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챕터12. 주장하다 (3)
그 유명한 팔만대장경을 직접 구경했는데... 별거 없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감흥이 덜하다. 그냥 나무판이지. 뭐.
원래 역사에선, 대장경은 태조의 명으로 해인사로 왔고, 일부분은 이런저런 절을 떠돌았다.
그러다가 세조 때에 장경판전이 지어지면서 팔만대장경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 후로 21세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쭉 보존되지.
지금은? 당연히 그냥 대충 보관하고 있지. 어차피 나무판 아니냐.
비바람만 피하면 저절로 삭아 없어지진 않을 테니, 임시로 이렇게라도 보관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조선불교가 탄생하면, 내가 대장경판을 보관할 수 있는 장경판전을 지어주지.”
“크음...”
안내를 하던 주지승은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날렸다.
속으로 또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쇄신과 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번엔 대장경을 박살내겠다는 건가?’라고 의심하는 눈초리다.
하지만 이건 진심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세조가 등장할 일은 없으니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단종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중에 그는 문종의 혼사에 몰래 개입할 생각이다. 세조가 웬 말이냐.
게다가 수양은 지금 꼬마도 아니고 애기 아니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미리미리 교육을 시켜놓을 거다. 안되면? 마는 거지 뭐.
그러니 그가 신경을 안 쓰면, 미래의 문화유산이 없어질지도 모르지.
사실 조선 입장에선 팔만대장경은 애물단지. 계륵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지금은 고려가 망한지 얼마 안 돼서, 앞으로 전란에 박살날 수많은 불교문화유산이 한 가득이다.
뭐 만하면 기승전불교라며 두들겨 패는 조선 아니냐.
상징성 강한 대장경을 박살내고도 남을 유학자들이지만, “그래도 이걸 박살내는 건 조금 그런데...?”하는 의견에 따라 내버려뒀다.
그런데 불길에 기름을 끼얹듯, 왜국. 특히나 세종 때에 왜국의 오우치 가문은 “대장경판이 필요 없다고요? 그거 그냥 저희 주세요! 힘들면 필사본이라도 좀!”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졸라댔다.
조선은 대장경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괜히 이거 줬다가 나중에 더 큰 요구를 할까봐서 거절했고.
이렇게 대충 취급할 정도로, 지금 조선에게 있어서 팔만대장경은 별로 중요한 물건이 아닌 거다.
그가 대신 챙겨주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겠냐.
“아! 어제 말을 못했는데, 사찰에 소속된 종이장인들은, 한성의 용마산 근처, 송계천(중랑천)옆 배봉산 자락에 있는 배봉마을로 보내라. 따지지 말고.”
“예?”
“송계천 옆 배봉마을이다. 알겠냐?”
“예...”
“그리고 또 뭐가 있으려나...”
연오랑이 머리를 굴리며 궁시렁거리고 있자, 주지승은 안절부절 못하고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요구한 것만으로도 천지개벽할 수준이니,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는 눈치를 팍팍 뿌린다.
“나중에, 용연현에 모두 모이면 그때 다시 말하지.”
“예...”
주지승은 이걸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 봤다면, 웬 깡패가 노인네를 계속 괴롭히는 걸로 보이지 않았을까?
해인사에서 일정을 마친 후에, 다시 고령으로 돌아와 마무리 지었다.
그리곤? 당연히 해인사를 괴롭혔던 합천의 양반 집안을 박살내줬지.
나쁜놈들끼리는 뭔가 네트워크가 있는 걸까?
합천과 고령은 바로 옆 동네라서, 연오랑에게 박살난 고령의 네 집안은 합천 양반가문의 치부 또한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만 죽을 순 없어.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라는 심보로 죄다 털어놨을지도 모르고.
연오랑은 어사 김숙자를 앞세워 사기극을 한번 더 쳤고, 후속처리는 고령에서의 일과 동일했다.
지금 시절의 조선은, 큰 고을이 아니고서야 어딜 가도 상황이 매한가지다.
시골이라 하면 자고로 한적하고, 정체되고, 통제력 강한 모습을 떠올리지만, 역설적으로 오히려 시골이 더 혼란스러웠다.
봉건제 비스무리한 지배체제를 부수고 완벽한 중앙집권을 완성하기 위해서, 혼란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중앙조정에서 내려온 수령이었으니까.
여말선초처럼 피 튀기는 난세는 아니지만, 개벽의 파도가 몰아치는 이 시절은 피 없는 난세라 부를 만하지.
연오랑은 파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그 사이에 끼어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갔다.
