호의 앞발은 허공을 스치며 지나갔고, 쿵쾅! 연조운은 땅에 닿게 전에 냉큼 밧줄을 끊어버리고 몸을 굴렸다.
어째 연조운이 만만해 보였는지, 아니면 귀찮은 화살을 날리는 게 짜증났는지 모르겠다만... 그렇게 허공에 함부로 몸을 날리면 되냐.
“붕붕 날아다니면 뒤진다고 배웠냐. 못 배웠냐? 하합!”
백호가 언제 그런 걸 배웠겠냐만, 연오랑은 개소리와 함께 투창을 연달아 집어던졌다.
왜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동작이 위험할까? 당연한 이치다. 허공에선 못 피하잖아.
아무리 몸을 비틀고 웅크려도, 결국엔 맞거나 막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손이 없는 녀석이 번개를 뭔 수로 막겠냐.
비록 몸을 한껏 비틀며 꼬아서 허공에서 춤을 춘다 한들, 연오랑과 연전위가 날린 투창이 녀석의 뒷다리와 앞다리에 꽂혔다.
그래도 전설호랑이가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몸을 웅크려 내장이 뚫리는 걸 피했네?
“크라라아!”
“뒤져. 이색갸!”
녀석은 분노가 가득 담긴 포효를 다시금 내질렀지만, 연오랑은 투창을 내던지기 무섭게 녀석을 향해 돌진.
쉐에엑! 바윗돌마저 구멍내버릴 무시무시한 찌르기가 다시금 날아들었다.
쿵! 깊게 밟히는 전각. 띠잉! 시계태엽마냥 잔뜩 비틀어 꼬인 허리. 합!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심 가운데에서 끝까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창.
누가 봐도 찌르기의 교본이라고 감탄할 만한 동작이 연오랑을 통해 현신하여, 번개로 변해 날아갔다.
번쩍! 하는 순간에 풀즙으로 인해 진녹색으로 번들거리는 창날이 호랑이의 안면에 쏟아진 것이다.
“크헝!”
“크헝은 지랄!”
그래도 과연 전설호랑이답다.
어지간한 놈들은 한방에 나가떨어지는데, 녀석은 다리에 투창에 꽂혀 피를 철철 뿜어내는 와중에도. 피윳! 고개를 비틀어 피하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다 피할 수는 없어서, 녀석의 두툼한 머리가죽이 쫘악! 핏줄기를 뿜어내며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내리꽂이는 공격을 마냥 처맞을 수는 없는 법.
호랑이는 파도처럼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을 뽐내며, 연오랑을 향해 성큼 다가와 앞발을 휘둘렀다.
그걸 그냥 맞아줄 수 있나. 미안하지만 이런 공격은 한두번 당해본 게 아니란 말이지.
‘이렇게 까불다가 뒤진 호랑이가 한다스다. 이 자식아.’
“합!”
연오랑 또한 성큼성큼 뒤로 물러서면서 파파팟! 날아드는 앞발을 향해 창을 짧게 잡고 연거푸 찔러 넣었다.
호랑이라고 뭐 별거냐? 날붙이에 찔리고 살가죽이 찢기면 사람이건 짐승이건 아픈 건 매한가지다.
그리고 이렇게 앞발이 상하면 공격수단이 날아가는 건 둘째 치고, 몸이 굼떠진단 말이지.
“이요옵!”
“하압!”
백호는 분노와 고통에 눈이 돌아가 연오랑에게 달라붙었지만, 사냥꾼은 연오랑 혼자가 아니란 말씀.
녀석은 어지간한 공격은 다 튕겨내 버릴 만큼 두툼한 가죽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이들은 탈인간의 스펙을 가진 전설장수 아니냐.
연전위가 집어던진 투창은 근거리에서 강철갑옷마저 뚫고 들어갈 위력을 가졌다.
연조운은 “질풍창의 후예”의 효과로 약점을 파악해 쑤셔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더불어 녀석 또한 탈인간의 스펙을 가지고 있단 말씀.
쉐엑! 묵직한 파공음이 연오랑을 노리던 호랑이의 엉덩이에 틀어박히고, 쎅쎅! 날렵한 파공음이 호랑이의 뒷다리에 틀어박혔다.
연오랑은 처음부터 백호를 사냥하러 왔고, 어지간한 화살로는 녀석의 가죽을 뚫지도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당연히 뚫을 수단을 찾아야지. 하여 만든 게, 도끼날촉 육량전이다.
