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챕터12. 주장하다 (1)
요즘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하고 살풍경하다.
얼마 전에는 아랫마을에서 양반네들이 와서 한바탕 뒤집어 놓고 갔고, 가야산 인근 마을에서 호환이 속출하고 있어서 해인사도 난리가 났다.
산속에 처박혀 있는데, 만약 식인 호랑이가 나타나면? 한 끼 도시락이 되는 건 자명한 일 아닌가.
얼마 되지도 않는 승려들과 사원노비들도 번을 서가며 경계를 서야 했고, 이 어린 녀석조차도 임무를 받아 열심히 발을 놀리는 중이다.
허나 재앙은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오는 법.
“크허헝!!”
“흐엑!”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온 포효소리에 동자는 횃불을 떨어뜨리곤 호들갑을 떨어댔다.
‘호랑이다! 호랑이!’
쿵.쾅. 쉑쉑! 어스름한 황혼을 등에 머금고, 거대한 그림자가 담벼락을 짓밟고 떠오르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
그림자는 흡사 먹물처럼 사방으로 물을 뚝뚝 떨어뜨렸는데, 어린 녀석조차 금세 알아볼 정도로 강렬한 냄새를 풍겼다.
“우웨웩.”
자기도 모르게 토악질을 하기 무섭게, 저편에서 날아든 그림자가 녹색 불꽃을 피워냈다.
“끄엑.”
꼬맹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뒤로 벌러덩 넘어지며 기절했다.
동자에게 다가가는 호랑이를 향해, 이젠 지긋지긋해진 파공음이 또 다시 들려왔다.
불타는 분노를 토해내며 몸을 비틀어보지만, 안타깝게도 번개는 호랑이의 생각보다 빠르게 날아와 박혔다.
“크르륵...”
고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화풀이인지, 녀석은 피거품을 뿜어내며 으르렁거렸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한끼 사냥감들에게 끝없는 분노가 타오르지만, 녀석은 점점 눈이 감기고 힘이 빠졌다.
마지막 힘을 뽑아내어 동자를 향해 발톱을 내딛다가... 백호는 정수리를 쑤시는 일격에 눈이 감겼다.
“쓰벌. 뒤지지도 않네. 진짜. 이거 가죽을 살릴 수나 있나?”
호랑이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사찰에 머물던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갔고, 하나같이 기겁해서 입을 쩍 벌렸다.
살아생전 한번이라도 보기 힘든 거대한 호랑이가 쓰러져 있고, 그 옆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거한 셋이 가쁜 숨을 가다듬고 있다.
기절해서 오줌을 지린 동자는 덤이고.
“절에서 피를 봐서 미안하군. 이 자식이 도망쳐서 말이야.”
“...!”
“난 연오랑이다. 들어봤지? 대마도?”
“...!”
앞뒤 다 자르고 들어온 뜬금포에 모두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잔뜩 떠올랐다가, 이내 곧 느낌표로 바뀌어 호들갑을 떨어댔다.
‘연오랑? 그... 소문난 연오랑이라고?’
모두는 생각이 맞나 싶어서 다람쥐마냥 머리를 돌려가며 서로를 바라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거한이 히죽 웃으며 의심을 종식시켰다.
“생각하는 게 맞을 걸? 하동에서 온 연오랑이다. 이 자식을 처리할 만한 곳이 있냐?”
“...!”
거한은 혀를 내밀고 죽은 백호를 툭툭. 발로 걷어찼고, 다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긴 절인데, 호랑이 뱃속을 갈라서 난장판을 만들 수야 있나.
노비들은 절 밖의 작은 계곡으로 안내했다.
연조운은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양, 말없이 백호를 분해했다.
가죽세공을 아버지에게 배운 게 맞는지, 능숙하게 가죽을 벗겨내고 뼈와 살을 토막 냈다.
작업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노비들은 연조운의 손놀림에 “오...!” 감탄성을 날리며 식사를 가져와 대령했다.
셋은 옷을 훌러덩 벗고 계곡물에 몸을 날렸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산에서 뛰어다녔다.
쉬지도 못하고 가야산 동쪽에서 올라서 남쪽으로 내려온 거니... 제 아무리 전설장수라도 지칠 수밖에.
연조운은 연오랑이 고추를 덜렁거리며 옷을 홀딱 벗는 걸 보며 놀랐지만, 둘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니 그냥 받아들였다.
한편으론 마음이 뜨거워졌다.
사대부 체면도 잊고 이렇게 허물없는 사이라는 걸 몸으로 표현한 거 아닌가.
셋은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식히고 휴식을 취했다. 물론 노비들이 가져온 식사와 술을 왕창 들이키면서.
조선에선 보기 힘든 21세기 속옷, 트렁크팬티를 입은 연오랑.