유학과 조금이라도 거리가 있는 이들과, 유학의 이치보다 당장의 생존과 번영이 더 중요한 이들.
그들에게 자본유학을 설파하고, 기업으로 변모할 기회와 지원을 해줬다.
부나 군이라 불리는 큰고을을 피해서, 중앙조정에서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힘쓰지 못한 외진 현을 찾아가며 계속해서 씨앗을 뿌렸다.
소백산맥의 양옆구리를 계속 긁으며, 차령산맥의 허리를 뚫고 나아간다.
고령,합천,지례를 거쳐 추풍령을 넘고 황간,영동,청산,보은,괴산,음성,음죽,여흥을 거쳐 남한강을 건너 지평,양근,양주를 지나 드디어 한성부를 눈앞에 두게 됐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여정을 진행하면서, 짐은 완전히 털어냈으나 반대로 사람은 더욱 늘어났다.
자본유학에 심취하여, 가진 것 없이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달랑 찾아온 서얼들이 계속해서 합류했으니까.
긴 여정동안 온통 산과 맞닿아 있는 현과 시골마을만 돌아다녔으니, 드디어 평야가 나오자 모두의 마음이 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반대로 연오랑의 눈빛은 가라앉았고, 기분도 함께 가라앉았다.
이 시대의 한성과 한성부는 21세기 메가시티 서울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동대문이 왜 동대문이겠냐. 한성의 동쪽 끝 성문이니까 동대문이지.
21세기로 치면 종로구, 중구, 용산구일부만 사대문 안에 포함되니, 엄청 작은 거지.
21세기에 흔히들 강서,강북,강동,강남이라고 부르는 외곽지역은 애초에 한성부에 속하지도 않고, 도시로서 개발조차 안됐다.
제대로 된 강동, 강남개발은 무려 20세기나 돼서야 시작되잖아?
다만 성저십리라고 해서 한성도성 밖 10리 지역을 한성의 관할로 하는 한성부 안에 뒀다.
이 시대 한성의 인구는 대략 10만명 정도.
수도치고는 엄청 적어 보이지만, 15세기 기준으로 보면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도시다.
중국은 워낙 사람이 많으니까 예외로 치고.
아무튼 전근대시대에 이런 대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도시 근방을 거대한 식량창고처럼 만들어야 했다.
성저십리의 개념은 여기서 나온다.
물길을 통해서 조운선이 한성에 식량을 운반해오는 동시에, 한성주민을 먹여 살릴 식량을 성저십리에서 생산하는 거지.
하여 이들 앞에 펼쳐진 건, 끝도 없이 펼쳐진 농토와 평야들.
물론 자로 잰 것 마냥 쫙쫙 줄맞춰서 개간됐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15세기에 많은 걸 바라면 안 된다.
아무튼. 촌놈이나 다름없는 이들 모두가 한성을 보고서 기분이 풀어졌는데, 연오랑은 왜 저기압이냐?
간단한 이유다. 그는 한성이 더러워서 싫었으니까.
이 시대의 상하수도 시설은 뭐라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엉망이다.
저 먼 유럽에선 오물을 하도 길가에 내다버려서 하이힐이 발명되었던가? 여기도 마찬가지다. 온갖 생활하수와 오물을 아무 곳이나 마구 버린다.
길은 또 어떤가.
태조와 태종대에 널찍하게 길을 만들어놨어도, 사람이 점점 늘어나면서 집을 마구잡이로 지어대서 길을 파고들었다.
사람이 지나다니면서 어깨를 부딪치고 다니는 건 예삿일이고, 나무를 마구 심어대서 말 타고 다니다가 나뭇가지에 얼굴이 쓸리는 것도 예삿일이다.
집은 또 어떤가.
일반 양민이 사는 집은 전부 초가집이 아니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다닥다닥. 집을 붙여서 지었는데, 불이라도 한번 나면 난리가 난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고.
이 시대에 위생개념이 있던가? 있긴 있지만, 21세기와 비교하면 곤란하지.
물론 지금은 고려, 불교문화가 깔려 있어서 주기적으로 씻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꼬박꼬박 못 씻는 빈민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이들이 바글바글하면 그 악취가 얼마일까.
더군다나 식량보존이 힘들어서, 어지간한 집은 죄다 메주를 만들어 담는다.
21세기 종갓집에서나 할 법한 일을 모두가 하고 있으니, 집집마다 처마에 매달려 메주가 익어가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더불어 쿰쿰한 냄새가 집안을 점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이 모든 악취가 뒤섞여서, 10만명이나 되는 열기와 합쳐져 바글바글 거리는데... 도무지 참고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똥냄새 풍기는 시골이 더 견딜 만하다. 거긴 바람이라도 잘 통하니까.