도끼날촉은 말 그대로 촉이 도끼날처럼 생긴 물건인데, 흔히 쓰이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특별한 물건도 아니었다.
육량전은 말 그대로 화살촉의 무게가 육량이나 되는 무거운 화살로, 무과 시험 때 “힘이 얼마나 세나?” 확인하려고 쏘는 화살이다.
실전에서 쓰기엔 무리가 있다.
육량궁 자체가 너무 크고 장력이 강해서, 위력은 막강해도 쏘는 사람이 지쳐죽는 무기니까. 그래서 힘자랑 할 때만 쓰는 물건이지.
하지만 셋은 전설장수 아니냐. 강화된 각궁을 쓰는 건 문제가 없고, 창 대신 활만 쏘던 연조운은 자기 힘에 맞춘 무시무시한 흑각궁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백호를 잡기 위해서, 녀석이 전재산을 다 털어서 구입한 비장의 무기가 아닐까?
하여 연오랑이 준비한 도끼날촉 육량전은 연조운에게 죄다 넘어갔고, 그 화살이 지금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퍽퍽퍽! “크허헝!” 도끼날촉은 말 그대로 백호의 가죽을 사정없이 쪼개고 쑤시고 들어갔다.
가죽값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지지만, 분노에 가득 찬 연조운이 그런 생각을 하겠냐. 그저 빈틈을 보이는 족족 사정없이 화살을 박아댔다.
“크르르...”
이미 엉덩이에 화살이 일곱발. 투창을 3발이나 몸에 꽂혀 있건만, 백호는 기운이 펄펄 나서 쉬지 않고 날뛰었다.
드디어 사냥다운 사냥이 시작된다.
본래 이렇게 사냥감이 피를 다 쏟아내고, 지쳐죽을 때까지 추적하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추적이 아니라 백호가 피를 다 쏟아내고 죽을 때까지, 연오랑이 붙들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
“...!”
‘저게 말이 되나?’
연조운은 생전 처음 보는, 아니다. 아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호랑이와 인간의 생사투를 보며 기겁했다.
“허!”
‘과연!’
연전위는 대마도에서 연오랑의 칼질을 봤음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땐 연오랑의 한칼조차 막는 사람이 없었는데, 저 정신 나간 백호는 연오랑과 살벌하게 부딪치고 있지 않나.
왜구 수백명보다, 저 백호 한 마리가 더 강한 것 같다.
쾅쾅! 연오랑의 창날과 피로 완전히 붉게 물든 백호의 앞발은 허공에서 계속 충돌했고, 쉑쉑! 연조운의 화살은 빈틈이 보일 때마다 백호에게 날아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운이 좋으면 화살은 백호에게 박혀 덜렁덜렁 몸을 흔들어댔다.
운이 나쁘면? 백호가 몸을 비틀어 화살을 피했지만, 그럴 때마다 연오랑의 창날이 백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전위는 주변에 있던 투창, 도끼, 단도 할 것 없이. 뭐든지 죄다 주워 와서 계속 던져대거나, 던지는 척하면서 백호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과연 이 녀석은 전설호랑이가 맞다. 짐승주제에 페이크 동작을 알아차리면서 움찔거리는 게 아닌가?
무턱대고 연오랑에게 달라붙었으면 연전위의 투창에 맞았을 거고, 연전위에게 달려들었으면 반대로 연오랑에게 찔렸을 거다.
연조운은 둘의 뒤에서 빨빨거리며 뛰어다니면서, 자리를 바꿔가며 계속 화살을 날려대고 있었고.
백호는 이 셋의 움직임을 재빠르게 읽어내면서 움직이고 있던 것.
대체 이 공방이 얼마나 이어지려는 걸까? 해가 점점 산 뒤편으로 사라지고, 파랗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았지만, 그래도 산의 해는 빨리 저무는 법. 언제 밤이 찾아올지 모른다.
백호는 덩치가 덩치인지라 피를 한 됫박. 아니다. 한 됫박이 뭔가. 한 열 됫박은 쏟아낸 것 같다.
바닥이 온통 붉은 진창이 되어버렸는데도, 이 미친 백호는 죽을 생각을 안했다.
다만 녀석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터라, 점점 몸이 굼떠지고 있었다.
피로해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거하고, 피가 없어서 몸이 무거워지는 거하고 차이가 크지 않나.
연오랑은 백호가 점점 죽어가는 걸 알아차렸고, 적극적으로 덤벼드는 대신 보다 안전하고 확실하게 잔 상처를 늘려나갔다.
