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68화 (68/538)

68. 챕터12. 주장하다 (2)

솔직히 고려 때에 불교는 너무 해먹었다.

사찰만 만여개에, 승려만 십만명이 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밑에 딸린 노비와 전답은 얼마나 많았겠나. 법력 높은 고승도 분명히 많았지만, 세속의 욕구를 충실히 탐하는 땡중도 부지기수였다.

조선은 이놈들을 뜯어내면, 엄청난 재산과 세수를 얻어낼 수 있지.

더 중요한 이유는 속에 숨어 있다.

헤게모니 싸움이자 파워게임. 밥그릇 싸움이지.

능수능란하게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논리와 토론으로 통치철학과 조직체계를 조율할 수 있는 세력은 유학자와 승려. 이 둘 밖에 없다.

중세유럽에서도 가톨릭사제가 행정처리 같은 걸, 나라를 대신해서 다 해줬잖아?

원, 고려가 유학을 받아들였음에도 그러했고, 태조는 무학을 왕사로 등용했고, 중국의 연왕 또한 도연을 재상 비슷하게 써먹었지.

유학자들 입장에선 “나라 말아먹은 땡중놈들이 감히 국가의 대사를 논해? 산에 처박혀서 수도나 해라.”라고 외치는 거다.

끝으로 조선 건국 당시에는 유학적 이상향을 꿈꾸며, 민간 백성의 이데올로기, 행동방침, 생활양식을 전부 유학식으로 덧입히기를 원했다.

사림세력이 집권한 후의 강력한 의식개조 작업만큼은 아니지만, 조선 건국 직후에도 이런 경향은 분명히 있었지.

다만 지금은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지지부진. 원래 역사보다도 훨씬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고을과 마을의 사찰 폐쇄, 승과축소, 도성출입금지. 종파통합. 이 모든 게, 그저 전조의 폐단을 일소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너희 사찰의 재산을 다 빼앗은 걸로 충분하지.”

“...”

전부다 불교의 권위와 위치를 빼앗아, 그 자리에 유학을 넣으려는 계획의 일환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대체 너희는 왜 유학자들과 대적하려 하지?”

연오랑은 오히려 반대로 접근했다.

종교가 대체 왜 정치세력과 싸움질을 해? 조선이 건국된 이상, 싸워봐야 이길 수도 없다.

그러니 납작 엎드려라. 조정에 관심 꺼라. 백성들만 챙겨라.

조선의 국가기조와 조정의 정책은 유학으로 가고, 불교는 불교대로 제 갈길을 가자는 거다.

정교분리가 철저히 이뤄지는 21세기 사람에겐 당연한 이치지만, 15세기에는 나름 혁신적인 제안이다.

“그러기 위해선 너흰 잘못된 과거를 인정하고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지. 고려불교가 아닌 조선불교로서!”

21세기에도 잘 써먹는 방법이잖아? 이름과 간판을 갈아 끼우기.

하지만 연오랑은 겉만 바꾸는 게 아니라, 속도 싹 다 뒤집어 놓을 제안을 던졌다.

기왕 쇄신할 거면, 제대로 쇄신해야지. 그래야 조선불교가 살아남지.

게다가 불교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유학자들도 대응하기 애매하다.

“저희가 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새 사람이 되어 조선에 이바지하겠습니다. 충성충성!”이러고 있는데.

“닥쳐. 검은 머리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너희 못 믿어. 죽어라!”하고서 두들겨 팰 양반사대부가 얼마나 될까?

골수가 아니고서야, “불교는 뿌리 뽑지도 못하는데, 저렇게 말을 잘 듣겠다고 하잖아. 적당히 하자고.”라고 넘어가는 사람이 더 많겠지.

지금의 유학자들은 헤게모니 싸움에서 승리하고, 너무 비대했던 불교계를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게 목적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땅 그리고 돈 문제다.

사찰이 소유한 면세지, 사찰노비를 어떻게든 줄여야 조선재정이 늘어나니까.

역을 행하지 않는 승도와 승려를 어떻게든 줄여야 양민이 늘어나니까.

양반 사대부와 엮이지 않아야, 승려들이 조정 일에 끼어들지 않을테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원래 역사와 달리 조선 유학계도 분열된 상황 아닌가.

불교의 대응을 놓고서, 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울게 분명하다.

“기업설립, 종교세, 승려역役, 승과를 대신할 내부자격시험제도, 여진어를 중점으로 한 외국어교육, 빈민구제와 봉안당奉安堂설립, 하나로 된 종파통합. 이 모든 건 조선불교로 탈바꿈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음...”