그런 그를 보며 소곤거리는 노비와 승려들.
말로 형용하기 힘든 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지만, 그래도 나름 화기애애했다.
어찌됐건 모두의 우환거리였던 식인 백호가 죽었잖아?
“흠. 근데 이거 술 아냐? 절에서 술을 만들어도 되냐?”
“... 그게...”
연오랑은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지만, 이들은 청천벽력처럼 느껴져서 몸을 떨었다.
그 유명한 연오랑 아니냐. 온갖 핍박을 받아온 승려들은 그가 시비거는 걸로 오해했다.
“이거 무슨 술이냐? 달달하면서 솔잎 맛도 나는 것 같고, 독한 걸 보니 소주가 맞는 모양인데.”
“...?”
당최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다들 입을 다물고 눈만 굴려댔다.
곡식을 발효시켜 탁주를 만든다. 보통 이걸 막걸리라 부르고, 이 탁주에서 맑은 술만 골라내면 청주가 된다.
이 청주를 다시 소줏고리라는 증류기에 넣고, 증류시켜서 만든 게 소주다.
결론은 소주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곡식이 들어간다는 거지.
그런데 비싸고 고생해야 만들 수 있는 소주를 절에서 만들어?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맨날 조정에다가 “살려주세요.”라고 징징거리는 놈들이?
“그게...”
그나마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승려가 총대를 메고 입을 열었다.
뭐...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한편으론 예상했던 이야기고.
해인사는 합천군에 속해 있고, 합천군에 있는 양반들이 여기 와서 깽판을 놓고 가곤 했단다.
그 정신 나간 놈들 때문에 사찰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고, 결국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떨쳐낼 수단을 찾아야 했다.
그게 다름 아닌 이 술이다.
놈들은 비싸디 비싼 소주를 가지고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는데, 이게 화근이 될 줄이야?
이놈들은 이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선 두부하고 술을 내놓으라고 깽판을 치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놈들이 부순 불상도 있다고 했다.
조선 중후기에나 나와야할 유교 탈레반 놈들이, 왜 벌써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인사의 처지를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교 탄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같은 양반들은 “거. 양반 체면이 있는데, 저게 뭐하는 짓이야.”라고 혀를 차며 타박할망정 만류하진 않았다.
괜히 찍히고 싶지 않은 거지.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다.
‘어쩐지 두부가 맛있긴 하더라.’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잡생각을 날려버렸다.
“정신 나간 놈들이군. 뒷배라도 있냐? 뭘 믿고 그런 거냐?”
“... 그런 거 없습니다. 나리.”
“진짜 없어? 아니면 니들이 모르는 거냐?”
“정말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군 어른.”
연오랑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보이자, 승려는 냉큼 달라붙어 아련한 눈빛을 뿌려댔다.
“제발 저희 좀 구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이도 많이 먹은 양반이 부담스럽게. 왜 이래.’
연오랑은 승려의 눈빛을 피하며 그리 생각했고, ‘진짜 정신 나간 놈들인가 보네.’ 라고 결론지었다.
‘잠깐...’
연오랑은 손을 내젓다가, 생각을 바꿔먹었다. 반대로 집어 나가본다.
여긴 무려 태조가 관심을 가졌던 해인사다.
화엄 10찰 중 하나로 유명한 이곳에서, 뒷배도 없이 깽판을 부리는데도 소문이 안 났다?
물론 수령과 양반집안이 짝짝궁해서 뜯어먹은 게 분명하지만, 어찌됐건 한성과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그럼 합천에서 뭔 일이 벌어져도 소문이 위로 안 올라간다는 뜻.
관련 없는 몇몇 집안은 대충 떡고물 던져주면 입을 다물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네? 김숙자를 또 써먹어야겠군.’
음흉한 계획을 세우며, 연오랑은 주지승을 불러오라 시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바로 고령에 온 마지막 목적을 챙겨야겠다.
지금 분위기가 꽤 좋잖아? 겁박이자 협박이나 다름없는 제안을 하기에는 딱 좋은 분위기다.
“그 연오랑이 맞는 것 같더냐?”
“예... 아무래도.”
소문으로만 듣던 연오랑일 가능성이 10할이지만, 설령 연오랑이 아니어도 곱게 대해야할 인물이다.
“...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예.”
“음...”
해인사의 주지승. 진승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번뇌가 밀려와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린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주지승은 사찰의 총관리자이자 총책임자다.
수양이 깊은 건 당연한 거고, 씁쓸하지만 밀고 당기는 정치력 또한 필요한 자리다.
그런 면에서 진승은 불심과 정치력을 모두 갖춘 인물로, 유서 깊은 해인사에 걸맞은 주지승이라 할 수 있는데... 연오랑의 등장에 잔뜩 긴장했다.