*****
성지십리와 양주도호부 경계에는 요상하면서도 신기한 마을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이 마을이 배봉산 자락에 있다고 배봉마을이라 불렀다.
신기한 점? 첫째는 조선에서 보기 힘든 이상한 형태의 가옥이 많다는 점. 둘째는 마을의 구성원이 대부분 청년들이라는 점.
셋째는 관리들이 너무 많이 드나든다는 점. 넷째는 농사일은 별로 안하고 이상한 짓을 너무 많이 한다는 점.
끝으로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인근 성저십리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배봉마을을 자주 드나들었다.
대체 어디서 돈이 났는지 모르겠다만, 이들은 돈을 풀어 농한기에 이런저런 작업을 시켰다.
또 농사에 필수적인, 하지만 본적 없는 생경한 거름을 팔았기 때문이다.
“음...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뭐가 말입니까. 또 농땡이 피우시는 겁니까?”
“농땡이라니? 이것도 다 업무라네.”
소매가 좁은 한복을 입고 있는 청년이 캐묻자, 관복을 입은 청년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업무는 무슨. 또 구경하러 온 거 아닌가.
이 양반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선, 이 건물 저 건물 살펴보면서, 이따금씩 줄자를 가지고 이것저것 재고 그랬다.
“매일 이렇게 찾아오실 거면, 그냥 여기 살지 그러십니까?”
“오! 그래도 되나? 방 자리가 났나?”
빈정거리면서 말을 하자, 오히려 반색하면서 달라붙는 게 아닌가.
청년은 눈을 반짝이는 청년 관리를 보며,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이 이제 거의 다 올라갔으니, 한번 문의해 보시죠.”
“아. 그렇지! 거길 구경 가야겠군!”
청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년 관리는 후다닥 철자를 챙기고선 몸을 일으켰다.
관리가 발을 놀려 도착한 곳은, 마을 한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사판이었다.
이 또한 눈을 휘둥글게 만들 정도로 신기했다.
초가집이나 기와집이 아니라, 무슨 궁궐의 전각마냥 얇고 길쭉했다.
ㄷ자 모양으로 생긴 하나의 건물인데, 대충 봐도 방이 20개는 넘게 들어갈 정도로 컸다.
외벽은 또 어떤가. 벽돌과 나무기둥, 잘 깎은 석재가 섞여 있어서 “이건 대체 무슨 양식인가?”싶은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중국식은 아니고, 왜관의 일본식은 더욱더 아니다. 구조와 형태는 조선식과 닮았는데, 내부와 외벽은 또 다른 것 같고... 하여튼 생경한 모습의 2층 가옥이다.
“또 오셨습니까? 나리.”
“오냐. 너도 또 왔구나?”
“또 온 게 아니라, 제가 책임자입니다만...?”
“그래. 그래.”
청년 관리는 얇은 털옷을 입고 있는 소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지만, 어쩌겠나. 사실은 사실인데.
처음 소년을 만났을 때. 청년 관리는 웬 꼬마 녀석이 인부들을 이리저리 부리는 걸 보며 놀랐다.
이 마을 촌장 아들이라도 되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라네? 해서 이것저것 캐물어보니, 보통 영특한 게 아니었다.
조정에서도 보기 힘든 정교한 도면을 가지고, 이리저리 손을 놀리며 숫자를 적어 가는데. 그 또한 생경하고 신기했다.
아라비아 숫자와 21세기식 산술기호를 쓰고 있었으니까.
숫자만 신기했을까. 도면에 쓰이는 철자, 삼각자, 줄자, 원규圓規(컴퍼스), 먹줄, 각도기, 수평기 등등.
하여간 녀석이 쓰는 물건은 지금껏 그가 봐왔던 제도기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자, 꼬마는 귀찮아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마을 한쪽에 위치한 공방에 데려갔다.
그리고 청년 관리는 보물단지를 발견했다.
여기엔 건물을 좋아하는 그에게 딱 맞는, 온갖 철제 제도기기가 잔뜩 쌓여 있었으니까.
눈이 돌아간 청년 관리는 수도 없이 공사판을 들락거렸고, 이젠 이 꼬마 녀석과도 나름 친분이 생겼다.
“꼬마야.”
“꼬마가 아니라 과장입니다. 아니면 그냥 순지라고 부르시든가요.”