연오랑의 제안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주지승의 관념과 상식을 뒤흔들어 놨다.

그는 이 악귀의 감언이설을 계속 듣는 게, 옳은 건지 그른 건지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그간 수행이 모두 헛것이 된 것 마냥,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관승려는 낯빛이 완전히 하얗게 떠서, 손을 부들거리면서 개발새발 대담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중에 저걸 다시 보면, 읽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연오랑은 사관승려가 제대로 적을 수 있게, 하나하나 또박또박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밤은 길고 시간은 많다.

연오랑이 마냥 불교계가 예뻐서 이런 제안을 한 건 아니다.

자본유학을 통해서 성리학의 위치를 흔들고, 백성들의 인식을 흐리게 만들려는 입장에선, 같이 싸워 줄 든든한 동맹이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선, 앞으로 민중으로 파고들 불교는 꽤나 괜찮은 동맹이지.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잖아?

또한 지금 당장 쓸만한 건, 사찰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다는 거다.

고려 때 그 많은 사찰이 전부 농사만 짓고 살았겠나. 당연히 장사도 하고 돈놀이도 하고 그랬다.

흡사 중세유럽의 길드조합처럼, 각 사찰은 수공업공장 비스무리한 조직을 유지했다.

말 그대로 고려 조정과 귀족에게 필요한 온갖 것을 다 만들었지.

그래서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은 걸핏하면 사찰의 승려를 부려먹었다.

“야. 종이 좀 만들어서 바쳐.” “야. 집 지어야 하니까 사람 좀 보내.” “야. 토산물 바쳐.” “야. 특산물 뭐 없어? 저번에 보니까 버섯이 좋더만. 가져와.” 등등.

하여간 그냥 단순노역 말고도 오지게 부려먹었다.

이런 전문 인력을 조정에 다 빼앗겨서, 노비나 양민으로 만들어 농부나 되게 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다.

또 하나는 아직 사찰에는 온갖 종류의 민간 기록과 서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세유럽의 수도원이 행정기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사찰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물론. 주는 조정이겠지만, 부의 부쯤은 사찰이 역할을 해왔던 것.

연오랑은 안 그래도 야금야금 그들의 기록을 옮겨서 보관해 놨는데, 이걸 방해받으면 곤란하지.

이런 민간 기록물에는 조정에서 관심을 크게 갖지 않는 온갖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걸 요리조리 뜯어서 살펴보면 지금은 잊혀진 기술이나 행적, 문화양식이 꽤 됐다.

이 또한 자주화이자 자본유학의 근거로 쓰일만한 것들이니, 잃어버리면 곤란하지.

끝으로.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아니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후에 제대로 칼춤을 춰서, 사찰을 싹 날려버렸다.

그 후 태종은 다시 한 번 칼을 휘둘러 11개의 종파를 통폐합시켜서 7개로 줄였고, 그 많던 사찰을 고작 240여개로 확 줄여버렸다.

하지만 한발 더 남았다. 이제 세종 차례다.

원래 역사에선 세종이 칼을 휘두르려 하자, 승려들이 명나라 사신단을 따라가서 “영락제님! 저희 좀 살려주세요!”라고 싹싹 비니까 세종은 잠시 칼을 휘두르는 걸 멈췄다.

나중에 명나라 눈치를 쓱 살피고선, “건방진 땡중 놈들. 감히 뒤통수를 쳐?”이러면서 확 쓸어버렸지.

7개 종파를 이른바 교종과 선종으로 통합시키고, 고작 36개의 사찰만 남겨둔 거다.

그런데 지금은 명나라가 없고, 태종과 세종은 눈치 볼 사람이 없다.

거기에 지금 조정 상황이 난장판이잖아?

“아. 할 일도 많은데 불교계는 나중에 치우자. 당장 급한 것부터 처리해야지.”라고 반응하면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만약 “아. 복잡하다 복잡해! 일단 쉬운 거부터 처리하자. 다들 땡중 패는 건 찬성이지? 그럼 일단 땡중부터 패자!”이러면서...

원래 역사보다 빠르게, 종파통폐합을 시작하면 난감해지지 않겠는가.

지금 인증받아 보존된 사찰이 240여개. 대충 계산하면 각 현마다 하나씩 있는 꼴이다.

적어도 이 정도 숫자는 되어야, 조선불교의 개창과 그에 따른 부수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만약 세종이 한발 빠르게 움직여서 사찰을 34개로 확 줄인다? 고작 이걸로 어떻게 조선백성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냐. 말도 안 되지.

역사가 워낙 많이 뒤틀려서, 연오랑도 세종이 어떤 선택을 할지 감도 못 잡겠다.