연조운과 연전위도 마찬가지. 쏠 때마다 어깨가 욱신거리는 도끼날촉 육량전 대신에, 유엽전을 꺼내들었다.
갑옷을 뚫으려고 만든 전쟁용 화살인 유엽전.
이걸 사냥용으로 쓰는 건 낭비지만, 저 전설호랑이에게는 이거 아니면 통하지도 않는다.
하여 틈이 보일 때마다 마구 쏟아 부었다.
가죽을 뚫고 내장까지 쑤시고 들어가는 건 기대도 안한다. 그저 상처를 더 많이 만들어서 피를 다 쏟아내어 죽게 만들 작정이다.
그리고... 이런 셋의 의도를 알아차린 걸까? 짐승이 아니라 무슨 투사마냥 미친 듯이 싸우려던 녀석이 드디어 꼬리를 말았다.
쾅! 연오랑에게 황소처럼 달려들어, 엉망이 된 앞발이 아닌 몸통 그 자체로 받아버리려는 게 아닌가.
“흡!하!”
하지만 이 또한 연오랑이 바라던 상황.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렇게 덤벼들다가 목이 날아간 호랑이가 몇 마리냐.
쉐엑! 완전히 피에 물들어 번들거리는 기창을 마치 투창처럼 집어 던졌다.
퍽! 호랑이의 목덜미 아래쪽에 기창이 부딪쳤다가 튕겨나갔고, 그와 동시에 터지는 은빛반월.
샤악! 순식간에 뽑힌 연오랑의 장도가 백호의 목덜미를 아래서부터 쑤시고 올라갔다.
“크허헝!”
‘얕아!’
“이런 시발.”
백호는 목덜미와 입에서 피와 피거품을 뿜어내며 포효했고,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말해준다. 제대로 안 들어갔다고.
이런 미친 전설호랑이 같으니라고. 어지간한 호랑이도 한방에 목을 갈라버리는 역공격을 맞고도 살아 있는 게 아닌가.
피가 철철 흐르는 걸로 보아... 분명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건만, 어찌됐건 죽지 않고 연오랑을 뚫고 지나간 것이다.
“허...!”
“와...!”
연오랑만 뚫고 지나갔을까. 연조운과 연전위의 포위도 풀어버렸다.
연오랑이 팽이처럼 몸을 빙글 돌리며, 백호의 목덜미를 날려버리는 기술.
이건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둘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틈을 만들고야 만 것이다.
“이런!”
“헉!”
둘은 화들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날렸고.
“화살 다 챙겨!”
연오랑은 냉큼 전통과 활, 투창만 챙겨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스벌. 페이즈2냐? 난 이런 거 안 만들었다고!’
연오랑은 속으로 욕을 마구 내뱉었고, 셋은 백호의 뒤를 쫓아 산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흔적? 목이 찢어지고 상처가 수십군데인데 못 알아볼 수가 있나. 백호가 내달리는 곳곳마다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피냄새 뿐이냐. 놈은 온몸에 화살과 투창을 달고 뛰고 있다.
우당탕탕. 뭔가 부서지는 소음과 그때마다 나무에 부딪치는 투창과 화살들.
“크허헝!” 살을 쑤시는 고통에 녀석의 포효가 연신 터지고 있다.
저대로 내버려둬도 죽는 건 정해진 결과지만... 걱정되는 건,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잡아야 된다는 것.
해가 저물면 상황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뒤지기 직전인 백호라지만, 저 어마어마한 덩치에서 뿜어 나오는 한방을 맞기라도 하면?
제 아무리 전설장수라도 저 세상으로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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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불교를 열심히 두들겨 팼고, 태종의 살벌한 칼날은 이곳 가야산에도 가해졌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신라시대에 건설된 오래된 고찰. 21세기 한국인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해인사에도 말이다.
고려의 국찰이라 불리며 위세가 높았지만, 위세가 높은 만큼 추락도 뼈아픈 법.
한 때는 향화객과 승려로 가득했던 사찰이 지금은 한적하고 싸늘한 공간으로 변했다.
하지만... 어린 동자童子에게 있어서 옛 이야기는 말 그대로 옛 이야기일 뿐이다.
태어나서 본 게 항상 이렇게 적막하고 쓸쓸한 절인데, 사람이 북적북적했던 기억이 있겠는가.
동자에게 따스한 옛 추억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밤이 완전히 찾아오기 전에 작은 횃불을 들고 불을 피우는 게 더 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