그냥 찾아와도 부담스러운 인물이, 해인사의 고민거리였던 식인 백호를 때려잡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합천에 관심을 표했다고?”
“예. 헌데 어느 쪽인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양반 편을 들어줄 생각인지, 아니면 해인사 편을 들어줄 생각인지, 그도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연오랑에게 입을 놀렸던 승려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
계곡 한편은 모닥불이 피어올라 밝았지만, 절인지, 도살장인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연오랑은 근처에 있던 바윗돌을 파내서 앉아 있었고, 뒤에는 사천왕마냥 연전위와 연조운이 조용히 시립해 그림자를 흔들어댔다.
주변에 머물던 승려와 노비들 모두 자리를 비키고 멀리 떨어졌다.
드디어 이 무거운 기류를 대신 책임져 줄 주지승이 등장하자, 냉큼 발을 빼고 합장을 날려댔다.
중들 주제에 의리도 없나보다.
“해인사의 주지승이냐?”
“예. 소승. 진승이라 하옵니다.”
“어렵게 존대할 거 없다. 편히 대해라.”
‘흡!’
말이야 저렇게 했지만,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다.
‘음... 보통내기는 아니구나.’
주지승은 빠르게 연오랑을 읽어 내렸고, ‘오늘 일진이 쉽지 않겠구나.’라고 직감했다.
딱 봐도 지금껏 주지승이 만나왔던 수많은 인간군상하고는, 첫인상부터 다르지 않나.
“...”
“중 주제에 이것저것 따지진 않겠지? 대충 편하게 앉아라. 너는 거기 서서 대담을 받아 적어라. 지금부터 너는 사관이다.”
“...!?”
함께 따라온 승려는 당최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연오랑도 주지승도 대답이 없다.
“후우...”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고선 세필을 들었다.
종이와 붓을 왜 가져오라고 했는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부려먹으려고 그랬나 보다.
주지승과 연오랑 사이에선 잠시 침묵이 감돌았고, 연오랑은 술잔을 벌컥! 털어 넣고서 입을 열었다.
“절에서 만든 술 치고는 맛이 좋아. 술 이름은 있나?”
“... 딱히 없습니다. 저희끼리는 그저 청송주라 부릅니다.”
“청송이라... 나쁘지 않군. 합천에 있는 그 버러지 놈들이 먹기엔 아까운 술이야. 아. 그놈들은 내가 내려가서 정리해주지.”
“...!”
‘어떻게? 왜? 무슨 자격으로?’ 주지승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시에 사라졌다.
연오랑은 양반체면은 다 버리고, 무슨 상놈마냥 옷 한 벌 걸치지 않고 속옷바람으로 바위에 앉아 있었다.
달빛과 모닥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가슴과 옆구리에 새겨진 상처가 눈을 어지럽혔다.
날카로운 날붙이에 당한 상처라기 보단, 뭔가 묵직한 물건에 찍히고 찢어진 흔적같다.
호랑이를 수십마리 때려잡았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주지승은 문뜩 연오랑이 저 장도로 합천의 양반들을 싹 쓸어버리는 생각을 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후...’
그간 당한 게 너무 억울해서, 불제자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을 잠깐 하고 말았다.
“글은 알지? 읽어봐라.”
연오랑은 주지승이 흔들리는 걸 알아차린 듯, 아직 먹이 마르지도 않은 종이를 내밀었다.
“흐허헙!”
글을 읽어 내려가기 무섭게 주지승체면도 잃어버리고,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어린아이마냥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종이쪼가리가 무슨 흉신악살이라도 되는 것 마냥,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목소리도 같이 떨렸다.
“가... 감당할 수 없습...”
“누가 잡아 먹냐? 진정해라.”
연오랑은 혹여나 주지승이 종이를 찢어먹을까 싶어서 냉큼 빼앗고선, 그가 제정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줬다.
“아미타불...”
주지승은 부처님이라도 찾는 거 마냥, 연신 염불을 외우며 눈앞에 현신한 나찰이 사라지길 기도했다.
‘대체 왜 저러나?’싶던 사관 역할을 하던 승려.
그 역시도 연오랑이 건네준 종이쪼가리를 읽고 기겁해서 자지러졌다.
이건 지금껏 탄압과는 전혀 다른, 지난 불교역사에 있어서 찾아보기 힘든 개혁안이자, 쇄신안이었으니까.
“너희가 조정과 유학자들에게 탄압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 하냐? 앞으로 너희 중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거라고 예측 하냐?”
“...”
운석핵꿀밤으로 역사가 완전히 비틀렸음에도, 거의 흡사하게 진행되고 있는 건 숭유억불 정책이다.
주지승과 사관승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미래가 떠올라, 연신 속으로 ‘아미타불’을 외쳐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