이 사안에 대해서, 왜인포로 폭탄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 시간이 없다. 시간이.”

주지승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만만한 연오랑을 보며, 머릿속이 팽이처럼 팽팽 돌아갔다.

연오랑은 미래를 알고 말하는 거지만... 주지승 입장에선 연오랑의 명성과 업적을 따져볼 때, 분명 조정과 연관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가 말한 게 진짜로 이제 곧. 자신들에게 닥쳐올 살벌한 미래라고 믿을 수밖에.

“끄응...”

“다 적었냐?”

“예? 예에...”

주지승은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앓았고, 사관승려는 손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담화를 필사해서 모든 사찰에 보내라. 그리고 황해도 장연현 옆의 용연현으로 집을 지을 줄 아는 승려와 노비를 보내라. 반문은 받지 않는다.”

“...?”

뜬금없는 요구에, 주지승의 눈에 ‘어째서?’라는 물음이 가득했다.

“앞으로 너희가 머물 숙소를 지어야지. 내년 새해 첫날에, 조선팔도 모든 사찰의 주지승과 고승들, 그리고 그들을 보좌할 승려들은 황해도 용연현으로 와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반문은 받지 않는다. 오지 않으면 조정은 둘째 치고,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

“...!”

주지승은 “네가 뭔데, 오라마라야?”라고 차마 묻지 못했다.

시퍼렇게 타오르는 눈과 손에 들린 장도.

속이 전부 벗겨져 아직도 피냄새를 풍기고 있는 백호가죽.

이 모든 걸 합치면, 이 미친놈이 어떤 짓을 벌일지 감도 못 잡겠다.

보아하니 연오랑은 불교계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이런 인물이 휙! 돌아버려서 칼을 휘두르면 어떻게 될까.

안 그래도 불교계를 패길 원하는 조정과 사대부들이 반대할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뭔 짓을 해도 “거. 잘 패는구만?”하고 말거다.

“내년 새해 첫날. 너희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면, 제1차 조선불교 공의회를 개최할 거다!”

가톨릭만 공의회를 열라는 법 있나. 옛날에 불교도 결집이라고 해서 비슷한 걸 했었잖아?

더불어 조정신료들도 불러와 은근히 승려들을 압박하고, 반대로 조정 또한 납득시킬 거다.

“어때요? 저렇게 되면 조정도 이득 아닙니까? 이제 불교 좀 그만 패고, 이용해 먹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이다.

이렇듯, 연오랑은 승려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결론이 날 때까지 가둬둘 생각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교종과 선종을 합치는 일이 어디 쉽게 되겠나.

하지만 승려들은 합치든가 아니면 그냥 평생 갇혀 살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다.

조선판 불교 콘클라베를 열어보자고.

‘만약 조선불교가 제대로 완성되면, 동아시아판 교황청. 조선불교청이 만들어질지 누가 알아?’

연오랑은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 많이 나간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히죽 웃었다.

주제넘고 건방지게 불교계를 주무르겠다는 거지만, 연오랑은 실현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오히려 조선개조보다 이게 더 쉬운 퀘스트다.

이렇게라도 바뀌지 않으면 진짜 죽는다는 걸, 불교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지금도 시시각각. 조정의 칼날이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불교계를 옹호하고 대변해 줄 권력자가 전무한데, 그 유일한 인물처럼 보이는 연오랑의 손을 내친다?

알아서 죽겠다는 거지.

*****

어제 도착하자마자 사람을 보낸 터라, 다음날이 되자 기업가 청년들이 선물을 가지고 우르르 몰려왔다.

어젯밤에 신나게 때려줬으니, 오늘은 약을 발라줘야지.

대마도에서 가져온 온갖 불상과 불교보물을 전해주자, 승려들은 하나같이 “아미타불.”을 외치며 극공의 예를 표했다.

물론 속사정을 아는 주지승과 사관승려는 ‘설마 이건 세련된 방식의 경고인가? 말을 안 들으면 대마도 꼴로 만들어주겠다는 건가?’라고 오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휘적휘적 걸음을 놀리며 해인사를 구경했다.

솔직히 말하면 21세기에도 해인사를 안 가봐서 잘 모르겠다. 감상평은 그냥 ‘생각했던 것보다 작네?’ 이 정도?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지. 바로 팔만대장경.

게임 미디블워에서 “조선”을 플레이할 때, “내정아이템.”으로 나오는 물건 아니냐.

숭유억불 정책을 취한 조선이 불교아이템으로 내정보너스를 받는 게 웃기긴 하지만, 게임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